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과 상상력 ― 정은영의 여성 국극 작업에 관하여

한국전쟁이후의 어느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여성 국극’을 소재로 한 정은영의 일련의 작업들. 남성들이 배제된, 여성들이 모든 배역을 맡는 창극을 무대에 올렸던 여성들의 극 공동체, 전국을 순회하는 극단을 쫓아 다니며 빠짐없이 극들을 관람하고 배우들에게 선물 공세를 펼치는 팬들을 대동했다는 이들, 그리고 그만한 인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장르의 명맥을 잇고 있는 이들을 화면에 담고 때로는 무대에 세우는 그 작업들. 그 작업들에 대해 무어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어떤 답답함 때문이었다.

아무리 인기를 끌었던들,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여성 국극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장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장르다. 정은영의 작업이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과 같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억하고자 하는 이조차 얼마 남지 않은 그런 장르. 일본의 다카라즈카처럼, 지금까지 이어져 온 그런 장르가 아니다. 그나마도 무대 위에서 성별을 뛰어 넘은 역할 ― 굳이 말하자면 남성 역할 ― 을 맡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던 이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결혼했거나 죽었다. 극단 생활을 하면서 가슴이 작아지고 생리가 멎고 여성과 사랑했다던, 무대 밖에서도 경계를 넘었다던 그 몸들은 이제 그런 증언이 없다면 그저 평범한 할머니로 인식될 몸과 의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러 전시장과 무대를 찾는다. (이유가 무엇이었건) 성별의 경계를 넘고자 했던, 그리고 성공적으로 넘었다던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은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지만, 그 모든 시도가 무화된 현재에서 그리 한다는 것에는 슬픈 구석이 있다.

물론 그 답답함은 작업 자체에 대한 불만과는 다른 것이다. 예컨대 평론가 임근준은 이렇게 평했다. “정은영(1974-)의 영상설치물 <정동의 막>은 여성 국극 배우를 희망하는 젊은 여성이 창극적 남성성을 구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렌즈를 통해 그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또한 의사-남성성을 모방하고 실현하는 것처럼 독해된다. 성적 정체성을 둘러싼 타자적 차원을 우회적으로 탐구하는 방식이 관객에게 갑갑함을 선사한다.”* 이는 어느 전시에 나온 한 작품에 대한 촌평이지만 그가 정은영의 작업에 대해 지속적으로 내비치는 적대감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대체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나열이지만 그나마 쉽게 이해되는 한 구절부터가 불만스럽다,

실패한 역사의 장면들

바로 “여성 국극 배우를 희망하는 젊은 여성이 창극적 남성성을 구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부분이다. 내가 아는 한 정은영의 작업들이 보여주는 것은 남성성을 구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구현에 실패하는 과정이다. 젊은 배우는 ‘남성성을 구현한’ 선배에게 그것을 배우는데, 정은영의 스크린 속에서 그는 늘 혼나고 있다. 끊임없이 시도하는 그 구현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남성성을 구현한’ 그 선배는 어떨까.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범주의 속성인 남성성이라는 것이 효과적으로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역시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갈고 닦아 (내가 <마스터클래스>의 무대에서 경험했듯) 관객을 완전히 속일 수도 있을 경지에 이른다 한들, ‘여성 국극’, ‘남역 배우’와 같은 말들에는 이미 실패가 내포되어 있다. <정동의 막>과 함께 전시된, 옛 동료의 무덤 앞에서 남성을 가장하지 않은/못한 목소리로 노배우가 읊조리는 노래는 그 실패를 추도한다.

여성 국극이나 남역 배우라는 말에 이미 남성성의 구현에 대한 필연적인 실패가 내포되어 있다면, 애초에 그들이 시도하는 것은 남성성의 구현이라기 보다는 성별 범주를 뛰어 넘는 것 그 자체다. 그 결과가 외견상의 남성성의 획득이건 아니건, 적어도 현재에 조명되는 틀 속에서 그 목표는 남성성의 구현이 아니다. 정은영의 작업은 여성 국극이라는 화려한 역사가 있었음을 상기시키지도 않고, 성별 범주가 허구적인 것이며 연습으로 충분히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임을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업들은 그 역사의 실패, 그 연습의 실패, 오로지 실패만을 담고 있다.

내 답답함은 정은영의 작업에 대한 답답함이라기보다는 그 실패 자체에 대한 답답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은 큰 의미도 없지만, 여성들만의 공동체, 여성들만의 예술이라는 그 실험이 성공했더라면 ― 기껏해야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졌더라면’이라는 뜻이겠지만 ―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성별 범주를 넘나드는 일이 이에서도 조금은 더 자연스럽고 상상가능한 일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아쉬움.

역사를 파편화하기

과거의 어떤 실패를 전시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나마도 그 영욕의 역사에 대한 설명조차, 서사조차 없는 그런 전시에 어떤 의미와 어떤 힘이 있는가. 여성 국극이나 그에 대한 여러 관심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성 국극 무대를 위한 연습이나 여성 국극 무대에 섰던 수십 년 전의 과거에 대한 회상만을 보여주는 몇 분 안 되는 짧은 클립이 반복해서 재생될 뿐인 그 스크린은 왜 전시되고 또 관람되는가.

나의 답답함과 아쉬움에 비추어 생각하면 이는 역설적인 지점이다. 나로 하여금 답답함을 품게 하는 끊어진 역사는 정작 정은영의 작업 속에서 재현되지 않는다. 전직 배우들을
통해 언급되거나 지시될지언정, 엄밀히 말해 그의 작업들은 관객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제시하지 않는다. 영문 모를 실패로 가득한, 역사에서 떼어져 파편화된 회상과 파편화된 연습이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전부다. 그 파편들만을 받아들인다면, 나의 아쉬움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정은영의 작업과는 전혀 무관한 감정이다.

한 심포지엄**에서 큐레이터 안소현은 정은영의 비디오 작업이 의도적으로 서사가 연결되지 않도록 장면들을 단절시키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작업을 기록이 아니라 비디오아트로 만드는 한 장치라고 해석했다. 정은영은 겸연쩍어 하며 예술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 관객들을 멈춰 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라 답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한 시간 반, 혹은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을 객석에 잡아 놓고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대신 스쳐가는 관객들에게 파편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인 비디오아트를 굳이 선택한 참이다.

파편이 됨으로써 노배우의 회상, 젊은 배우의 연습, 여성 국극을 둘러 싼 다양한 장면들은 여성 국극이라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증언하는 대신 질서 없이 늘어진 재료들이 된다. 기억의 자료가 아니라 상상의 재료가 된다. 완성된 이야기에서 발췌된 단락들이 아니라,
문장 만들기 게임을 위해 무작위로 ― 그것도 뒤집어져 ― 놓인 단어 카드들이 된다. 카드들에는 단어들밖에 없으므로, 이야기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앞에 놓인 카드에 적힌 단어들과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들을 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완성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파편과 상상력

가장 창의적인 수준의 상상력조차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이미 알려진 단어들, 형태들, 소리들, 사용가능한 재료들의 제한 속에서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단어장에 추가될 새로운 단어들은 기존의 단어들을 조합함으로써만 만들어지고 설명될 수 있다. 정치적 상상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들 수 있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사 속에 나타났던 흔적들을 조합한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어떤 공간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의 역사에 없었던 어떤 장면이 아니라, 역사 속의 장면들을 그 인과 관계들에서 떼어 내어 자유로이 조합했다는 의미에서만 새로운 어떤 장면이다.

경계를 넘는 어떤 시도가 아니라 한 자리에서 다른 한 자리로 단순히 자리 이동하려는 시도, 그것도 이미 실패한 시도로만 본다면 ― 그러니까 역사에 이미 주어져 있는 연결고리들을 그대로 둔 채 본다면 여성 국극이 지금 줄 수 있는 것은 답답함과 갑갑함, 기껏해야
어떤 향수감 뿐이다. 쇠사슬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고리, 기껏해야 매듭 뿐이다. 그러나 쇠사슬을 낱낱의 고리들로 끊으면 만들 수 있는 것은 훨씬 많아진다.

배경이 될 서사 없이 실패의 장면들만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정은영의 작업들은 불친절하다고 말해도 좋겠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그의 작업들은 가장 친절하다. 서사를 배제하고 장면만을 남긴 그의 작업들은 이야기를 복원할 의무를 지우는 대신 이야기를 만들 재료와 자유를 제공한다. 몇 조각이 빠진 커다란 퍼즐 대신, 깨끗한 캔버스와 물감을 제공한다. 가장 제한적인 수준의 상상력조차도, 단순히 기존의 것만을 상상하고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친절하게도.


* http://chungwoo.egloos.com/3970906

** 2012년 10월 4일, 서울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학술 심포지엄 <인카운터>. 발표자로는 정은영과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안소현이 참석했다. 프로그램 전체를 방청하지는 못해서, 전반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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