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게 고전을 내미는 법
고전에는 별 관심이 없다. 고전이 만들어 온 세상이 이 모양이라면, 고전에는 가치가 없다. 그러나 힘 쓰지 못한 고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고전이라면, 한 번쯤 읽을 만할지도 모른다. 《안티고네》는 그런 고전 중 하나가 아닐까. 어쩌면 비극들은, 한 시대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고전일 뿐, 이후의 시대에는 영향을 못 미쳐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고전이라면, 고전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낯선 이야기다. 《카논-안티고네》는 그래서, 조금은 친절한 고전 내밀기를 시도한다. 배경은 고대 그리스가 아닌 현대의 어느 연극 연습실이다. 첫 대본 리딩이 있는 날, 연출가는 등장 인물들을 설명하며 모임을 시작한다.(이하에서 “연출가”란 《카논-안티고네》의 연출 김정민이 아닌, 극중의 연출가를 가리킨다.) 이천 년도 더 된 이야기를 오늘 다시 읽는 이유도 덧붙인다 ― 그는 이것을, 인간사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날에도 수없이 생겨나는 그 갈등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자 한다.
연출가의 말대로 《안티고네》가 인간사에서 반복되는 갈등에 관한 이야기라면, 또한 그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라면, 《안티고네》는 세상을 만들어 온 고전이라기보다는 세상사를 그저 그리는 고전일 것이다. 그것이 갈등에 관한 이야기라면, 《안티고네》는 극단적인 갈등을 상정한 어떤 사고 실험으로서 아직 유효한,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고전을 읽는 것은 언제나 일종의 번안이다. 그저 고전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오늘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읽고자 하는 것이라면, 상이한 문화에 관한, 상이한 인간상에 관한 어떤 번안이 필요하다. 왕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는 안티고네의 삶을, 더 이상 왕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 그대로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친절하게도 《카논-안티고네》는 《안티고네》 작중의 갈등과 그것을 다루는 연습실에서의 갈등을 번갈아 보여 줌으로써, 갈등에 대처하는 어떤 자세에 대해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자 하는 듯 보인다. 이로써 《안티고네》는 그저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비극으로서의 《안티고네》
그리스 비극으로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어쩌면 특이한 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렇게 썼다. “[비극의 주인공으로 적당한 것은] 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덕과 정의에 있어 탁월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이 곧 그러한 인물[이다].”(78쪽) 또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 원인은 비행에 있어서는 안 되고 중대한 과실에 있어야 한다.”(80쪽)
과실, 그러니까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주인공의 운명을 가르는 무언가로 보았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아무런 과실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마르티아의 의미에 대한 분분한 해석을 고려해도 그렇다. 안티고네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고, 자기 나름대로의 정당성 또한 갖고 있었다. 과실로 인해 행복에서 불행으로 빠지는 것은 크레온이지 안티고네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이디푸스를 몇 번이나 언급하면서도 안티고네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크레온 앞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은 인간의 법이 아니라 신의 법을 따른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다. 합법과 정의의, 관습과 혁명의 갈림길에 서 있는 모두에게, 고전으로서 《안티고네》가 건네는 말은 여기 있을 것이다. 연출가의 말대로 《안티고네》가 갈등에 관한 이야기라면, 갈등의 시점에서 우리가 한 명의 사람으로서, 제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주인공, 즉 영웅(hero)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자, 지금의 맥락에서 바꾸어 말하자면 세간의 법을 따르는 자가 아니가 자신의 정의를 따르는 자를 가리킨다 ―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안티고네의 갈등
왕과의 갈등, 이란 현대인에겐 생소한 일이다. 습관적으로 어떤 권력과의 갈등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작은 서사들이 가득한 현대인에겐 여전히 생소할 것이다. 《카논-안티고네》는 안티고네의 갈등을 현대인의 삶과 연결짓기 위해 연습실의 갈등을 보여준다. 나이로 인한 갈등, 성별로 인한 갈등 ― 《카논-안티고네》가 말하고자 한 것이 나이주의, 여성혐오와 같은 것이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 이렇게 쓴다 ―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관한 생각을 끌어낸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정말로 그런 갈등에 관한 이야기인가? 신의 법을 따르는 안티고네에게, 정말로 그것이 갈등이었는가? 그것이 내게 남는 의문이다. 안티고네의 ‘영웅적 서사’와 연습실에서의 크고 작은 불화를 병치시키는 것이, 현대인이 삶에서 겪는 작다면 작은, 그러나 실존적인 문제들을 안티고네의 것과 같은 위치로 격상시키는지, 혹은 그것이 안티고네의 투쟁을 일상의 작은 불편으로 격하시키는지는 불분명하다.
《카논-안티고네》는 일상의 갈등을 가리킬 여러 장치들을 제공한다. 버스에서의 성희롱 경험을 토로하는 안티고네, 스스로는 ‘꼰대’가 아니라 믿지만 하이몬의 반말을 참지 못하는 크레온, 친구처럼 지내자는 말과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구분하는 연출가 ― 여기에 더해 안티고네의 손에 들린 초, 배우들의 의상에 달려 있는 배지들까지, 그러니까 일상적인 미소권력의 문제에서부터 거대권력의 문제까지를 떠오르게 하는 장치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인간사에 반복되는 갈등’이라고 이해할 때, 《안티고네》에서 과연 무엇이 남는가? 인터넷에서 접한 한 리뷰의 필자는 《카논-안티고네》가 “과거에 짓밟혔던 안티고네, 지금 이 순간 짓밟히고 있는 안티고네, 나아가 미래에 저항하고 짓밟힐 안케고네. […] 그런 그들에게 작은 안부를 묻는 작품[, …] 이 세상 모든 안티고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것은 《카논-안티고네》에 대한 아마도 온당한 해석이겠지만, 그것이 《안티고네》에 대한 적절한 해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의심스럽다.
《카논-안티고네》는 《안티고네》의 마지막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연출가는 이 장면이 고대 그리스가 아니라 이천 년 후의 그리스라고, 이것은 역사의 반복을 말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한다.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바위굴에 가둔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에 의한 죽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예언자의 말에 따라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되돌리려 하지만, 크레온에게 기회는 없다. 크레온은 자신의 잘못을 중얼거린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안티고네의 마지막마저도 반복될까? 크레온은 언제까지고 안테고네를 죽음으로 몰까? 이 질문들에 적절히 답하지 못한다면, 《카논-안티고네》는 단지 불가능한 저항에 대한 위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신의 법을 따르는 자, 자신의 운명을 신탁이 아닌 자기 신념에 맡기는 자, 그럼으로써 인간의 법에 맞서는 자로서의 안티고네를 그릴 것이 아니었다면, “카논”이란 말 뒤에 굳이 안티고네가 붙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갈등이 인간사 어디에나 있듯이, 갈등은 어느 작품 속에나 있으니 말이다.
* 『시학』의 인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