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라는 영원한 전위: 극단 아우라/모이공의 <갈매기>에 부쳐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 계단을 내려가노라면 이미 무대 음향이 들려 온다. 물결 소리, 새소리. 아마도 한적한 시골 마을 물가의 소리다. 극장에 들어서면 희고 굵은 자작나무 가지가 동굴을 이루고 있고 그 끝에 낡은 벤치 하나가 있다. 벤치보다 낡은 옷을 입은 남루한 사내 하나가 그 위에 앉아 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 듯 보이던 사내는 꾸물꾸물 손가락을 움직인다. 바짓단의 주름을 펴는 것인지 허공에 종이접기를 하는 것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막이 오를 시간이 되어도 사내는 그저 손가락을 꾸물일 뿐이다. 그를 뒤에 둔 채 스태프 하나가 앞으로 나와 연극의 시작을 알린다.
낚시꾼 하나가 등장해 그에게 말을 건다. 그는 무대가 어떻고 공연이 어떻고 하는, 이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해 댄다. 섬망일까 회상일까, 남루한 사내만이 아는 이야기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꼬스쨔는 니나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 유명한 배우이자 꼬스쨔의 어머니인 아르까지나는 이 연극이 탐탁지가 않다. 꼬스쨔는 그것이 더 이상 주연이 아니게 된 아르까지나의 시샘 정도라고 말하지만 그리 쉽게 보아 넘기지도 못한다. 연극 도중에 아르까지나는 야유를 퍼붓고 꼬스쨔는 실망해 공연을 중단한다.

 

연극이라는 영원한 전위
꼬스쨔가 무대에 올린 것은 일종의 전위극이다. 20만년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구를 말과 몸짓으로 니나는 묘사한다. 늘 새로운 형식을 찾는 꼬스쨔, 그의 연출은 니나를 통해 과잉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나타난다. 관객들은 웃는다. 그저 웃기기 위해 삽입된 과장된 몸짓을 볼 때와 같은 웃음이다. 관객을 소품 삼아 대사를 하는 배우를 볼 때와 같은 웃음이다. 아르까지나가 맹비난한 전위를, 후위의 관객들은 그저 유머 정도로 받아들인다.
연극이라는 영원한 전위, 라고 감히 말해도 좋을까. 연극이라는 것이 춤과 노래, 연기가 한데 어울린 새로운 장르로서 등장한 이래, 연극은 언제나 전위였다. 한때 그것은 삶과 예술의 통합을 이끌었고 또 한 때 사회 비판을 주도했으며 TV 드라마와 영화가 주류가 된 지금 그것은 대중이 알아주지 않는 실험에 골몰하고 있다. 언젠가의 전위처럼 온 사회에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송영섭의, 극단 아우라와 모이공의 <갈매기>는 꼬스쨔의 것만큼이나 전위극이 된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는 관객들 앞에서 <갈매기>는 단순히 등장 인물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연극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소극장의 몇 안 되는 객석이나마 가득 채운 것은 물론 관객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연극의 관객일까? 연극이 끝나면 알 수 있다. 분장도 지우지 않은 채 거리로 나와 숨을 돌리는 배우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이들, 연극을 보러 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이들.

 

그러나, 이야기라는 후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실험을 한다고는 해도, 모든 요소가 실험인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것들이 있다.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각색한 송영섭의 <갈매기>는 등장 인물을 줄이고 사건을 재배치하는 등의 수정을 겪었지만 그 골자는 유지한다. 존경과 사랑을 혼동하는 여성, 사랑이 곧 인생의 목적인 여성, 사랑의 실패가 곧 인생의 실패인 여성을 <갈매기>는 그리고 있다. 두 <갈매기> 모두가 말이다. 
전해 듣기로 이 <갈매기>는 그저 송영섭의 것은 아니고 배우들이 공동 창작에 참여한 작품이다. 배우 넷과 하나의 연출, 적어도 다섯이 함께 한 이 극에서 아무런 충돌을 느끼지 못한 것은 매끈하게 마무리한 연출의 능력 덕일까 아니면 새로울 것이 없었던 탓일까, 나는 아직 어느 쪽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웃음을 위한 장치와 서사를 위한 장치가 충돌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 서사에 대한 해석들이 충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전을 고전으로 읽은 이들이 얌전히 토해내는 연극이었다.
단일한 서사를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연극의 임무가 아닌 걸까. 과문한 나로서는 서사 이외의 것에 주목하지도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연극이 후위로 남지 않기 위해, 다시금(?) 전위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말이다. 주워들은 것들, 현전이니 몸이니 참여니 하는 것들을 곱씹어 보지만 아직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연극성
연극성, 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지루한 서사 가운데에서도 무언가 흥미를 끄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연극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벤치가 무대가 되었다가 널빤지가 되었다가 다시 벤치가 되는 소품 활용이라든가, 갑작스런 관객에게의 말걸기 – 이 경우에는 딱히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 혹은 암전된 무대에서 들려 오는 배우들의 발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어떤 꽃잎이었을까, 무대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종이 조각이 깔려 있었다. 흐드러진, 그러다 떨어진 꽃잎을 표현한 것이었으리라. 배우들이 무대에서 달려 바람을 일으키면 이 꽃잎들은 그 바람을 시각화 했다. 기쁠 때 뿌리는 것도 이 꽃잎이었지만 싸움의 격동 역시 이 꽃잎을 흩뿌려 표현했다. 바닥에 늘어진 꽃잎을 손가락으로 혹은 손바닥으로 밀어 글을 쓰고 지웠다.
이런 것들에 연극의 가능성이 있을까. 잘 아는 이에게는 이 역시 어쩌면 지루한 표현 양식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연극이기에 가능하다’는 점 하나만큼은 사실일 것이다. 연극이기에 가능한 것을 찾는다는 것, 지극히 근대적인, 그러니까 이미 구태의연한 과업을 재삼 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아직 찾지 못한 듯 보였다. 지난 세기의 고전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래서인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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