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책은 우연히 손에 넣었다. 책을 펼치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인가 망월동을 찾았던 기억 때문에,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는 평 때문에, 첫 장은 적잖이 무거웠다. 서너 주가 지나고서야 출근길 지하철에서 겨우 읽기 시작했다. 몇 번의 출퇴근을 통해 여섯 장으로 나누어진 소설과 그 뒤에 붙은 에필로그를 모두 읽었다. 눈시울이 붉어지기는 했으나 크게 울지는 않았다.
그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해 졌다고 한 그 말, 그 말을 광주에도 붙일 수 있다면 『소년이 온다』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그 어떤 의미에서도 서정시라고는, 서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탓이다. 광주에 관한 몇 가지의 기록이나 기술을 본 적이 있다. 어떤 것은 슬펐고 어떤 것은 화를 담고 있었다. 물론 이 책 역시 그렇지만, 그 슬픔과 분노는 저자나 화자의 것이 아니라 오롯이 광주의 것이었다.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이라면, 『소년이 온다』는 서정시와는 정 반대편에 있다. 이 소설이 제대로 쓰여진 것이 맞다면, 광주에 대한 서정시는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 이외의 것은 최대한 싣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흔히 그러하듯 표지에는 책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과 함께 약간의 장식들이 있고, 출판사 이름도 적혀 있다. 뒤표지에는 짧게나마 평론가들의 말도 실려 있다. 바코드와 가격 표시 또한 있다. 책 날개 역시 흔히 그러하듯 작가의 사진과 약력, 출판사의 다른 책들을 싣고 있다. 광주 운운하는 띠지도 없고, 대학 교수의 긴 평론도 없으며, 작가의 후기나 헌사조차 없다. 몇 장의 속표지를 넘기면 ‘차례’가 나온 후 곧장 소설이 시작되고, 소설이 끝난 후엔 (소설이 끝났음을 알 수 없을 만큼 소설적인, 그리고 소설과 이어져 있는) 에필로그가 이어진 후 자료제공자에 대한 사례 몇 줄이 나오고 책은 끝이 난다.
時點과 視點 모두 여러 가닥이 엉켜 있다. 80년 5월의 광주와 접한 여러 날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후의 여러 날들, 그리고 그 날 그 날 살아 있었던 여러 사람들. 시점과 인물과 사건들이 모두 이어지고 끊어지며 또한 미끄러진다. 그 끝에는 죽음이 있고, 삶이 있고, 또한 반대편 끝이 있다. 서정시가 아닌 이 소설은, 소설이자 기록이며 기록이자 또한 소설인 탓에, 매끄럽지 않다. 광주의 거대한 감정이 잡아 끌지만, 광주라는 거대한 벽이 막고 있으므로, 나는 제자리에서 차가워졌다.
니가 아니라 네가, 합판 대신 베니어판이, 카스테라 대신 카스텔라가 등장한다. 사건 너머의 화자만이 아니라 그날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 역시 표준어로 말한다. 실재하지 않는 언어이자 보도를 위한 언어, 그 어색한 말이 자연스레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광주 말씨를 쓰는 사람들은 그날 자신의 집을 뜨지 못했던 사람이다. 도청 광장으로 나가지 못했던 사람, 도청 광장에 나간 이를 설득해 삶을 택하도록 하지 못했던 사람, 결국 광주를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따옴표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책 속에만 존재하는 표준어로 된 문장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표지 없이 서술과 대화를 오간다. 미처 (다시) 하지 못한 말, 속으로 뇌까린 말들, 혹은 남의 것을 옮긴 말들만이 표지를 달고 있다. 기욺이라는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잊히지 않고자 했던 말들, 잊지 않고자 했던 말들이다, 다른 모든 말들과 마찬가지로.
우겨넣다가 아니라 욱여넣다라고 쓴 것까지 마음에 남는다.
혼은 자기 몸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 신형철, 책 표지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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