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근거 없는 상상으로 인하여, 트랜스젠더에 관한 극이리라고 확신한 채로 극장에 들어섰다. 한참 전에 예매를 한 것이면서도 작가의 이름과 제목, 장소와 일시 말고는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말이다. 입구에서 받아 든 전단에 이런저런 설명이 적혀 있다는 것 역시도 공연이 끝나고서야 확인했다. 장애학의 논의를 인용하며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의 리뷰를 쓴 작가가 “트랜스!”라는 제목으로 쓴 작품이라는 것만 알았다. 자신은 비둘기라고, 과거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러하며 단지 비둘기의 모습을 한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을 위하며 잠시 인간으로 지내 왔으나 이제는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첫 에피소드를 보면서도 젠더를 넘나드는 것과 종을 넘나드는 것의 관계를 생각하며 의심 없이 다음을 기다렸다. 이후의 이야기를 보며 조금씩 의심을 품었고, 속으로 단어들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성전환, 트랜스그레션transgression-위반, 트랜슬레이트translate-번역, 트랜스퍼transfer-이동, 트랜스패런트transparent-투명…
《트랜스!》(장영 작, 김미란 연출, 서울: 신촌극장, 2022.02.10-19.)가 그래서 무엇에 관한 극이었느냐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는 답하지 못하겠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거기서 트랜스젠더를 찾는 데 골몰하며 스스로를 잡아 끌었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트랜스-초월이라는 것은 애초에 한 마디로 답하기는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아는 것은 퀴어하거나 퀴어인 인물들이 등장했지만 딱히 트랜스젠더가 등장하지는 않았다는 점 뿐이다. 트랜스젠더랑 무관한 건 물론 아니지만.
주로는 투명을 생각하며 보았다. 벽 너머로 보인다는 의미에서의 초월. 낭독극을 할 법한 무대다. 대여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한쪽 끝 ― 관객들이 들어 온, 배우들이 몇 번인가 드나드는 입구 바로 앞 ― 에는 코로나 시대의 입구를 장식하는 체온계와 손소독제 같은 것들이 있다. 무대 조명은 스탠드. 어떤 것은 꺼져 있고 어떤 것은 켜져 있다. 의자 중 중 서너 개의 아래에는 텀블러나 테이크아웃 커피잔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마치 배우들도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 마냥, 무대란 것이 실은 별 거 아닌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 마냥. (실은 대부분이 소품으로 쓰였지만.) 같은 배우들이 같은 차림새로, (잠깐의 퇴장조차 없이 소품처럼 앉아 있다 문득 일어나) 그저 표정 정도만을 바꾸며 〈새를 기르는 방법(FOR MY ANGEL)〉, <우리는 비에 젖어 춥고 비참했지만〉, 〈아포토시스(APOPTOSIS!)〉 세 개의 이야기를 줄지어 보인다는 점에서 더더욱 투명해진다. 그러니까, 적어도 우선적으로는, 연극에 관한 ― 연극이라는 것 자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 극이었다.[1]소개에 따르면 《트랜스!》는 “변신 혹은 가뿐한 전환, 퀴어, 사랑, 동물, 죽음, 연극에 대해 말한다”.
그 투명한 무대에서 처음으로 펼쳐지는 것은 비둘기와 인간 커플의 결별이라는 사건이다. 비둘기와 사랑에 빠졌으나 끝내 인간밖에는 사랑하지 못한 남자(지승태 분)를 두고, 비둘기 여자(신윤지 분)는 비둘기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자유, 라는 말을 썼던가. 극적인 세계의 현실로 읽어야 할지 빤한 비유로 읽고 넘어가도 좋을지 결론을 내리기 전에 훌쩍 끝나 버리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비둘기는 (대중가요 〈새〉(싸이, 2001)의 율동을 따라 한) 허튼 유머로만 새를 흉내낸다. 자신은 언제나 새였다고, 이제 온전히 새의 삶으로 돌아가리라고 선언하면서도 그는 대개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두 다리로 걷는다.
이러한 재현이나 연기를 상상하고 이해하는 방법이 투명하게, 초월하여, 어떻게 삶으로 돌아올 것인지를 생각하려던 차에 돌연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 역시 꿈 같은 혹은 연극적인 상황과 흔해 보이는 가족 서사를 오가며 펼쳐진다. 강습경(이지혜 분)은 헤어진 연인 ― 둘이 서로를 부르던 호칭 중에 “언니”가 있었던 것 같다 ― 을 생각하며 아프다. (그의 지난 연인 전민재(신윤지 분)는 실재하지 않는, 적어도 남들에게 알릴 길은 없는 아픔과 공포를 겪는 이였다.) 이 아픔을 나누는 상대는 역설적이게도 가족을 버린 아빠(지승태 분)다. 인생은 연습경기라고 믿으며 딸의 이름을 습경이라고 지은, 실은 연습이 아니라면 어쩌나 두려워 하면서도 사랑을 혹은 연민을 좇아 겁 없이 떠난, 그래놓고 딸에게는 삶은 혼자라고 말하는 아빠. 물론 그런 말에 불끈 힘이 솟지는 않는다. “겨울비가 장맛비처럼 솨악”[2]단어들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이 정도의 표현을 배우는 몇 번인가 반복해 말했다. 쏟아지는 추운 날, 실은 혈연보다는 공통의 실패에 기반해 생기는 유대 같은 것.
마지막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연극에 관한 것이다. 하나 같이 티케팅 경쟁이 치열한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신윤지 분)과 그의 유일한 팬을 자처하는 이(이지혜 분). 이 팬은 배우가 무대에서 죽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아 왔지만 매번 진짜 죽음을 떠올리는, 진짜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배우는 배낭을 멘다.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는 배낭이다. 한쪽에는 샤워기가 달려 있다. 언젠가 배우는 샤워기 끝에 전구를 달고 조명을 켠다. 팬을 종종 눈부셔 하게 만들며 배우는 죽음과 아포토시스에 관한 열변을 토한다. 아포토시스, 유기체의 필요에 맞게 벌어지는 세포의 자살. 배우가 드는 예는 발생 초기 한 덩어리였던 손발에서 벌어져 손발가락이 생겨나게 만드는, 손발가락이 된 세포들의 사이에 있던 세포들의 자살이다.
전체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 같은 것으로 읽히기 십상일 화두를 던지는 통에 약간의 의심을 했다. 아무 데로도 넘어가지 않는, 정해진 선을 따르기 위한 죽음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꺼이 읽자면, 저때 죽는 세포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에 기여할지 모른다고 말해 볼 수 있을까. 대의를 위한 죽음이 아니라, 이유 없이도 죽는 죽음. 그로써 갈라진 손발가락은 예정된 이상理想이라기보다는 우연한 가능성이라고 말이다. 작가의 권위를 거부하고 팬을 무대에 올리고 함께 무대를 벗어나는 배우의 “전환”이 그러한 죽음이라고.
작가가 쓴 대로의 일탈이 벌어지므로 다소 맥없다고 느꼈다. 힘찼던 것은 오히려 습경의 취한 모습이다. 아주 전형적이라는 점에서 이런 ―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데다 연극의 장치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 극에는 일견 어울리지 않는 환상을 자아내는 연기. 필요 이상으로 빼어났으므로 가장 큰 일탈은, 초월은, 투명은 여기서 벌어졌다. 현실과 꿈을, 사랑과 미움을, 함께 함과 홀로임을, 죽음과 삶을, 넘어서고 가로지르는 힘은 초라하고 평범하고 지리한 현실에서 나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