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추석 연휴에는 고향에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종일
일하거나 종일 자거나 하며 연휴를 보내던 중,
추석
당일 저녁이었나,
친구가
표를 구해주어 연극을 한 편 보았다.
“몹쓸
가족극”이라는 부제인지 슬로건인지가 붙은
<나무빼밀리로망스>라는
작품이었다.
친구는
‘고어하고 난해한’ 연극이라고 말했고,
찾아본
기사에는 한 세대 전 한국 연극계의 선구자 쯤 된다는
윤영선이라는 이의 각본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 중 해체주의적 성향을 대표하는 세 편을 재구성해
새로 쓴 각본이라는 사실은 연극을 다 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극장
근처에서 시간을 떼우다 시작 시각이 거의 다 되어서야
표를 받고 이윽고 객석에 앉았다.
무대는
팔각형,
객석은
90도
각도로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막은
따로 없었고 무대의 조명도 켜져 있었으며,
배우들은
시작 전부터 무대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사이에
한 번 암전이 되었던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공연
중에 흡연 씬이 있으니 양해해 달라는,
사진을
찍어도 좋고 휴대전화를 써도 좋지만 공연에 방해는
되지 않게 해달라는 안내 방송과 함께 극은 시작되었다.
배우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을 했던 것도 같다.
순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크게 웃어제치기도 했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스피커에는
“아들아–
억울하다–
아들아-”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안내
방송과 마찬가지로,
배우들은
관객들을 의식하는 동시에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모독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인사로
연극을 시작했고,
막 없는
무대에서 중간에 옷을 갈아 입으면서 서로에게 ‘관객들이
기다리니까 빨리 하라’는 등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막 없는 무대에서,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소품을 옮겼다.
마치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듯.
장면
사이에 뿐만 아니라,
누군가는
연기를 하고 있는 중에도 그들은 소품을 옮겼다.
연기를
하는 배우도,
그것을
보는 관객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그런
관객들에게 배우들은,
닭의
내장을 갖다 댔다.
‘몹쓸
가족’인 그들은 곧잘 서로에게 욕설을 해댔다.
남편이
부인에게,
부인이
남편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자식이
욕을 하면 부모는 가끔 자식을 때렸다.
반대의
경우는 딱히 일어나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엄마’가
자식들에게 맞은 것은 한 번이고,
‘아버지’가
맞은 일은 없었다.(극중에서
그들이 엄마와 아버지라고 불린 게 확실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가 어머니라는 호칭에 맞는 지위를 갖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렇게
욕을 하고 그은 또 웃어제쳤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듯.
병상의
남편/아버지가
틀니를 찾는데 가족들은 그 말을 끝내 알아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을 담아 (자신이
답이라고 믿는)
무언가를
가져다 준다.
이윽고는
또 소리를 지르지만.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그것
없이 가족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
시작은 사랑 혹은 필요였겠지만,
가족은
이후의 많은 것이 우연으로 구성되는 공동체다.
누가
자신의 자식이 될지,
누가
자신의 부모가 될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스스로가
택한 이 사람이 십 년 후 어떤 모습일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한 시간
반의 상연시간동안,
그들을
지탱한 것이 바로 그 원칙이었다.
반쪽
“몹쓸
가족극”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주인공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편견으로 인한 오독일 수도 있다.
남성
중심으로 서사가 구성되는 이 사회의 의식적인 반영일
수도 있고,
작가/연출가의
편견으로 인한 무의식적인 반영일 수도 있겠다.
아버지는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아마도
반 억지로.
그리곤 외국물을 먹고 돌아온 아들에게 질투와 열등감을 느낀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네,
네,
하지만
아버지의 왕년 미국행을 ‘관광’이라 칭한다.
그
말에 아버지는 발끈하였으므로,
진실은
알 수 없다.
자신이
딸 때문에 죽었다고 믿는 아버지의 망령은,
억울하다며,
오직
아들만을 찾는다.
딸은
의사다.
자신의
죽음이 이 딸의 오진 때문이라 믿는 아버지는 여자가
무슨 의사냐며,
간호사나
시켰어야 했다고 말한다.
이쯤은
그저 사회의 반영이라 해도 좋겠다.
딸은
1인
2역을
맡는다.
무시
받는 딸인 동시에,
자신을
닮은,
남동생의
여자친구.
아들
커플이 부모에게 인사오는 장면에는 그러므로,
이
딸은 등장하지 않는다.
왜
딸이 한 명이 아니라 반 명이었어야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
역시 사회의 반영이라 생각하고 지나가도 좋은 걸까.
엄마가
카자흐스탄인으로 설정된 이유 역시,
나는
알지 못한다.
극중에
그가 한 카자흐스탄어 대사들이,
얼마나
맞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숨을 곳 없는 좁은
무대
막도
백스테이지도 없는 팔각형의 좁은 무대,
배우들은
자신의 역할이 없을 때엔 객석에 노출된 의자에 앉아
있었고 일정 정도 이상의 이동을 표현할 때엔 무대를
빙빙 돌았다.
귀를
막고 그만 하라고 소리를 질러도 피할 수 없는 억울하다는
망령의 외침처럼,
그들은
아무것도 피하지 못했고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
흩날린
꽃잎,
쏟아진
귤 따위에 무대 위에 어지러이 널렸고 이리저리 다니는
배우들의 발과 이리저리 옮겨지는 소품들에 밟혀
으깨어졌다.
무대는
갈수록 더러워졌고,
극이
끝나기 전에는 그것을 청소할 도리가 없었다.
극중의
시간은 이상하게 흘렀다.
(아마도)
현재에서
시작해 갑자기 과거를 비추더니,
나중에는
시점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시작부터
아버지의 망령이 흐느꼈지만,
아버지
역의 배우는 그 때에도 무대 위에 있었고 나중에도
무대 위에 있었다.
이것이
역사인지 현재인지,
회상인지
망상인지 알 수 없도록 극중의 시간은 뒤엉켜 흘렀다.
미국에서
돌아와 부모에게 인사를 했던 아들은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에도 귀국했다.
친아버지와
양아버지가 있다고 했는데,
누가
누구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좁고
숨을 곳 없는 더러운 무대에서 서로가 엉킨다.
(역시나
윤영선의 다른 극에서 가져 온 대시라는데)
암에
걸린 아버지는 회한에 찬 목소리로 외친다.
내
세포가 내 세포를 공격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함께
하리라,
서로를
아끼리라 믿었던 존재 사이의,
끝내
파멸로 이끄는 무차별적인 공격,
그 좁은
무대 위에서 쉼없이 일어난 모든 일들은 바로 그것이었다.
서로를
포옹하고 함께 웃어도,
가족을
자처해도,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이 이어지는 서로에 대한 공격들.
가족들이
한데 모이는 날이라는 명절 저녁,
남들이
간만에 만난 가족으로 신음할 때 (물론
누군가는 만날 가족이 없거나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없었겠으나)
가족을
뒤틀고 비꼴 연극을 기대하며 나섰던 내가,
마치
대가족과 한 시간 반을 보낸 양 지쳐서 극장을 나선
것을 보면 잘 만든 연극이겠지 싶다.
서사를
해체하고 사실주의적 재현을 포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족에 대한 사실 이상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해 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었다,
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1인
2역의
딸,
카자흐스탄인
엄마,
낯선
이와 섹스한 이들의 진부한 대사,
극의
말미에 서로의 분신처럼 선 아버지와 아들,
그
아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버지―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꽤나 많았다.
원작들의
작가가 한 세대 앞의 사람이기 때문인지,
이 극의
작가/연출가가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탓인지 알 수 없으므로 더 이상 말하기는
어렵다.
연극
팜플렛에서,
오진으로,
사고로
죽는 사람들,
자연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넘치는 사회적 문제를 건드리고자 했다는
말을 읽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