어둠을 보기, 날이 밝을 것이므로

양유연의 〈기도하는 사람〉(2018)을 두고 윤원화는 “그것은 특정한 인물의 묘사나 시각적 구성, 한 점의 회화 또는 이미지이기 이전에,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인간의 초상으로 제출되었다”고 썼다. 이어지는 긴 글을 읽는 대신 삽입되어 있는 〈시선의 몫〉(2019)(캡션 또한 보지 않은 나는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이리라고 생각했다)과 〈막후〉(2019)의 이미지를 보았다.1 채도가 낮은, 그러나 대비도는 높은, 그러나 여전히 강렬하다기엔 가라앉아 있는 그림들. 가라앉은 초상을 그리는 사람, 그 정도를 알고, 아니 그 정도를 기대하고 전시장을 찾았다.

초상은 아마도 회화, 혹은 사진이나 조각 따위를 포함하는 시각예술 전반에 있어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영역일 것이다.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더라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나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라면 (‘원본’은 아닐지라도) 한번쯤 본 적이 있게 마련이다. 추상화나 풍경화 또한 스치듯이나마 본 작품들이 있지만 구분할 만큼 기억해내지는 못하는 이라도 사람 얼굴은 조금 더 쉽게 기억하곤 한다. 예술이라고 말할 때 곧장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교과서에서 위인들의 초상을, 패션잡지에서 모델들의 초상을, 선거 벽보에서 정치인들의 초상을 마주하게 된다. 시각을 사용하며 사는 한, 초상은 늘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익숙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어떤 환상이 있거나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초상에 마음이 가는 것은 말이다. 초상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혹은 보이는 그대로의 인물이 드러날 것이라는 환상2, 혹은 수없이 보아 왔으므로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물론 그리거나 만들거나 촬영한 이가 그 인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3, 에 관해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는 이도 보이는 이도 어쩔 수 없는 무언가가 스며 나올 것 같은,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찾아간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서울: 아마도예술공간, 19.09.06-29.)는 초상을 내건 전시는 아니었다. 처음 마주한 것이 사람 얼굴 그림이기는 했다. 〈맑고 무겁게〉4, 긴 머리칼에 가려 조금만 보이는 옆얼굴. 한 칸짜리 공간 ― 들어갈 수는 없고 다만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 볼 수만 있었던 공간 ― 가운데에 걸려 있는 이 얼굴을 지나 다음 공간으로 들어가면 역시 허공에 매달려 있는 〈휘광〉이 보인다. 세로로는 이마부터 인중까지, 가로로는 귀가 끝나는 지점부터 반대쪽 귀가 시작되는 지점 정도까지를 그렸다. 이때까지도 여전히 나는 다음 공간에도 얼굴들이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럼에도 얼굴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빛. 전시 홍보물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낮은 채도에 비해 명암 대비는 강했지만, 그려진 빛이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다. 장지에 엷게 칠해 완성한 그림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뒷면에는 판을 덧대지 않았다. 밝게 그려진 부분, 그러니까 특히나 엷게 칠한 부분 ― 어쩌면 칠하지 않은 부분 ― 을 통과하는 빛이 있었다. 나는 〈휘광〉의 뒤로 돌아들어 갔다. 아크릴물감은 장지 뒤로 스미지 않았지만,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빛나는 부분, 맞은편의 빛이 통하므로 어슴프레하지만 다른 곳보다 밝은 부분 두 곳이 있었다. 무언가를 되비쳐 희게 빛나던 눈동자 반사광을 그린 자리의 흔적이다.

그러니까 빛에 관한 그림들이었던 셈이다.5 다음으로 본, 역시 머리카락에 가리어 조금만 보이는 옆얼굴이 있는 〈Scene〉까지, 얼굴은 그렇게 셋이 다였다. 나머지 여덟 점은 사람의 뒷모습이나 그림자, 혹은 크고 작은 창, 그것도 아니라면 무언지 알 수 없는 얼룩 같은 것을 경유해 그린 빛들이었다.

얼굴을 담은 것들도 얼굴을 경유해 그린 빛이라고 해야 좋을까. 얼굴과 빛, 두 개의 단어를 들고 비로소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을 생각했다. 초상이건 실물이건 빛이 비쳐야 비로소 볼 수 있다. 많은 경우 날이 밝아야 비로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다고 했던 유행가 가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보고 싶은 이에게 있어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라는 문장은 희망의 말일 테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희망,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더듬으며 붙들어야 하는 류의 희망의 말이다.

하지만 잘 살게 되는 날 쯤이 아니라 그저 얼굴이 보일 만큼의 빛이 퍼지는 날 정도라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분명히 ― 금세 ― 온다.6 그러므로 이것은 딱히 희망의 말은 아니다. 적어도, 극적인 희망의 말은 아니다. 뜻하지 않고 태어나 뜻과 달리 살아가는 많은 경우 이것은 오히려 절망이거나 짐이기까지 하다. 희망이라는 이름은 다만, 그 짐을 덜 만큼의 부력을 줄 뿐이다. 날이 밝을 것을 기다리는 대신 그저 알고만 있는 것은 그래서일 테다. 날이 저물 것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극적인 희망이 아닌 만큼, 극적인 절망 역시 아니다. 담담하게. 천천하게. 낡이 밝으면 보고 날이 저물면 더듬으며, 담담하고 천천하게 살아가는 ― ‘나아가는’보다는 ‘살아가는’이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느낀다 ― 사람의 말로 읽었다. 〈시선의 몫〉의 주인공은 미광 쯤은 비치는 곳에 앉았다. 커튼 친 실내가 밝으므로, 커튼 너머(혹은 밖)는 어두우리라고 짐작한다. 〈시선의 몫〉의 주인공은 제 얼굴을 ―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빛을 감각하는 기관인 눈을 커튼 너머에 두고 있다. 어두운 곳에 머리를 묻고 있다.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으므로,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1. 윤원화, 「인간을 그리는 법」, https://neolook.com/archives/20190906b. URL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열었다가 〈손에 담은 빛〉(2019)의 도판도 실려 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2. 이 점에 있어 나로서는 사진과 회화, 조각 등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다.
  3. 혹은 그가 그 인물이 어떻게 보이기를 원하는지.
  4. 이미 쓴 것을 포함해, 언급되는 모든 작품은 〈기도하는 사람〉을 제하면 모두 2019년작, 장지에 아크릴릭. 크기는 다양하다.
  5. 박성환은 “전시명인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는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불안의 글(Livro do desassassego)》에서 인용한 구절”이라고 소개하며 “그러나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만 어린 속삭임과 양유연 작가가 마주하는 박명(薄明)의 시간의 정서는 다르다”고 덧붙인다.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잠드는 작가의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감정임과 동시에 이중적이기도 하다. 〔…〕 불분명한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불안과 두려움, 감각들에 대한 심의의 공허함에서 기인한 어두움의 정서를 그려왔던 양유연은 신작 11점을 통해 ‘어둠을 밝히는 존재’를 의식하는 시간을 진동시킨다”는 말이 이어진다.(박성환, 「어둠을 밝히는 존재를 그리다」, 전시 리플렛. 주 1에 링크한 페이지에, 좀 더 긴 버전이 실려 있는 것을 또한 발견했다.) 페르난두 페소아를 읽어보지 못한 탓이거나 양유연의 전작들을 보지 못한 탓에 이 문장들, 혹은 뒤로 이어지는 공간이나 시간에 관한 말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계속해서 빛을 생각했다.
  6. 여기까지는 2019년 10월에 썼다. 2020년 1월에 이 뒤를 쓰기 시작하며, 앞에서 오타 하나를 고쳤고 불필요한 조사 하나를 지웠다. 인용한 글에 관한 정보를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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