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개인전 《불분명한 대답》(갤러리 아라리오 서울, 2017.3.30-5.7.)

기억과 망각에 대한 고민은 작가가 곳곳에 심어 놓은 알레고리(Allegory)를 거치면서 그 기이함이 배가된 채 나타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들이 캔버스 표면을 표류하듯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다. 그녀들의 곁에는 어울리는 듯 어색한, 세심한 듯 거칠게 뒤엉킨 오브제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오브제들은 본연의 역할은 잊고 작가가 부여했을지도 모르는 알레고리(allegory)를 품은 채 작가가 직조한 꿈과 같은 초현실적 공간에 배치된다.

 

잘린 손과 잘린 닭과 온전한 돼지

고백건대, 종종 그러하듯, 전시장 벽면에 적힌 문장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몇 해 전 ― 여섯 해 전인 모양이다, 이번 전시는 여섯 해 만에 열린 작가의 개인전이다 ―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작가, 이진주의 개인전 《불분명한 대답》(갤러리 아라리오 서울, 2017.3.30-5.7.) 전시장 입구에 적힌 문장들이다. 깃털인지 꽃잎인지를 품은 두 손, 〈유예〉를 지나면 걸린 문장이다. 이해하지 못한 문장들을 지나면 다시 한 점의 그림, 〈내가 본 것〉이 걸려 있다.역시 손목부터 시작되는 몇 개의 손을 그린 그림이다. 손들은 이런저런 사물들이 놓인 테이블 위에서 생닭의 배를 꿰메고 있다.
알레고리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비유를 알 뿐이다. 〈얇은 찬양〉을 체제를 비유한 그림으로 읽는 것, 그러니까 흔히들 그러하듯 돼지를 어떤 탐욕의 비유로 읽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일일까. 몇 개의 의자를 잇대고 흰 천을 덮은 위태한 소파 아래 숨은 두 사람과 소파 위에 누운 돼지,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몇 개의 검은 그림자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여느 가정이다. 같은 방에 있지만 자기 자리를 가진 이는 많지 않다. 하나의 방에 있음으로 인해, 나머지는 오히려 원치 않는 시선에 노출될 따름이다. 숨을 곳이라고는 기껏해야, 남의 자리 아래 정도 뿐인 ‘나머지’들이 있다. 그렇게 숨어도 결국은 드러나고야 마는, 검은 그림자들을 피할 수 없는, 나머지들이 있다.
아마도 최소한의 자리나마를 허락 받은 몇몇 ‘주체들’ 이외에는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공간이다. 밑둥도 가지도 잘리인 채 한낱 오브제가 되어 버린 나무들, 그런 것들만이 입장을 허락 받은 세계다. 한 발 떨어져서 본 이 그림은 여느 가정들이 속한 여느 사회가 된다. 누구의 밥으로 돼지는 살이 쪘을까. 그림자들은 무엇을 바라 그 뒤에 서 있을까. 나머지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어떤 죽음들

의자 밑에 숨었던 이들과 같은 이들일까, 전시되지 않은 그림 〈불분명한 대답〉은 두 사람을 그린다. 아니, 죽은 새가 놓인 죽은 식물의 화분을 업고 사람 ― 아마도 남자 ― 을 안아 든 한 명의 사람 ― 아마도 여자 ― 을 그린다. 의자 밑에 숨었던 이들과 같은 이들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진다. 아마도 도망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짊어질 수 있는 짐이라곤 죽음 뿐이다. 아마도 남자, 는 어쩌면 도망에 힘을 보탤 생각이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여자, 의 발 밑에는 멜로디언이 놓여 있다. 누구도 삶을 향한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멜로디언 소리가 나면 추적이 시작될 것이다. 멜로디언 소리는 아무런 노래도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분명한 대답〉이라면, 슬픈 일이다.
세 폭짜리 그림 〈가짜 우물〉이 도망에 실패한 그들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과한 말일 것이다. 쓰레기장에 급히 만든 것 같은, 매장이 끝나지조차 않은 묫자리 ― 어째선지 나는 이것을 암매장으로는 읽지 않았다 ― 아래로는 쓰러진 화환들 사이에서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코를 드미는 돼지들. 그리고 그 아래, 검은 물 위에 아이를 안고 누운 어른, 어른에게 안겨 누운 아이. 세 번째 그림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이 그림을 도망의 결과로 읽었을 것이다. 세 번째 그림 덕에 이 그림은 미지의 것으로 남았다. 조금씩 가라 앉는 죽음의 이미지가, 앞선 죽음들을 중화했다.
잘린 손들과 잘린 나무들을 죽음으로 읽는 것 또한, 돼지를 탐욕으로 읽는 것만큼이나, 나이브한 일일까. 실은 둘은 다르다. 손목 위가 생략된 손들 ― 혹은 뒤통수가 생략돼 가면처럼 되어버린 얼굴들과, 잘려 나이테가 드러난 나무들. 닭을 꿰메는 손을, 스스로를 다 보듬지도 못한 채 다른 이의 상처를 치유하려 드는 겂없는 이로 읽고 싶었다.

 

미망인의 방에 화초가 자란다

이 문장을 떠올린 것은 〈오목한 노래〉 앞에서였다. (아마도 봄로야의 “도태된 땅에 계란꽃이 자란다”는 문장에서 비져 나온 문장인 모양이다.) 미사포를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이 사람을 나는 어째선지 ‘미망인’으로, 죽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난 받는 사람으로, 나머지 중의 나머지로 보았다. 어쩌면 앞에 놓인 자루 속에는, 흙이 아니라 남편의 시신이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이를 미망인으로 만든 하나의 죽음 따위 아무렇지 않을 만큼, 화초들은 살아서 자란다. 잎을 솎아 주어도 좋을 만큼 자란다. 그이 또한 자라고 싶은 모양으로, 나무 같은 모양으로, 화분에 담긴 흙 속에 발을 묻고 있다.
손에 쥔 마이크에 대고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가짜 우물〉의 구덩이 옆에도 단상과 함께 마이크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기쁜 노래를 부르는 표정은 아니다. 하지만 추모곡일지언정,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자신의 지난 날을 추모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기쁜 일이다. 그로써 새 삶이 열리는 것이라면, 미망인의 방에서 자라는 것이 화초만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읽어도 좋다면, 어쩌면, 〈가짜 우물〉이 그리는 장례식의 주인공은 도망을 꾀했던 의자 밑의 두 사람이 아니라 돼지, 혹은 검은 그림자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미망인의 방에 화초가 자라는 것은 그러나 온전한 끝은 아니다. 온전한 새 시작은 아니다. 〈저지대〉는 엎드려 쓰러진 몇몇 ― 아마도 여성 ― 을 그린다. 그리를 향해 오르막을 오르는, 화환을 짊어진 사람들을 그린다. 기뻐할 죽음을 위해서조차 고난 받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여긴다면, 화초가 미망인이 방에서 자라는 것으로는 모자라다. 화환의 꽃들이 새로 뿌리 내릴 곳이 필요하다. 화환을 짊어진 이들에게 드리울, 새로운 그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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