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오 갤러리, 아오노 후미아키 개인전
《환생, 쓰나미의 기억》(2014.4.24-6.1)
언제 보고 왔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므로 아마 5월 말 쯤에나 갔을 것이다. 한 시간 반쯤을 걸어 갤러리에 가서 잠깐 전시를 보고, 나와서는 친구를 만났다. 밥을 먹었는지 차를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있진 않았던 것 같다. 집에는 걸어서 돌아왔는지 버스를 타고 왔는지 모르겠다. 전시장에는 어린 학생들 한 무리와 인솔자가 있었다. 인솔자는 확성기를 써서 연신 작품 설명을 해댔다. 전시를 보기 좋은 날은 아니었다.
조각이랄까 오브제랄까, 설치미술품이 대부분이었고 사진 몇 점이 있었다. 동영상이 하나 있었는지, 사진을 두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든 작품들은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있다. 쓰나미.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을 돌며 망가진 물건들을 모아 작품을 만들었다. 깨진 인도 연석(緣石)을 보수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도 있었다.
전시 안내문에는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는 NHK 리포터의 말이 실려 있었다. 역설적인 도입이다. 그곳에서 해낸 무언가를 안내하는 글로서는 말이다. 물론 거짓이나 과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도를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언뜻 보기에도 그것은 아비규환이었으므로.
작가는 폐허들에서 주워 온 주전자, TV 리모콘, 수납장, 테이블 등을 재료로 삼아 주전자, TV 리모콘, 테이블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그 무엇도 복구해 내지 못한다. 주전자나 리모콘은 깨어진 부분을 점토로 메웠을 뿐이다. 테이블에는 역시 폐허에서 가져 온 장판이나 타일을 덮어 상도 바닥도 아닌 무언가를 만들었다. 수납장은 플라스틱 바구니와 하나가 되었다. 불편을 감수하면 테이블을 쓸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쓸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다.
점토를 덧댄 주전자는 비뚜름한 모양에 빈 공간이 없다. 몇 배쯤 길어진 리모콘에는 누를 수도 없는 버튼들이 반복된다. 테이블 다리는 잘 맞지 않고, 장판이나 타일을 붙이고 남은 공간에 새긴 무늬는 장판이나 타일의 것과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얼핏 봐도 연석의 어디가 깨어졌던 부분인지를 알아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복원되었지만, 모든 것이 망가진 채로 있다.
작가는 자신이 수집한 오브제들이 스스로 그날의 비극을 말하게 하지 않는다. 작가 자신이 직접 희망이나 의지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스스로 말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어긋남들이다. 원형과 복원품 사이의 어긋남, 타일의 모눈과 테이블에 새겨진 무늬의 어긋남, 플라스틱 바구니와 나무 수납장의 어긋남. 그 어긋남들만이 기억과 현실의 어긋남, 과거와 미래의 어긋남으로서, 스스로 말한다.
다시 한 번,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로 돌아온다.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사건을 지우고 삶을 되돌리는 것도 인간은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무언가 시도하는 것, 그리고 그 실패, 그 어긋남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말하게 하는 것 뿐이다.
전시 설명에는 치유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정말로 치유가 될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적다. 그 어긋남에, 그러나 그에 구애되지 않는 복원의 시도가, 깨어지고 뒤틀어져도, 더 이상은 매끈할 수 없다해도, 삶이 계속 될 것임을 말한다는 것 뿐이다. 삶을 계속 할 것임을 말한다는 것 뿐이다.
주전자의 삶과 점토의 삶이, 수납장의 삶과 바구니의 삶이, 타일의 삶과 테이블의 삶이, 어느 시점까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여러 개의 삶이 각자 반파된 후 여기서 하나로 이어졌다. 제자리에서 옮겨져, 서울 어느 갤러리에 모인 삶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결합 따위가 아니다. 스스로는 지탱할 수 없는 삶을 서로에 기대어 겨우 버티는, 그러나 여전히 각자로 남아 있는, 어쩌면 분리를 꿈꾸기 때문에 어긋나 있는 삶들이다.
새로운 조각들을 찾는, 또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또 한 번의 복원을 시도하는 삶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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