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으로(만) 유통되는 어떤 개념에 구체적인 살을 입히는 것이 ― 뻔하지만 눈물 나는 사랑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든 설득력 있는 유토피아를 부여주는 것이든 ― 예술이 작동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면, 반대편에는 이름 없는, 인정이나 존중을 받지 못하는, 혹은 알려지지 않는 실존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러니까 개념을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이 이해되거나 보여질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이 또한 있을 것이다. 키아라 베르사니Chiara Bersani의 퍼포먼스 《젠틀 유니콘Gentle Unicorn》(서울: 모두예술극장, 2024.11.29-30.)은 아마도 후자에 속한다.
정사각으로 표시된 무대의 세 변에 방석을 깔아 마련한[1]뒷줄에 의자가 놓여 있는 줄도 있다. 휠체어 이용 관객 몇 명 역시 뒷줄에 자리한다. 그 외에도 일부 관객은 극장에 원래 설치되어 있는 ― 정사각 … 각주로 이동 객석에 관객이 앉기 시작할 무렵, 무대 한쪽 구석에는 이미 자그마한 몸뚱아리 하나가 엎드려 있다. 하나둘 자리가 차는 (아마도 15분은 되었을) 꽤 긴 시간 동안 그는 들숨날숨을 따라 조금씩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할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무언가 소리를 내었던 것도 같다. 공연이 시작되고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는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미미하다. 골형성부전증으로 인해 걷지 못하고 접힌 다리와 팔, 몸통까지를 써서 앉은 몸을 조금씩 밀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1미터가 채 안 되는 그의 몸은 힘껏 미동을 반복한다. 객석이 없는 변을 따라 반대쪽 끝으로 가기까지 또 15분쯤이 걸린다.
키 98cm의 나, 키아라 베르사니는 유니콘의 살과 근육, 뼈가 될 것을 스스로 선언한다. 나의 숨결과 시선으로 유니콘에게 그 자체로 갑옷이자 피부가 될 옷을 입힐 것이다. 움직이는 나의 몸과 옷의 형상을 통해 유니콘의 움직임, 키스, 인사, 하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 키아라 베르사니는 유니콘의 오랜 혼란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들을 괴롭혀 온 보편적 질문에 목소리를 부여할 것이다.
키아라 베르사니, 창작 노트.
본격적으로 유니콘이 되는 남은 30여 분, 움직임은 좀 더 커지고 다양해지지만 그가 유니콘이 되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가끔 가볍게 주먹쥔 두 손을 얼굴께에서 굴리는 동작 정도가 유니콘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동작의 전부다. 그렇다고 유니콘을 떠오르게 하는 동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줄곧 손을 써서 마치로 네발 동물처럼 몸을 움직이고 말이 히힝거리듯 밭은 호흡으로 웃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 그리고 골형성부전증이 있는 사람에게 흔한 ― 일상적인 몸짓일 뿐이다. 그렇게 무대 곳곳을 돌아다닌다. 가끔은 관객과 눈을 맞추거나 (마침 그의 눈은 말의 눈을 닮은 것도 같다) 관객에게 다가가 몸을 기대기도 한다 (몸을 뒤로 빼며 접촉을 피하는 관객도 있었다).
유니콘이 되기 위해 혹은 유니콘처럼 보이기 위해 혹은 유니콘이라는 개념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대신 자신에게 익숙한 자신의 모습에 유니콘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아주 일상적인 움직임이지만 지극히 사적인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는 평소에 휠체어를 사용할 것이므로 바닥에서 몸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주로 그와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일 터이다. 그리고 그의 공연을 보는 낯선 ― 종종 그런 움직임이 낯설 ― 사람들. 무대라는 배경과 유니콘이라는 이름은 보거나 보여줄 가치가 없었던, 사적인 영역에 숨겨져 왔던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보이는 것, 보아야 하는 것, 어쩌면 놓쳐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만든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움직이고 웃고 눈을 마주치는 그의 몸짓에 유니콘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의 자그마한 몸과 커다란 눈, 높은 목소리는 요정을 생각나게 할 수도 있다. 아무리 가까이에서 어떤 몸짓을 한들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기엔 턱없는 몸을 하고서 천진하게 웃으며 슬쩍 기대는 그는 이 자리에서 더없이 무해한, 익숙하지 않으므로 처음엔 잠깐 피한대도 이내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어쩌면 한 번쯤 쓰다듬어 보고 싶을, 동화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인간을 환상과 행복의 세계로 안내하는 유니콘보다는 무엄한 침입자를 뿔로 들이받는 유니콘이 좋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다소 마뜩잖았다.
한참을 돌아다닌 그는 객석이 없는 쪽, 그러니까 처음에 15분을 천천히 이동했던 거리의 중간쯤에 자리한다. 그리고는 색소폰(트럼펫이었을까)을 연주한다. 악기를 정말로 들고 있었던지 손으로 시늉만 했는지 잊었다. 후자였다면 허공에 앞발을 구르는 예의 움직임과 비슷했을 것이다. 전자였대도 장난스러운 가짜 연주였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날 없이 끝나야 할까 생각할 무렵 극장 한 쪽 구석에서 트럼펫(트롬본이었을까) 소리가 들린다. 유니콘의 부름에 화답하는 코끼리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게 여기저기서 몇 명의 사람과 몇 개의 악기가 가세해 잠시 합주가 이어진다.[2]아마도 같은 기간에 진행된 “<젠틀 유니콘> 관악기 워크숍 : 유니콘을 찾습니다”의 참여자들이다. 이렇게까지 날 없이 끝나야 할까,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공연이 끝났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떠올렸다. 상대를 해하기 직전 악질적인 농담을 던지며 신나게 웃는 무뢰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