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맑은

이전 블로그에 2011년 5월 15일에 올린 글인데, 어째선지 이리 옮기면서 사라져 있었다.

 

 

 

 

 

어느 날
찾아온 작은 씨
가슴에 가만히 내려놓았지

혹시나 먼지가 아닐까
의심하던 나의 마음 무색하게

싹이 돋아 올랐네
한 번도 본 적 없는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아무것 없어도 얼마나 빛나는 지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아무것 없어도 아주 튼튼하게

2008. 1

시와의 노래 <작은 씨>, 요즘 학교에서 공부하다 지칠 때면 발코니에 나가 흥얼거리는 노래다. 원래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이 노래를 좋아한다기보다는, 그저 이 노래가 마음을 맴돈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소소한 희망을 희망 그 자체로 노래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므로, 희망이 들리지 않으므로, 그런 노래는 아무 감흥도 없다. 희망을 먼지로 착각하는 일도, 먼지에서 싹이 돋아나는 일도 없다. 없을 일을 바라는 버릇은, 내게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마음을 맴돌고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아마 내게도 그런 버릇이 있기를 바란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희망들을 먼지로 착각해 놓고 모른 채 지나쳐 왔음을, 나는 몰라도 내 마음과 입술은 알고 있다는 뜻일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희망은 없었다. 희망은 힘겨이 찾아내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노력과 시도들의 끝에서 나는 희망을 찾지는 못한 채 그저 지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냉소하고 포기하려 한 적은 없지만,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유치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얼마 전에, 메모 하나를 해 두었다.
“누군가의 밝음, 혹은 맑음이 유치함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밝음과 맑음은 유치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라고 쓰지는 못했다. 아니, 그렇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렇다고 기꺼이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믿으려 한다, 밝음과 맑음은 희망이고 힘이라고. 그렇게 믿으라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요즘의 무력한 내 몸이 내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칠 때마다 나가 바람을 쐬고 볕을 쬐며, 흥얼거린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놓쳐 버렸을는지 모르는 작은 희망들을, 그 싹과 잎과 꽃들을.

한창 무기력했을 때, 아니 무기력함을 한창 주절거리고 다녔을 때, 늘 내 넋두리를 들어 주던 친구 I는 ‘내면 초상화’라는 작업을 하는 자신의 친구를 이야기했다. 이유도 모른 채 우울하고 무기력한 나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며, 키워드를 받아 마음을 그려준다는 그 친구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것도 있구나, 그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는 잊고 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I의 친구 초는 밝고 맑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얼마 겪어 보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고, 적어도 그것은 거짓 가면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 지향으로 보였다.
초는 홍대 놀이터에서 주로 내면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다고 했다. 홍대라면 내 활동 반경 안에 있는 곳이니, 조만간 가 봐야지 하고는 가지 못한 것이 어느새 달포를 넘었다. 주말마다 비가 오거나, 아니면 지쳐서 하루 종일 집에만 누워 있거나 하는 통에 벼르기만 하고 걸음조차 떼어 보지 못하고 있다가, 어제야 그를 찾았다.
집을 나서 초를 만나러 가면서도 계속 고민을 했다. 어떤 키워드를 이야기해야 할까, 지금 내 마음의 상태라면 구멍이라든가 엉망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것들이 맞겠지만, 그저 지금의 상태일 뿐 그것이 나 자신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망도 없어 보이는 지향을 말하려니, 지금의 나와는 너무 먼 것 같아 망설여졌다.
  가 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때, 그러니까 달포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단어는 ‘그릇’이었다.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담은 이야기들을 누군가에게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그릇. 비유하자면, 밥을 먹고 힘을 내어 살 듯, 누군가에게 밥 같은 힘이 될 수 있는―입에 그리 즐겁지만은 않더라도― 이야기를 담아 내어주는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그 단어를 말해도 좋을까, 지금 당장은 남에게 밥을 주기는커녕 내 끼니 챙기기도 힘든데, 그 단어를 말하는 것이 과연 진심일 수 있을까, 를 고민하며 놀이터를 향해 걸었다. 인파로 가득한 홍대 놀이터, 곳곳을 기웃거려 겨우 그를 찾았다.
마침 그는 쉬고 있는 중이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기척 없이 다가가 잠깐을 서 있자 나를 알아 본 그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나무를 보고 있었다고, 날씨가 좋아서 요즘 너무 행복하다고 그는 말했다.
한창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나를 만났던 그는 요즘은 잠을 잘 자느냐는 인사로 시작했다. 너무 많이 자서 큰일이라고 답하자, 다행이라며 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나의 키워드를 물었고, 고민의 답을 찾지 못한 나는 ‘그릇’이라는 단어를 내밀었다.
잠깐 보더니, “왜 그릇이라고 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하고 묻는 그. 많은 것들 담고 싶어요, 사람이든 이야기든, 하고 답한 후 잠시 망설이다 요즘은 구멍 난 그릇인 것 같아 고민이라고 덧붙였다. 이쯤이면, 진심을 말한 것이라 해도 좋을까.
많은 것을 담고 싶다는 말에 와, 좋다, 며 웃은 그는 구멍 난 그릇이란 말을 듣자 더 좋다며 웃었다. 갑자기 떠올랐다며 메모지에 무언가 끄적거리더니, 이윽고 펜과 색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려주었다. 작은 구멍이 난 커다란 그릇과, 그릇을 메우고 또 넘친 해와 달과 별의 이야기들을. 뒷면에는 또 메시지를 적어 주었다.

 

001.jpg

 

 

초를 찾아 간 것은, 그림으로 내 내면을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밝고 맑은 사람의 응원을 듣고 싶어서였다. 내가 종종 유치하다 여기던, 그러나 그렇지 않을, 밝고 맑은 진심의 응원을.
그림을 그려주고 나서 초는 무슨 단어를 내 놓을까 걱정 많이 했는데, 긍정적인 거라 참 다행이에요, I가… 하고 말했다. 어쩌다 그 말은 끊어져서 답은 못했는데, I한텐 내가 늘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긴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늘 부정적인 상태에 있긴 하지만, 속까지 어두운 사람은 아니라고, 늘 밝은 것을 꿈꾸며 살고 있다고, 여기에 대신 답을 적어둔다.

요새는 많은 것을 잊는다. 말 그대로 돌아서면 잊고, 또 예전의 많은 기억들이 점차로 희미해져 간다. 그릇 바닥에 난 구멍으로, 담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다 새어나가고, 버리고 싶었던 찌꺼기들만이 엉겨 붙은 그릇이 되어 있다, 요즘의 나는.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 비우는 중이라는, 이 응원을 믿어 보기로 한다.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응원해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낯 뜨거워서 말을 끊어버렸지만, 얼마 전 친구 L이 해 준 응원도 덧붙여 두어야겠다.
“안팎은 아름다운 생각과 마음을 가졌지요. 때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스스로 칭찬하고 잘했다, 잘했다, 하하하 웃는 법도 배우셔요!”
여전히 잘 안 되고 있지만, 변하려 애쓰고 있는 요즘에 만난 이들이 참 고맙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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