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Reema Salha Fadda, “New Lessons from Gaza,” Jadaliyya,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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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알세르칼미술재단”Alserkal Arts Foundation, 바르질미술재단Barjeel Art Foundation, 팔레스타인박물관Palestinian Museum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 《이 땅에서On This Land》의 폐막 강연이다. 전시는 2023년 11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두바이의 콘크리트Concrete에서 열렸다. 위는 전시장 사진이다.][1][역주1]
저는 15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문화정치를 연구하고 그에 관한 글을 써 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50일 동안, 이스라엘의 인종학살 앞에서 말이란 너무도 미력하다는 기분에 휩싸였습니다. 거의 두 달을 생중계되면서, 가자는 팔레스타인인들, 그 기관들, 그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합병·절멸 정책의 끔찍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들의 디스토피아적 갤러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물론 우리에게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불안을 안깁니다. 오늘 저는 현재의 위기, 특히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문화파괴deculturalisation 과정을 들여다 볼 문화적 렌즈를 제공하는 것으로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합니다. 우리 모두가 목도하고 있는 끝없는 악몽을 얼마간이라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피억압자들에게 강제되는, 가자를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드는 형언할 수 없는 — 부패해 가는 피폭지, 죽음, 질병 같은 — 비인간성의 끔찍한 이미지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보고 있습니다. 한 데 모아놓고 보면, 이 인종학살의 이미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 드는 이스라엘의 폭력 문화와 거리낌 없는 잔인성을 기록하는 아카이브로 기능합니다. 정 반대로, 이 전시장에서 우리를 둘러싸는 이미지들은 추방, 종족 청소, 계속되는 식민적 삭제에 맞선 생존의 아카이브라 할 수 있습니다. 그저 팔레스타인 작가들을 상찬하는 것을 넘어, 이 전시는 우리에게 우리가 팔레스타인과 그 생존에 대해 공유하는 집단적 사랑, 돌봄, 희망을 상기시킵니다.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파괴와 절망의 이미지들 너머에서 우리의 끈질긴 문화사를 가시화하는 것은 연대를 보여주어 힘을 주는 일이자 집단적 행동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일입니다.
실제로, 이 전시의 정신은 제가 한 해 동안 진행했던 한 기획을 떠오르게 합니다. 2012년 5월에 가자에서 열린 문화축제 — 그해에 이스라엘이 벌인 두 번의 공격 사이에 끼어 있었던 행사 — 로 마무리된 기획입니다.
저는 가자에 두 번 다녀왔습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나 부정적인 의미에서나 모두 압도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가자에 있을 때 가장 불안한 것은 어디에나 퍼져 있는 이스라엘의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은 부재를 통해서까지도 존재합니다. 라파 검문소를 지나 봉쇄된 국경을 넘어 들어가는 즉시, 가자가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과 세계로부터 의도적으로 고립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동과 물자를 제약할 뿐 아니라 가자의 바다와 하늘도 통제합니다. 밤에 바다 건너를 보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어부들이 제 바다에 가지 못하도록 가자의 수면에 넘치도록 펼쳐놓은 조명을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쓰는 또 한 가지 심리전 전술은 음속 장벽 돌파입니다. 소닉붐을 일으켜 가자 주민들에게 이스라엘이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그들의 영공을 통제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거죠. 이스라엘의 2014년 폭격 당시 그냥 해변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을 뿐인 바크르Bakr 가족의 소 년 네 명을 살해한 것은 가자가 그저 “지붕 없는 감옥”이 아니라 바깥과 차단된 절멸 수용소임을 여실히 상기시킵니다. 이런 현실은, 이달 초에 나온, 가자 해안에서 깃발을 올리고 국가를 부르는 점령군의 이미지들을 더더욱 아프게 만듭니다. 이 역시 공공 공간에[역주2] 대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권력 불평등을, 그리고 선명한 괴리를 상기시키니까요.
봉쇄 당한 영토에 부과되는 피할 길 없는 제약들에도 불구하고, [그 행사가 있었던] 2012년에 잠깐 동안, 저희는 문화적 포위를 뚫고 국제 문화실천가들, 작가들, 미술가들, 음악가들, 그리고 여러 권의 서적을 대대적으로 들여보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폐막식 날에는 1980년대 말에 전 시장의 이름을 따서 개관한 문화 공간 라샤드 알 샤와Rashad al Shawa에서[2]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참석했죠. 남녀노소로 가득했습니다. 혁명가요들을 함께 부른 후에 한 여성 분이 저에게 와서 “이렇게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낀 건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말했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축제를 진행한 한 주 내내 학생들, 관객들, 자원활동가들이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저처럼 디아스포라에서 태어난 다른 팔레스타인인들, 우리의 이집트 이웃들, 다른 곳에서 온 예술가들과 연결되고 만나는 일의 중요성은 그저 생존할 권리가 아니라 삶을 살 권리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다름아닌 문화, 그리고 공동체와의 대화입니다.
가자 문화파괴
‘잔디 깎기’ 정책 — 이제 한층 강화되어 이 고립지 전역을 밀어버리는 — 을 통해 가자의 풍경에 선명한 공포를 덧붙이기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전략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서 지워져 버리리라고 경고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주물납 작전이[원문 그대로임 / 역주1 참고] 벌어지던 2014년에 제가 [이 강연에 일부가 인용된] 글을 쓰고 있던 당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들은 예외적인 스펙터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에 탄 가자 땅은 이스라엘 정책의 체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 필연적인 파괴의, 팔레스타인의 자율적인 미래에 대한 부정의 — 메타포로 읽어야 합니다.
7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역사적 팔레스타인은 공격적으로 재영토화되었고, 오늘날 가자가 그러하듯 탈영토화되었습니다. 1967년에 서안과 가자를 점령한 후로 이스라엘 점령군은 민족 단결에의 집단적 의지를 무너뜨리고자 팔레스타인 사회를 여러 조각으로 분열,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전격적인 군사주의를 통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회를 가자, 동예루살렘, 서안으로 공간적으로 재정렬했고, 국제 사회의 반발 없이 물리적, 인지적으로 분열시켰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 전역, 강에서 바다까지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호소는 터무니 없게도 서구 인종학살 옹호자들에게서 논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한 번 가자에 무도한 폭력을 퍼붓고 있었던 2014년, 가자의 듀오 아랍과 타잔은 풍자 포스터를 제작했습니다. 저는 이 유명한 관광 포스터의 재전유가 전 지구 경제에서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생각할 때 어떤 의미에서 이중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지에 관해 썼습니다. 예루살렘과 달리 가자에 많은 이들이 알아볼 만한 상징적인 스카이라인이 없습니다. 가자가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는 전쟁, 폐허, 저개발입니다. 가자는 국가나 도시, 권역이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홍보하고 세계 무대에서 주요 행위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신자유주의적 문화적 성공의 핵심 교리가 된 “시장성 논리”에[3] 맞지 않는 쓰잘데없는 도시 브랜드입니다.
더욱이, 이 작업은 가자가 저항의 길을 택하지만 않았다면 “중동의 싱가포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이스라엘의 신화를 무너뜨립니다. 이런 비난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고, 네타냐후는 이번 인종학살을 시작하면서 크네세트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들[하마스]은 중동을 중세 시대의 야만적 광신의 수렁으로 되돌리려 하지만 우리는 중동을 21세기 진보의 정점으로 이끌고자 한다.
최근에 미국 인기 토크쇼 《더 뷰》에 나온 힐러리 클린턴도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에서 생산적인, 성공적인 경제를 누려 마땅[했지만] 하마스가 끼어들어 사실상 그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는 말로 다시 한 번 이런 거짓 논리를 퍼뜨렸습니다.
가자가 경제적, 문화적으로 개발된 관광지가 되지 못한 것을 가자 탓으로 돌리는 것은 좋게 말해도 망상입니다. 이스라엘이 수십 년간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자를 강력히 통제해 온 것을 완전히 모른 체하는 일입니다. 1948년 이래로 이스라엘의 검열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주장하거나 팔레스타인이 문화적 역사가 있는 민족임을 시사하는 일체의 시각적, 문화적 표현을 제거함으로써 할페스타인의 도시들을 통제해 왔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이 1967년에 동예루살렘을 강제합병 한 후 처음으로 만든 법 중 하나가 문화적, 성경적 사적지 전부를 이스라엘의 관리 하에 두는 법률이었습니다. 이런 문화파괴 공정은 이 땅이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있다는 역사적 토대를 다지는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연결관계와 역사적 서사를 밀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분리 장벽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파편화와 1967년에 이미 착수된 고고학적 몰수는 고대의 성지에 대한 유대인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역사적 풍경을 시각적으로 뜯어고칩니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은 정치적 장 내에서 역사적 관점을 더 잘 지킬 수 있게 되고, 이는 국제 사회가 종종 기꺼이 팔레스타인의 문화적 서사를 버리고 그들의 안보 서사를 받아들이는 이유가 됩니다.
오늘날, 가자에서 15,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70만 명이 집을 잃었음에도 지배적인 이스라엘의 논리는 여전히 가자의 파괴가 민간 기반시설에 무기를 보관한 하마스 정책에 따른 결과라고 말합니다. 증거도 없이 가자의 민간인들이 인간방패로 쓰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자에 이제 16년째 감금되어 있음을 무시하고, 작금의 공격을 테러에 맞선 민주주의 전쟁으로 포장하는 — 친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은 “하마스라이팅”이라고 비꼬는 — 가짜 자유주의를 들이댐으로써 가자의 운명을 팔레스타인 반식민 투쟁이라는 큰 맥락에서 떼어내려 합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자기방어와 자국 문화 보존을 내세워, 교육·문화 기관을 포함해 인구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무도한 폭력을 저질러도 됩니다.
이번 공격에서 이스라엘은, 가자의 생존에 치명적인 고의적 보건의료 체계 파괴에 더해, 교회들, 가자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인 오마리대모스크Great Omari Mosque, 대학 및 학교들, 정교회 문화센터Orthodox Cultural Centre, 알-카라라문화박물관Al-Qarara Cultural Museum, 그리고 자체 재정으로 학생 견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인 라파박물관Rafah Museum을 파괴했습니다. (UNRWA 학교들은 자원 부족으로 인해 이부제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기에, 문화 센터들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문화사에 대한 교육 워크숍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언급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상황이 그러하기에 이 아동들의 교육의 미래를 개발하는 데에 교과과정 외 지원은 필수적입니다.) 이 같은 문화적, 교육적 공간들의 파괴가 이어지자 유럽·지중해인권감시Euro-Med Human Rights Monitor에서는 최근의 공격들을 “문화 유산에 대한 군사작전”으로 칭했습니다. 이런 파괴 행위는 기념물들이 철거되고 있는 제닌Jenin이나 툴카렘Tulkarem을 비롯해 [서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도시들 곳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해당 도시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겨냥한 이런 폭력 행위들은 팔레스타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모욕입니다.
새 지도들, 새 역사
10월 7일은 물론 가자 역사의 시작점은 아니지만, 가자를 “중세 시대”로 되돌리려는 이스라엘의 정책이 가속된 때이기는 합니다. 10월 7일은 또한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종학살로 인식하는 이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가자의 절멸을 지지함으로써 인종학살을 부정하는 이들 간의 인지적 아파르트헤이트를 낳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행태에 비판적인 이들 사이에서 인종학살이라는 말이 주류화되는 것이 두려워,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 대변인 존 커비는 지난 주에, 이스라엘인들의 프로파간다 작업을 대신 맡아, 하마스를 “인종학살 테러리스트 위협”이라 칭함으로써 그 말을 재전유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대량학살 당하는 데에는 단호히 침묵을 지키면서 말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버드 법학 리뷰》에서는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인종학살을 범하고 있다고 적은 팔레스타인인 학자의 글을 반려했습니다. 우리는 인종학살을 인종학살이라 부르는 것이 인종학살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되는 국면에 있습니다.
언어 조작에, 그리고 얼마 전 주UN 팔레스타인 대표가 “국가가 지원하는 허위 정보”라 칭한 것에 힘입어, 이스라엘과 그 동맹들은 인종학살을 “인간 동물”에 맞선 도덕적 싸움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점령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정당한 투쟁을 깎아내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 같은 팔레스타인인 비인간화는 — 나치 독일 치하에서 해충 혹은 기생충으로 불렸던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인종학살적 수사나 1930년대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 중국인들을 지나 돼지Shina Pig라 칭했던 것과 다를 바 없이 —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집단적 처벌을 용이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10월 7일 이후의 사건들은 또한, 서구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두려워 했던 것을 모조리 재확인했습니다. 주류 정치 담론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목소리들을 타자화하고 침묵 시키고 배제하려 애쓰는 서구 기관들의 민주적 대표성에 대한 우리의 불신을 말입니다. 정치적, 법적, 교육적 층위에서 펼쳐진 이런 가혹한 정책들은 이제 소위 자유주의적인 미술계에도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아트포럼Artforum》 편집장 데이비드 벨라스코David Velasco는 휴전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실었다가 해고당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조직위원이 소셜미디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게시물을 올렸다는 이유로 사진 비엔날레가 취소되었습니다. 독일의 친팔레스타인 연대 단속은 도큐멘타 예술감독선정위원회의 사임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예술가, 큐레이터, 문화행정가들이 팔레스타인과 함께한다는 이유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이들을 겁박해 침묵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작금의 대표성 왜곡에, 《뉴욕 타임스》 시 부문 편집장 앤 보이어Anne Boyer는 “합중국의 지원 하에 이스라엘국이 가자 민중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에 대응해 [사직하면서] 강력한 서한을 발표했습니다.
예술가의 일은 자기표현이라 여겨지는 현 사회에서, 때로 예술가가 가장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은 거부입니다. 나는 우리를 이 불합리한 고통에 익숙해지게 하는 이들의 ‘합리적인’ 어조들 한가운데에서 시에 관한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악귀 같은 완곡어법들을 더는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말로 미화되는 지옥들을 더는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전쟁을 부추기는 거짓말들을 더는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나의 사임이 《뉴욕 타임스》에 시의 크기만 한 구멍을 낸다면, 그것이 현재의 진실한 모습일 것입니다.
보이어가 물러난 것은 고인이 된 팔레스타인 시인 무리드 바르구티Mourid Barghouti가 언어말살verbicide[역주3] — 고의적으로 언어를 왜곡해 진실된 재현을 가로막는 것 — 의 부식 효과라 부른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2003년에 쓴 〈언어말살〉이라는 글에서[역주4] 바르구티는 이스라엘의 언어 조작을 이해하면 우리가 인종학살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더 구체적으로는 그런 왜곡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역사적 팔레스타인을 식민적으로 재구획할 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언어의 오염은 서안이라는 말에서 더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무엇의 서쪽이란 말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동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요르단강 서쪽이다. 요르단강 서안은 지도 상의 위치일 뿐 나라가, 고국이 아니다.
언어를 위한 싸움은 땅을 위한 싸움이 된다. 어느 한쪽이 파괴되면 다른 한쪽도 파괴된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이 사라지면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도, 나라도, 고국 땅도 사라진다. … 저들은 단어 하나로 온 민족의 정의를 바꾸고 역사를 지운다. 이스라엘 점령은 팔레스타인인의 정의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무한히, 바꾼다. 그를 무장세력이라 부르라. 무법자라고, 범법자라고, 테러리스트라고, 상관 없는 이라고, 암덩어리라고, 바퀴벌레라고, 뱀이라고, 바이러스라고 부르라. 이런 목록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정의하는 이가 되라. 정의하라! 분류하라! 악마화하라! 호도하라! 단단히 딱지를 붙이라! 그리고는 탱크를 보내라!
언어말살이 인종학살로 이어질 수 있을까?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듯, … 지나친 단순화는 파시즘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그들 대 우리라는, 우리 편 아니면 악의 편이라는 수사는 그저 무책임한 말놀음이 아니라 곧 전쟁 행위다.
오늘날 우리는 ‘가자=하마스=인종학살은 정당함’이라는 과도한 단순화가 어떻게 곧장, 이미 좀먹힌 가자 영토를 더더욱 작은 공간으로 쪼그라들게 하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10월 7일 이전에 가자는 과밀한 한덩어리로 상상되었으나 최근의 공격은 우리의 머릿속에 더더욱 좁아진 지도를 그려버렸습니다. 일찌감치 북가자와 남가자를 나눔으로써 이스라엘의 기만적인 군사 전략은 걸어서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 팔레스타인인들의 대대적인 탈출을 초래했습니다. 1948년에 자신들이 살던 도시나 마을에서 추방 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을 떠오르게 하는, 잊히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인종학살이 격화되면서, 그리고 민간 기반시설들이 계속해서 적극적 표적이 되면서, “북가자”는 더더욱 파편화되어 알시파병원, 인도네시아병원, UNRWA 학교들, 자발리야 난민촌 등 몇몇 거점 건물들, 거주 구역들만 ―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그러나 쓸려나가고 있는, 구역 및 기관들 ― 남았습니다. 한한편으로 이는 이스라엘이 테러 전략 거점들을 특정해 겨냥하고 있다는 거짓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공공 공간의 이같은 거짓된 재배치는 가자를 여기저기 외따로 건물들이 서 있는 맥락 없는 공간으로 축소하기 위해, 그리하여 가자를 수백 년 된 풍성한 문화가 있는 도심지가 아니라 게임화된 전쟁터로 비인격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여러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이런 파편화을 이용해 방향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종족청소를 덮어놓고 정당화해 왔습니다. 재무부 장관 베잘렐 스모트리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세계 각국으로 이주하는 가자 아랍인들의 진취성을 반갑게 생각합니다 … 이것이야말로 가자 주민들을 위한, 난민생활, 빈곤, 위험 속에서 75년을 보낸 이 지역에 대한 올바른 인도적 해법입니다”라고요. 주미 이스라엘 대사 대니 다논의 말에서도 이런 구상이 드러납니다.
가자는 전쟁 전에도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고, 전쟁이 끝난다고 더 나아지지도 않을 거예요. 가자를 떠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국제사회가 선택지를 열어주는 방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나라가 상징적인 숫자의 팔레스타인인을 받아들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나라로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가자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열어주면 왜 안 되겠습니까?
실은 종족청소 인종학살주의자이면서 인도적 해법을 내놓는 체 합니다.
우려의 언어를 쓰고, 팔레스타인 땅은 논하지 않는 한에서만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옹호하는 것은 잔인한 아이러니입니다. 의료 용품, 연료, 구호 물자 등이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정부 인사들이 말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런 담론은 가자를 인도적 위기로 축소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주체성과 해방투쟁을 빼앗아 팔레스타인을 탈정치화합니다. 게다가, 그들의 말은 네타냐후가 인종학살 시작 겨우 몇 주 전에 UN에서 제시한 “새 중동 지도” ― 지도에서 팔레스타인이 완전히 지워진, 노골적인 지도제작 프로파간다 ― 와 궤를 같이 합니다.
지난 50일은 식민자의 이미지 속에서 가자의 지도가 얼마나 재빨리 다시 그려질 수 있는지, 가자가 얼마나 재빨리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새로운 스승들
친구들,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더는 나빠질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어떻게든 상황이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더더욱 큰 실존적 문제가 이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과 그 동맹들은 계속해서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미래 세대에 진실을, 옳은 것을, 정의를 가르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소위 일시중지는 낙관할 여지를 그다지 주지 않지만, 저는 우리가 완전히 절망할 일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팔레스타인 작가 에밀 하비비Emile Habibi가 풍자적으로 쓴 “비관낙관주의pessoptimism라는 말에 기댑니다. 조금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벗어날 수 없는 절망과 나란히 있는 희망을 갖고 살기. 이렇게 번역해 볼 수 있겠습니다. 비관낙관주의적이 되어야 한다면, 이 터무니없는 잔인한 시간들을 보내며 우리 모두가 의지해 온 새로운 스승들에게 주목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이 어두운 역사의 시대에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준 ― 모타즈 아자이즈Motaz Azaiz, 플레스티아 알라카Plestia Alaqa, 힌드 쿠다리Hind Khoudary, 비산 오우다Bisan Owda, 와엘 알-다흐두Wael Al-Dahdouh 등 ― 팔레스타인의 걸출한 시민 기자들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 세대의 학생들에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진 유구한 억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기자들을 표적공격하고, 해외 언론이 가자에 오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대화의 초점이 당장의 인도적 대응에 관한 담론을 넘어 이스라엘 정착자 식민 기획의 잔인성을 이해하는 장기적 관점으로 옮겨 갔다는 사실은 고무적입니다.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 사람들에게 재난자본주의와 시온주의가 일으키는 부식을 알려주기 위해 활동하는 콘텐츠 제작자들이 만든 영상이나 인포그래픽이 유통되는 데에서 이런 변화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같은 젊은 사람들은 지극히 명민하고 접근가능하고 신나는 방식으로, 작금의 정치적 시급성을 희석시키지는 않으면서, 반식민적 미래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뒤에는 팔레스타인 사상가, 활동가들이 수십 년 간 해 온 노력이, 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 같은 전 지구적 운동들이, 그리고 송환과 선주민 권리를 둘러싸고 이어지고 있는 담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이 모든 곳의 모든 이들을 위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에의 요구를 가속화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이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존재가 된 순간에 와 있습니다. 수박 ― 수십 년째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검열에 창의적으로 저항하는 우리의 오랜 상징 ― 이 그려진 플래카드가 세계 곳곳에서 서구 정부들의 엄혹한 반팔레스타인 법률들에 맞선 저항에 쓰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 그 정착자-식민 기획이 전 지구적 국가 공동체의 재정과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아마도 그래서 오늘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잔혹행위가, 리처드 시무어Richard Seymour가 주장하기로, ‘전 지구적으로 reverberating’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전 지구적 억압들이 이어져 있음을 인식게 하는 것일 터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옛 스승들이, 그리고 새로운 스승들이 어떻게 전 지구적 정의에 중심을 둔 새로운 의식을 끌어냈는지,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아온 모든 콘텐츠 중에서도 제게는 팔레스타인 콘텐츠 제작자 살마 샤와Salma Shawa의 것 하나가 가장 울림이 있었습니다. 인종학살 40일차에 게시한 틱톡 영상에서 그녀는 마고 제마크Margot Zemach가 유명한 이디시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쓴 『더 심할 수도 있어It Could Always be Worse』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역주5] 아이가 있는 분이라면 『너무 좁아A Squash and a Squeeze』라는 유명한 줄리아 도널드슨Julia Donaldson 버전을 통해 알고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아내와 여섯 아이, 그리고 자신까지 일곱 명이 함께 사는 집이 너무 좁아서 참다 못한 한 남자가 현명한 랍비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이보다 심할 수는 없다”며 상황을 이야기하자 랍비는 집에 동물들을 들여보내라고 조언합니다. 남자는 그렇게 하고, 상황은 전보다 더 심해집니다. 그는 몇 번이나 다시 랍비를 찾아가 불평을 하고, 랍비는 매번 동물들을 더 들이라고 답합니다. 더는 못할 지경이 된 남자는 결국 랍비에게 말합니다. “도와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 숨 쉴 공간도 없어요. 악몽보다도 더 심합니다!” 랍비는 이제야 집에서 동물들을 내보라고 말하고, 남자는 그렇게 합니다. 집은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던 때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튿날 남자는 신이 나서 랍비에게 말합니다. “덕분에 제 삶이 행복해졌습니다. 오두막집에 저희 가족만 있으며 정말 조용하고 정말 넓고 정말 평화로워요 … 어찌나 좋은지요!”
몇 달 전에 제 아기에게 도널드슨 버전으로 이 이야기를 읽어주면서는 이 이야기를 감사하는 마음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살마 샤와가 팔레스타인 교사의 관점에서 다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이것이 권력과 억압에 관를, 즉 권력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강압과 통제를 통해 피억압자들의 혁명적 야망을 꺾을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비판적 렌즈를 통해 읽으면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가자에서 목도하고 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함을 이해하는 데에 꼭 맞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스라엘의 노골적인 폭력은 인종학살 이전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이 바람직했다는 착각을 일으킬 뿐 아니라 미래의 해방된 팔레스타인을 생각지도 못하게 만들려 하는 은밀한 폭력을 숨깁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최악의 순간에조차, 얌전히 억압자들이 설정한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합니다 — 이는 팔레스타인과 그 가르침들이 세계를 진정한 정의와 자유로 이끌 것임을 깨우쳐 줍니다.
지금의 인종학살 국면이 — 언제가 됐든 — 끝나고 난 후에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가자는 여전히 봉쇄 상태에 있고 역사적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제 땅에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히고 있습니다. 격화된 폭력이 “일시중지”되어도, 검문소와 아파르트헤이트 장벽, 강도만 달리 한 채 이어지는 인종학살을 통해, 이 땅을 뒤틀고 분열시키려는 이스라엘 잔인한 시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팔레스타인의 재앙이 극에 달한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혁명의 이상을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을 곳은 이 땅이며, 우리는 이 땅에 돌아올 것입니다.
주
↥1 이 강연문 내용의 일부는 2014년 주물납 작전[원문 그대로임 / 역주1 참고]이 정점이 이른 시기에 쓴 〈군사화된 탈생산 시대의 예술의 미래: 팔레스타인 문화 발전을 다시 생각하다The Future of Art in an Age of Militarized De-production: Rethinking Cultural Development in Palestine〉에서 가져왔다. 슬프게도 당시에 쓴 것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사실로 남아 있어, 이 강연문에도 포함되었다.
↥역주1 링크된 글의 2025년 6월 22일자 아카이브: https://web.archive.org/web/20250622105421/https://ibraaz.org/essays/99/. 주물납 작전Operation Cast Lead은 이스라엘이 2008년부터 2009년 초까지 하마스와 가자 지구를 공격한 작전의 이름이다. 위 주석과 아래 본문의 “주물납 작전”은 2014년에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전개된 보호의 칼날 작전Operation Protective Edge을 잘못 쓴 것이다.
↥역주2 링크된 글의 2025년 4월 24일자 아카이브: https://web.archive.org/web/20250424024334/https://ibraaz.org/publications/123#_edn005#_edn005#_edn005#_edn005
↥2 이 강연이 있은 후, 라샤드 알-샤와 문화 센터는 이스라엘의 폭격에 파괴되었다. https://twitter.com/AlnaouqA/status/1729546776615567717
↥3 Sarikakis, Katherine. ‘Cities as Geopolitical Spaces for the Global Governance of Culture in Isar, Yudhushthir Raj and Helmut Anheier ed. Cultures and Globalization Series 5. Cities, Cultural Policy and Governance. SAGE Publications: London, 2012.
↥역주3 말verbum과 살해-cide가 결합된 말로, 이 단어 자체가 무리드 바르구티의 조어인 것은 아니다.
↥역주4 링크된 글의 2013년 5월 9일자 아카이브: https://web.archive.org/web/20130509151621/http://newint.org/columns/essays/2003/08/01/
↥역주5 한국에서는 『우리 집은 너무 좁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에서는 제목과 아래 인용문을 직접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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