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혼자서 가는 길」

이제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놓고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는
저녁노을만이 무척 곱구나
소슬한 바람은, 흡사 슬픔과도 같았으나 시장기 탓이리라
술집의 문을 열고
이제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내말에 귀를 기울이고
옳다고 하던 사람들도
다 떠나버렸다
마지막 남은 것은 언제나
나 혼자뿐이라서 혼자 가는 길

배신과 질시와 포위망을
그림자 같이 거느리고
나는 끝내 원수도 하나없이
이리 고독하구나

이제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잃어버린 것은 하나 없어도
너무 많이 지쳐있어라
목이 찢어지도록
외치고 싶은 마음을 달래어
휘청휘청
돌아가는 길 위에는
오래 잊었던 李太白의
달이 떠 있었다

조지훈, 「혼자서 가는 길」



흔한 정서다. 외로움, 외롭지 않기를 희망하지조차 않게 될 외로움 — 문학에, 혹은 작가들에게는 물론이고 지극히 일상적인 영역에도 팽배한 감정이다. 흔히 하는 말로, ‘적어도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그것이 타인의 외로움이나 시대의 외로움조차 아니고 화자 자신의 외로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조지훈이라는 이름이 달린 시라고는 해도, 특별한 것을 말하지는 않는 시다.
그럼에도 책상맡에 이 시(의 일부)를 적어 두었다. 어느 행에도 적히지 않은 말, 그리고 몇 개의 쉼표들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하던 사람들도 떠나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 떠나버린 것은 아니다. 그저 떠나버린 것이다. 이로써 이 외로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떠나버렸다고 적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외롭지만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허전하지만, ‘돌아가는 길 위에는 노을이 곱다’. 소슬한 바람이 슬픔 같았지만, 생각해 보니 시장기 탓인 것이, 혹은 나아지기 위해 시장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소슬한 바람은, ‘슬픔과도 같았으나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시장기 탓이다’. 외롭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필요도, 외롭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스스로를 달래지만, 달래야 할 만큼 슬프고 괴로운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은 눈 부신 일출도, 어둠을 예고하는 일몰도 아니다. 고운 노을이 지고 나면 달이 뜬다. 어느 시인이 놀던 달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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