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대극장에도 갈 수 있었을 사람들이 모여

인기척이 있으면 무대에 ― 정확히 말하자면 입구 반대편에 놓인 좌식 탁상에 ― 앉아 있던 이가 벌떡 일어나 관객을 맞는다. 티켓 대신 받은 봉투에는 한 면을 무늬나 색이 채운 명함 만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다. 그는 같은 무늬나 색으로 된 카페트나 돗자리 혹은 박스종이를 이어 붙여 만든 무언가에로 관객을 인도한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시간이 된다. 오후 한 시. 평일에 연극을 하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지 않은 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일곱 시 즈음으로 일정표에 적어 두었다가 전날에야 한 시 공연임을 알았다.)

“전문 배우가 없는 관객참여형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자 “이 공연의 유일한 스태프” ― 연출가이자 하우스 어셔이자 유일한 배우 즉 자기 자신을 위해 프리젠테이션 화면을 넘기는 사람 ― 라는 그는 스스로를 관객 1로 명명한다.[1]이하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모든 인용은 작중 대사. 공개된 대본 참조. 이윽고 가까이 앉은 사람이나 먼저 눈에 띄는 사람에게 관객2, 관객3 하는 식으로 이름을 붙이고 간략히 설명한다.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누운 사람, 지금 막 들어와 문가에 앉은 사람, 소개하는 자신을 모른 채 하는 사람 등등. 이것은 전부 컴퓨터로 기록되고 컴퓨터 화면은 전면의 벽에 투사된다.

편히 누워도 좋다, 휴대전화를 쓰거나 공연을 촬영해도 좋다, 지루할 땐 봉투에 담아 둔 비타민을 까먹어도 좋다, 비상 대피로는 들어온 문이다, 그 옆에는 화장실이 있고 언제든 사용해도 좋다, 화장실 안에서도 공연 소리는 잘 들리며 따라서 화장실 안에서 나는 소리도 밖에 잘 들리므로 수도를 틀어 놓고 사용하기를 권한다. 이런저런 절차를 마치고서야 이제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시점은 한 시 십 분쯤 혹은 십오 분 쯤이다. 러닝 타임은 총 칠십 분. 공연이 시작된다고 해도 풍경이 곧장 달라지지는 않는다. 관객1 혹은 배우는 탁상이나 건너편 구석의 스탠드 앞에서 평범하게 말한다. 전투기 조종석이 조종사들의 몸에 맞지 않아 개선을 위해 평균을 산출했으나 평균에 맞는 몸이란 없다시피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거나 어느 관객이 쫓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 극장 일을 그만 두어 버린 누군가의 편지를 읽거나 국립극장 객석 의자 교체 사업에 응찰한 (바로 이곳과 같은 객석을 제안했다가 불쾌한 소리만 들었다는, 그러나 혼자서는 충분히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경험을 이야기한다.

《대극장 짓기》(이혜령 작·연출, 서울: 신촌극장, 2022.12.01-09)는 이혜령 혹은 제너럴쿤스트의 전작 《극장종말론》[2]이 작업을 보고는 「친애하는 극장종말론자 여러분께 ― 적대하는 객석을 향해」를 썼다.의 뒤를 이어 무대에 펼쳐진다.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시끄럽고 약한 자들을 금지하기 때문에” “극장은 망할 것”이라고 선언했던, 그러나 언제나 관객이기를 꿈꾸는 이혜령은 극장의 종말을 지켜보는 대신 아무도 금지하지 않는 대극장을 짓기로 한다. 그러나 이 설계는 역설적이다. 곧장 대극장을 짓거나 광장을 극장으로 선언하는 대신, 소극장 치고도 작은 곳을 택했다.[3]이곳은 블랙박스 극장이고, 뒤에서 인용한 말에 따르면 《대극장 짓기》는 블랙박스를 대극장보다는 극장 바깥에 가까운 곳으로 여기는 듯하다. … 각주로 이동 서울(단, 원한다면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원거리에서도 관람할 수 있다). 겨우 여남은 명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 그나마도 계단밖에는 출입구가 없는 곳. 바로 아래층은 주택이어서 무대와 객석이 합의한다 해도 마음껏 떠들고 쿵쿵댈 수는 없는 곳. 출퇴근이든 육아든 일에 매여 있지 않거나 자유로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오기 좋을 시간.[4]그다지 온당한 구획은 아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보낸 후, 혹은 야간근무를 마치고 잠을 아끼며, 이 시간대에만 겨우 극장을 꿈꿀 수 있는 … 각주로 이동 어린이나 반려동물의 방문을 환영하지만 딱히 그들을 위한 것은 아닌 이야기.[5]공연 홍보물에는 “어린이의 관람과 출입이 자유롭습니다”라고, 또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연은 아닙니다만, … 각주로 이동

《대극장 짓기》는 이렇게 자신의 기획을 전면으로 배반하기라도 하려는 양, 실은 기존의 대극장에도 갈 수 있을 법한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 늦으면 안 되고 꼼지락거리거나 부스럭거리면 안 되는 극장에서 쫓겨난 적이 있을지는 몰라도, 들어가보지조차 못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큰 관객들을. 아마 이것은 순서다. 혹은 대극장을 사랑하는 관객들이 안에서부터 극장을 바꾸기 위한 모의다. “극장 바깥으로 나가거나 블랙박스 시어터를 택하는 게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불가피한 결정일 수밖에 없다면”, 크기만 한 ― 그들을 쫓아낸 ‘제도’와는 접점이 없는 ― 대극장을 짓는 일도, 혹은 광장을 점거하는 일도 임시방편이거나 실은 포기나 도망일 뿐일지 모르므로, 대극장 짓기는 외부에서 시도될 실험이 아니라 오히려 대극장 관객들의 (또한 물론, 《극장종말론》이 호명하는 “극장 관계자 선생님들”의) 의무다.

그리하여 《대극장 짓기》는 최초의 것 혹은 최소한의 것을 수행한다. 대극장에서 이미 쫓겨나 버렸으므로 대극장을 향해 혹은 대극장에서 말할 길이 없는 이들에게 대극장 밖에서 말하기를 청하는 대신, 대극장에 갈 수도 있었으나 이곳에 모인, 그러나 대극장에서 편한 시간만을 보내 왔을지도 모를 익명의 ― 2부터 15쯤까지로 불리는 ― 관객들에게 목격담 혹은 경험담을 읽힌다. 여전히 극장으로부터 완전히 버림 받지는 않은 혹은 극장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관객들은 예컨대 “하루아침에 극장에 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이가 여전히 관객이나 관계자인 이들에게 부친 편지를 나누어 읽는다. 이것은 쫓겨난 감각을 나누는 행동인 동시에 쫓아낸 감각, 정확히는 (혹은 과하게는) 스스로는 감각하지 못했던 쫓아냄에의 공모를 되새기는 행동이다.

예의 명함만한 종이. 무늬나 색의 뒷면에는 “당신의 도착이 극장의 증거입니다”라든가 “이 세계에 초대받았다면 극장에도 초대받은 것입니다”라든가 하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제 관객들은 한 사람씩 차례로 일어나 다른 자리를 깔고 앉은 낯선 이에게 저 말을 건넨다. 《대극장 짓기》 혹은 《극장종말론자들》의 테제에 맞는 문장이 관객에게서 직접적으로 발화되지만, 이것이 그저 이미 극장에 온 이들끼리 서로를 초대하고 환대하는 일이라면 여전히 허망한 데가 있다. 실은 어떤 문장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관객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사실, 관객이 그저 무대를 즐기는 눈과 귀가 아니라 ― 틀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누구여도 좋을 이들을 한데 뭉친 덩어리가 아니라 ― 언제든 서로를 만나고 목격하고 증언하고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역동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대극장 짓기》는 (정확히는 숨은 또 한 명의 배우 혹은 나래이터는)[6]이 공연의 크레딧은 “작·구성 이혜령 / 움직임 최희범 / 공간연출 신승주 / 어시스트·오퍼레이션·사진기록 임초이”로 기재되어 있다. … 각주로 이동 대극장을 짓자고, 우리가 지을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 극장에 있는 자신을 느껴보라고, 객석에서 혹은 극장 바깥에서 나는 미미하고 연약한 소리를 듣자고, 극장 너머의 공간을 떠올리자고, 이제 나를 둘러싼 벽이 허물어진다고 말했다. 첫머리의 편지를 마저 읽은 관객1은 이제 창문을 연다. 낮고 긴 창문으로 바깥이, 환한 하늘과 빼곡한 주택들이 보인다. 탁상을 사이에 두고 지금껏 있던 곳의 건너편에, 그러니까 관객2가 있었던 (관객2는 환대의 말을 건네기 위해 이제 다른 자리에 가 있다) 곳 가까이에 털썩 앉더니, 조금은 맥 없고 쑥쓰러 하는 목소리로, 공연의 끝을 알린다. 뜻밖에도 관객의 존재말고는 대개가 픽션이었던 공연의 끝을.

References
1 이하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모든 인용은 작중 대사. 공개된 대본 참조.
2 이 작업을 보고는 「친애하는 극장종말론자 여러분께 ― 적대하는 객석을 향해」를 썼다.
3 이곳은 블랙박스 극장이고, 뒤에서 인용한 말에 따르면 《대극장 짓기》는 블랙박스를 대극장보다는 극장 바깥에 가까운 곳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적어도, 얼마 안 되는 내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블랙박스는 환영幻影을 거부하고 유희나 실험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시니엄 극장과 대립하지만 객석의 규칙, 관객의 물리적 존재 방식에 있어서는 그렇지만도 않다.
4 그다지 온당한 구획은 아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보낸 후, 혹은 야간근무를 마치고 잠을 아끼며, 이 시간대에만 겨우 극장을 꿈꿀 수 있는 이들이 있으므로. 이혜령 또한 아마 그 중 하나다.
5 공연 홍보물에는 “어린이의 관람과 출입이 자유롭습니다”라고, 또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연은 아닙니다만, 낯설고 뜻밖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어린이들이 함께 머물며 경험할 수 있는 공연이기를 시도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6 이 공연의 크레딧은 “작·구성 이혜령 / 움직임 최희범 / 공간연출 신승주 / 어시스트·오퍼레이션·사진기록 임초이”로 기재되어 있다. 출연진은 따로 적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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