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직장 점심시간엔 한 시간 동안 밥을 먹고 근황을 조금 나눈 후, 친구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사진 갤러리 류가헌과 서울시립미술관에 들렀다가 저녁 약속 장소를 향했다. 류가헌에서는 <DUST MY BROOM PROJECT 보고전>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귀신, 간첩 할머니>가 열리고 있다. 류가헌은 크지 않아 전시작품과 해설 패널을 모두 보고 나왔고, 시립미술관에서는 눈에 띄는 영상 세 편 반을 보고, 그 사이를 오가며 설치작품 몇 점을 스쳐지났다.
“DUST MY BROOM PROJECT는 2011년 3월 일본 토호쿠(동북) 지방에서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재해지역의 재건을 리사이클의 시점을 통해서 실행해 가는 것을 목표로” 대학 교수, 리사이클 기업, 사진작가가 모여 활동해 오고 있다고 한다. 지진과 해일로 “폐기물”이 된 시설물들, 사물들을 해체 및 철거, 그리고 재활용함으로써 지역 재건에 일조하는 동시에 그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또한 해당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회학 특강, 참여미술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갤러리 입구의 담장에 전시된 사진은 붉은 철판을 가까이서 찍은 것이었다. 용접선인 듯한 선이 그어진 표면만이 나와 있었으므로 그것이 선박의 일부인지 혹은 용접선처럼 상처가 생긴 자동차 보닛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어느 건물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같은 철판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은 갤러리 안에도 두어 점인가가 전시되어 있었다.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의 수산 공장에 있었던, 생선 가공 과정에서 나오는 어유(魚油) 저장 탱크였다고 했다. 공장 이름이 새겨져 있는, 높이가 10미터를 웃도는 큰 탱크가 수백 미터를 휩쓸려 가 찌그러진 통조림처럼 뒹굴었던 모양이다. 업체에서 탱크를 절단하고 새어 나온 기름을 제거하는 동안, 사진가 스가와라 이치고菅原 一剛는 그 프레임을 그 철판으로 가득 채웠다.
아오노 후미아키는 같은 미야기 현에 속한 센다이 시에서 망가진 가구들을 모아 나름의 환생을 시도했다. 지난 여름에 본 전시에서, 다시 ‘쓰일’ 수는 없는 오브제가 된 가구들은 그 흔적을 어긋남으로 내어 보이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수거할 수 있는 것들을 수거해 (일종의 기록물로서 망가진 원형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고, 이에 따라 그대로 보존된 것들이 있다) 달리 ‘쓰일’ 수 있는 사물들을 만든다. 그 물건들은 남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적어도 전시할) 사진으로 남긴 것도 아니다. 대신 이들은 피해 지역의 나무를 찍은 사진, 피해 지역의 아이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벽에 걸었다.
스가와라 이치고는 많은 것들이 수거되고 재활용 공정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또 기록하며, 그 물건들 너머의 역사를 본 모양이다. 고무 타이어에서는 오천 년 전의 목제 수레 바퀴를 보고, 산처럼 쌓인 브라운 관에서는 그것을 개발한 브라운 박사와 그 화면을 통해 전달된 수많은 사건들을 본 모양이다. 갤러리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한쪽에 전시된 책에는 타이어 더미, 브라운관 더미, 자동차 더미 등 수많은 산을 찍은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바심 막디Basim Magdy의 <구겨진 것The Dent>은 암막이 쳐진 방에서 큰 스크린에 영사되고 있었다. 크고작은 배경음이 흐르는 가운데 화면에는 미술관에서 고전적인 조각품들을 보는 관람객들이나 올림픽 개막식에 입장하는 행렬, 거대한 놀이기구, 야적장에 쌓인 덩치 큰 쇳덩이들(레미콘의 회전통인 모양이다), 코끼리, 건물 철거 현장 등의 모습이 지나갔다. 암막을 걷고 들어간 순간 화면에는 “칠십 년 동안 어부들과 그들의 아내, 애완 고양이의 유령들은 한적한 따뜻한 코드 옷깃에 머물렀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지.”라는 자막이 흘렀다. 삭막한 풍경 위에 새겨진 자막은 어딘지 노래 같은 운율을 지닌(화면에는 영어 자막만이 표시되었다. 국역본 인쇄물이 따로 배포되었다.) 동화 같은 문장이었다.
그 동화 속에서 사람들은 올림픽을 유치하고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사냥을 했고, 70년 전에 불타버린 마을을 재건했다. 동물원을 만들었고 아이들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가르쳤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호기심이 전자기 안개를 마을에서 밀어 내뱉었을 때, 그들은 위대한 도시 세우기가 멀리 떨어진 꿈이라는 걸 알았고, 도시의 시장은 망각으로 최면을 걸기 위해 서커스단을 마을로 불러들였”다.
암막을 걷고 들어가 만난 어부 가족들에게 외판원은 “콘크리트 혼합기[레미콘의 회전통]들을 팔았고 최근에 아마존에서 발견된 공룡의 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알들은 그들에게 명예를 가져다주었고 […] 그들은 올림픽 유치 계획을 공개”했지만, “두 달 뒤 흰개미들이 금속으로 된 알들을 공격했고 몸통을 씹어 구멍을 냈고 내재된 진실을 타운홀 미팅에서 토해냈”다.
수입된 동물들은 죽어 나갔고, 개최되지 못한 만국박람회장에는 서커스 천막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싸우지 않기로 했고, 과거와 똑같은 미래를 계획했으며, 그 모든 것을 재연하기로 했다. “경기장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높이의 파사드에 유령처럼 매달린 구겨진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서커스용 코끼리”라고 했다.
니나 피셔Nina Fischer와 마로안 엘 사니Maroan el Sani는 3월 11일 대지진 이후 그곳을 떠난 이들 몇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쿠로사와 아키라黑澤 明의 1955년 영화 <공포에 산다 ― 생존의 기록>을 보여준다. 영화를 본 후 그들은 앉아서, 혹은 서서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노래를 부른다. 장면이 바뀌면 비슷한 배경을 두고 선 비슷하게 생긴 두 아이가 등장한다. 한 명은 후쿠시마에서 곤란해 하고, 다른 곳에 있는 다른 한 명은 행복하다. 비슷한 배경을 두고 등을 맞대고 선 비슷하게 생긴 네 아이가 제자리에서 돈다.
<공포 속에 산다 ― 3.11 이후I Live in Fear ― After March 11>은 이들은 담은 2채널 영상이다. 두 아이가 나오기 전까지 두 대의 카메라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카메라를 향해(어쩌면 같은 방향에 있었을 스크린을 향해) 배치된 의자에 앉은 몇 사람을 한쪽에서는 원경으로, 한 쪽에서는 말하거나 듣는 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프레임에 담았다. 의자들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앉은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을 향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주인공들에 관한 이야기로 입을 연다. 영화 속의 한 노인은 방사능을 피하기 위해 지하벙커를 만들었지만 그곳마저 불안하게 느껴지자 브라질로의 이민을 결심한다. 그곳을 떠날 수 없는 가족들은 그를 금치산자로 만들려 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노인의 마음, 그 아들의 마음, 또 그 아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들에게도 함께 떠나야 하거나 두고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함께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지만 함께 향할 곳이 없다.
그곳에서 지진을 겪고도 며칠간 원자력발전소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있었다. 정부가 원전 사고를 축소하려고 한다고 느낀다. 자신의 삶도, 이제 막 들어 앉은 뱃속의 아이의 삶도 불안하다. 노인이 그냥 떠나버렸더라면 어쩌면 가족들도 함께 가지 않았을까, 어떻게든 잘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왜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실은 서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까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 언젠가 죽지만 죽임 당하기는 싫다던 말을 되새기는 사람이 있다.
여전히 어두운 공간을 빙빙 걸으며 그들은 이야기를 잇는다. 걷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하며, 앞을 보다가 말하는 사람을 보다가를 반복한다. 어느 한 명이 말을 꺼낸다.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도쿄를 떠나기로 했다고.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이라 여러 번 가 본 어느 곳으로, 새 직장은 구하지 못했지만 일단 떠나기로 했다고. 사람들은 잠시 놀라고 걱정하지만 이내 자기 이야기를 한다. 떠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나이가 많은 자신은 이곳을 떠나면 새 직장을 구할 수 없다고, 부모님을 이곳에 두고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다고. 왠지 변명처럼 들린다. 도망마저도, 의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둘러 서서 노래한다. 알고 싶다고. 눈들은 모두 손에 쥔 종이를 향하고 있다.
* DUST MY BROOM PROJECT 설명은 전시 팜플렛에서 인용.
<구겨진 것>의 자막은 박재용 번역. 영상은 http://www.basimmagdy.com/the-dent.
아오노 후미아키에 관해서는 아오노 후미아키, 《환생, 쓰나미의 기억》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