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니치〉: 누군가가 웃는 시간

자이니치. 시종일관 무거울 것 같은 주제와는 달리, 연극 〈자이니치〉는 코미디에 가깝다. 쓴 웃음을 남기는 블랙 코미디조차 아니다. 주로 과장되거나 반복적인 행동들로 웃음을 자아내는, 가벼운 코미디의 양식을 〈자이니치〉는 따르고 있다. 자이니치[在日]. 재일 조선인 내지 한국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 명의 고인을 포함하여 다섯 명의 자이니치 형제가 이 극의 주인공이다. 무대는 고인의 빈소, 다다미가 깔린 방이 전부다.
극의 시작을 알리는 암전이 있은 얼마 후, 방금 관객들이 들어 온 바로 그 문으로 한 명의 배우가 들어온다. 발소리 이외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며 들어온 그는 신발을 벗고 다다미방에 들어간다. 영정에 일본 식으로 ― 혼을 부르는 징을 치고, 합장과 함께 절하고 ― 예를 올린 후 그는 기타를 집어든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냐…” 분단 이후 한반도 남녘의 고향을 찾지 못하게 된 조선의 실향민들이 부르는 노래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둘씩 사람이 들어온다. 형제들이다. 고인의 유골을 한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한국에서 찾아 온 인물도 있다. 형제들의 가슴에는 배지가 달려있다. 한쪽은 태극기, 한쪽은 다소 낯선 깃발이다. 그 깃발을 단 이는 조선의 말씨를 쓴다. 한국에서 온 이를 두고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조선말로 하라우”
뒤늦게 도착한 첫째가 “ひさしぶりだ”하고 인사를 건네자 낯선 깃발의 배지를 단 이는 “조선말로 하라우” 하고 쏘아 붙인다. 한 시간 반 남짓 극이 흐르는 동안, 형제들이 일본어를 쓸 때마다, 그는 몇 번이고 이 말을 반복한다. 조선말을 쓰는 것은 이 이에게 있어서는 뿌리를 지키는 일이다. 한반도에 뼈를 묻으라고 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이 말은 ‘웃음 코드’가 된다. 기계적이고 즉각적으로 반복되는 이 대사는 조선 말씨가 갖는 인상과 어우러져, 몇 번이고 관객들의 웃음을 불러 낸다. 물론 무대 위의 배우들, 그러니까 형제들은 이 말에 웃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첫째가 웃음을 참지 못해 고개를 숙인 것은 실수였으리라). “조선말로 하라우”라는 말이 반복될 때에도, 어리숙한 셋째가 못난 모습을 보일 때에도, 웃는 것은 관객들이다. 형제들은 웃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는, 한국에서 온 객, 박기완 씨가 웃을 뿐이다.
일견 말도 안 되는 장면들이 반복되는데도 웃는 것은 늘 관객과 박기완 씨가 전부다. 형제들은 우스운 꼴을 하고서도 진지한 싸움을 이어간다. 관객들은 언젠가 묻게 될 것이다. 그들은 왜 웃지 않았던가를. 박기완 씨는 어째서 웃을 수 있었던가를. 자신은 누구의 편에서 그 장면들은 보고 있었던가를 말이다.

잃어버린 고향(들)
낯선 배지는 다름아닌 조총련의 상징이다 (사실 잘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인공기였는지 다른 깃발이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한때 동생들을 조총련으로 이끌었던 큰형은 이제 민단에 속해 있다. 조총련에 남은 셋째와 넷째는 그가 못마땅하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한국으로 건너 간 다섯째는 또 그들 모두와 사이가 좋지 않다. 형제들간의 의절이 비극적인 사건이라면, 〈자이니치〉는 그 비극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조총련과 민단으로 나뉘어, 한국과 조선으로 나뉘어, 적대하는 형제들이 무려 십오 년만에 한 자리에 모인 어떤 하루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보다 작지 않은 또 하나의 비극이 있다. 둘째의 유언은 자신의 유골을 한국 땅에 뿌려 달라는 것. 그러나 후쿠시마 쓰나미로 죽어 방사능에 노출된 둘째의 유해가 입국 심사를 통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박기완의 말대로, 이 유해가 국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 주민등록증이 없기 때문, 한국에서의 주소가 없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재일 조선인, 혹은 재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서도 ― (다섯째의 말마따나 한 번 가보지도 못한) 한반도를 제 고향으로 삼으면서도 이들은 조선이나 한국의 국적을 갖지 못한다. 〈자이니치〉는 그런 무국적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둘로 나뉘어 싸우지만, 싸움의 끝에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어떤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잃어버린 고향(들)에 관한, 갖지 못한 뿌리에 관한 이야기다.

“住所とか無くても私たちみんな韓国人だ”
그런 의미에서, 이 극이 하고자 하는 말은 사뭇 단순하다. 끝내 둘째의 유골을 옮겨주지 않고 떠나는, 형제들을 비웃으며 자리를 뜨는 박기완에게 다섯째는 일본어로 이렇게 외친다. “주소 같은 거 없어도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다!” 조총련에 속해 조선을 꿈꾸거나 민단에 속해 한국을 꿈꾸는 대신, 한국으로 건너가 “돈을 벌게 해주니 애국심이 생기더라”라고 말하게 된 다섯째가 말이다. 이순간만큼은 셋째도 조선말로 하라고 하지 않는다. 조선말로 반복되지 않으므로, 어떤 관객들은 이 대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이니치〉는 ‘자이니치’들이 겪는 일본에서의 차별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해주지 못한다. 그저 무국적자로서, 한반도에 ‘돌아오지’ 못하는 슬픔에 대해 말할 뿐이다. 조총련과 민단이라는 두 무리로 갈라져, 형제끼리조차 서로 싸우고 의절해야 하는 슬픔에 대해 말할 뿐이다. 많은 것을 말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주소 같은 거 없어도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라는 뻔한 결론밖에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코미디로서, 〈자이니치〉는 볼만한 극이다. 스스로의 웃음을 의심케 하는 코미디로서 말이다. 시종 웃긴 장면들이 반복됨에도 내 곁의 관객들이 내내 눈물을 훔쳤던 것은, 그들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그 의심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장대소가 나오는 말도 안 되는 행동들에 온 마음을 거는, 말도 안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다 건너 일본 땅에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다행히도, 우리는 그들과 말이 통한다. 〈자이니치〉를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점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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