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회의 흔적, 끊어진

몇 년 전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개 ― 어느 베스트셀러 남성 소설가 ― 의 책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지만 어쩌다 한 번 펴면 끝까지 읽고 마는데 배수아의 글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도무지 끝까지 읽히지 않는다고. 혹은 도무지 끝까지 읽히지 않지만 몇 번이고 다시 펴게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단편집이나 중편집이었던 어떤 책을 세 번째쯤 읽다 포기한 즈음의 일이었다. 어느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책장엔 배수아의 책이 몇 권 있지만 끝까지 읽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중 한 권이 저 책이었을 텐데 어느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배수아의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은 어쩌면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이 유일하다. 빌려 읽었는지 읽고 누군가에게 선물했는지 책장에는 없다. 여전히 배수아를 읽어야 한다고 느끼는 게 오래 전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즐거이 읽은 탓인지 친구들이 종종 그를 언급하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몇 번이나 읽다 멈춘 첫머리에서 무언가 희미하게나마 감지하는 탓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게릴라 공연’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배수아 원작, 안티무민클럽, 서울: TINC, 2022.03.05-06.)의 객석에 앉았다.[1]설치와 철거를 도왔고 하루는 하우스매니저로 일했다. 한 번의 리허설과 세 번의 공연, 사흘간 네 번을 보았다. 앞의 두 번은 아주 집중하며 보지는 … 각주로 이동

배우는 둘이다. 등장 인물은 몇일까. 우루와 우루라는 이름을 가진 ― 단순히 동명이인일지도 모르는 ― 이와 우루를 기억하는 이와 기억 속의 우루와 그들에게 연극을 알려 준 교사와…. 두 배우는 우루가 되었다가 우루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었다가 교사가 되었다가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읊는 듯한 서술자가 되었다가 한다.어느 쪽이 실재하는 인물이고 어느 쪽이 환상이거나 착란 속의 것인지 알기 어렵다. 우루라는 한 사람만이 있었거나 그 역시도 없거나. 극은 한 배우가 다른 배우에게 건 전화로 시작된다. 그는 당신은 우루라고, 어릴 적 나와 함께 했던 우루라고 말한다. 상대는 자신의 이름이 우루이긴 하지만 그 우루는 아닐 거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내 둘은 어린 우루와 그 친구 혹은 어린 우루들이 되어 읽고 쓰지도 셈하지도 못하던 시절,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던 시절, 연극을 배운 시절로 뻗어 나간다.

끝나지 않을 연극이 끝나는 날까지

쉽게 혹은 거칠게 읽자면, 중심에 혹은 표면에 놓이는 것은, 연극과 삶의 유비다. 이 세계에 적응하는 법보다 먼저 배운 것으로서의 연극, 이해할 수 없으나 잊히지 않을 “기이한 사건”[2]이하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은 모두 작중의 대사. ― 예컨대 쥐 우리에서 녹색 담요 하나만 두른 여자가 죽은 채 발견된 ― 이 벌어지는 곳으로서의,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무대와 연극. “존재는 상상이고, 삶은 발명하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 교사가 시켜서 했을 뿐인 연극과 다른 이들 모르게 연습해 자신 있게 내어 보이는 연극, 이미 끝난 사건이 반복되는 장으로서의 연극, 실뜨기나 고무줄놀이 같은 놀이로서의 연극.

신이라는 작가-연출가를 상정하는 버전이건 혹은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버전이건 꽤나 흔하고 직관적인 세계 극장theatrum mundi이라는 은유는 여기서 게릴라 공연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배우 ― 우루였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혹은 잊었다 ― 가 설명하기로 비싼 공연장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 버려진 공간에서 펼치는, 종종 관객과 배우가 섞여버리고 돌발적인 결말이 허용되는, 무대가 종막을 선언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관객들이 떠나버리는 연극. 미처 다 준비하지 못한 이들이 하는 공연이므로 이 공연에 필요한 것은 관객 뿐이다. 문자 그대로, 뿐. 그럴싸한 연기나 사건이나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3]《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는 스스로를 게릴라 연극으로 소개하고 실제로 한때 교회로 쓰였던 폐허 풍의 건물에서 상연되지만 사실 그곳은 … 각주로 이동

우루가 구상하는 공연에는 맨몸에 담요를 두른 한 사람만이 출연한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겠지만 우루 자신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런 연극이란 언제 끝나는 것인지를 물으면 우루는 이렇게 답한다. “시간이 흐르면 관객들은 자리를 뜨겠지. 하지만 무대는 끝나지 않아. 너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내가 자리를 뜨는 일 없이 계속 객석에 앉아 너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이 약속의 시한은 “연극이 정말로 끝나는 날까지”다. 쉽게 혹은 거칠게 읽자면, 중심에 혹은 표면에 놓이는 것은, 외로움이다. 발을 잘라도 목을 잘라도 좋지만 전화만은 끊지 말아 달라는 부탁. 절규.

환상 혹은 착란에 관하여

제대로 읽지 못했으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내가 배수아를 읽지 못하는 것, 쉽게나 거칠게라는 단서를 달고서만 이 극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환상이나 착란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다. 분명한 흐름을 찾지 못하는 탓, 무엇이 되었든 하나의 줄기를 잡지 않고서는 이해의 지도를 그리지 못하는 탓, 이해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탓이다. 우루와 우루를 아는 이의 통화는 정말로 통화인지, 죽어버린 이는 교사에게 뺨을 맞은 어린이인지 아니면 무대 위의 누군가인지, 정말로 누가 죽어버리기는 한 것인지, 자신은 그 우루가 아니라고 했다가 곧 나는 우루라고 말하는 이와 당신은 내 어릴 적의 그 우루라고 했다가 곧 나는 우루라고 말하는 이는 어떤 사이인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썼다. 그만큼 많은 것을 놓쳤을 테다. “내게 최초를 보여준” 우루, 나를 무대에 올린 우루, 끝나는 연극이 끝나는 날까지 나의 무대를 지켜 보아 줄 우루, 그것이 누구인지를 나는 여전히 궁금해 한다.

환상 혹은 착란이거나 적어도 그렇게 말해도 좋을 이 우루 ― 그러나 이들에 따르면 “존재는 상상이고 삶은 발명하는 것”이다 ― 의 정체를 확신하는 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4]앞의 주석에서 들었다고 쓴 말에, 이것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생각으로 바쁜 사이 객석 여기저기에서 눈물이 흘렀다. 무대에서도. 믿을 만한 구체적인 사건 없이 제시되는 슬픔이나 아픔이나 죽음이, 배우들이 천진한 음성으로 외치는 굴 속에 수챗구멍에 개울가에 있다는 쥐 ― 시체로 발견된 여자의 죽음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 말았을지는 알 수 없는 ― 떼가, 나를 사랑해 달라는, 내 목과 발을 잘라 달라는 쥐들에의 애원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그들을 어떻게 찌르고 들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나는 환상과 착란을 피하느라 바빴다. 친절하게도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는 의미가 없는 것, 나와 아무런 맥락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향한 사랑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나는 갖지 못한 사랑이다. 종종 말하지만 찾지도 실천하지도 못한 사랑.

중에서 두 배우는 내내 대화를 주고 받거나 놀이를 하지만 종종 중단된다. 우루의 환상이나 착란에 의하여 혹은 우루가 환상이나 착란이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실뜨기란 단순해 보여도 늘 고도의 집중력과 창의력과 계획을 요하는 탓에 일순간 풀리거나 엉켜버리곤 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은 실은 죽음, 정확히는 죽은 자의 몸이다. 교사에게 뺨을 맞고 죽어버린 아이 혹은 게릴라 공연의 무대에서 돌연 죽어버린 배우의 몸. 배우가 잠이 들어버려 커튼콜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어수룩한 말에도 관객들은 자리를 뜨고, 살아 있는 배우는 죽은 배우의 몸을 끌고 그의 집을 향한다. 그의 집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의 집으로 삼게 될 집을 향해.

우회의 흔적, 끊어진

무대 가운데에는 거울이 놓여 있고 그 주위로는 붉은 모래가 깔려 있다. 죽은 몸이 놓인 것은 거울 위. 그의 몸을 끌고 가면 그 경로를 따라 붉은 모래가 궤적을 그린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끊어진다. 산 몸이 죽은 몸 위에 누우면 죽은 몸이 일어나 방금 누운 몸을 끌고 가기 때문이다. 두 몸은 여러 차례 자리를 바꾸고 여러 차례 대사를 반씩 반복하며 자리를 옮긴다. 궤적은, 첫 교대의 순간에 이미 끊어졌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저기 똑바로 바라다 보이는 집이지만 정작 이들의 몸은 거울과 모래더미를 따라 빙글 돌 뿐이므로 조금 휘다 끊어진 궤적은 아무 데로도 안내하지 않는 무용한 흔적이다. 아무 데도 가지 못했지만 (줄곧 그렇듯, 시신을 끄는 장면도 이내 끝나고 다른 시공간이 펼쳐진다) 누군가 있었다는, 그들이 함께 있었다는 증거만이 남았다. 그저 잠깐 가다 끊어진 모래를 그런 증거로 읽을 수 있는 것은 관객을 제하면 그들 뿐일 것이다.

쭉 가야 닿을 곳을 향해 빙글빙글 돌며 우회했던 그들이 결국 이른 곳이 어디일지는 알지 못한다. 종종 격앙되어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했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이들은 종종 춤을 추지만 춤이라면 나는 환상과 착란 만큼이나 읽지 못할 자신이 있다. 느리고 차분하게 움직이는 것만 보았다. 소리 지르고 날뛰고 울(던) 이들이 느리고 차분하게 움직이는 것을.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서로를 감싸며 움직이는 것을, 지금은 혼자지만 언제든 나타난 누군가가 금세 따라붙을 수 있도록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힘을 모으거나 발산하는 것이 아닌,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는 이 춤들 역시 끊어진 흔적과 마찬가지로 어떤 우회였을까. 가고 싶은 곳, 가야 할 곳은 있지만 그곳을 향하지는 않는 움직임.

뜻 없이 태어나 준비 없이 팽개쳐진 무대 위에서 관객을 바라보거나 기다리며 그저 서성거릴밖에는 도리가 없을 때 ― 그런 연극이 뜻대로 끝나지조차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지 ― 어디를 우회하며 누구를 만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했다. 혼자서 어떻게 우회를 시작할 수 있을지를, 갈곳을 모른다면 실은 우회란 불가능함을, 우루가 늦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말로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지를. 실은 이르지 않은 그 집에 우루가 있었을지를.[5]갈피를 잡지 못하는 가운데 습관적으로 우루에게서 최초, 근원을 뜻하는 게르만계 접두어 ur나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같은 것을 찾다가 이내 … 각주로 이동

References
1 설치와 철거를 도왔고 하루는 하우스매니저로 일했다. 한 번의 리허설과 세 번의 공연, 사흘간 네 번을 보았다. 앞의 두 번은 아주 집중하며 보지는 못했다. 나머지 두 번을 보기 전에, 그러니까 제대로 보기 전에, 제작진 중 하나의 설명을 들었다. 들은 것은 가능한 한 빼고, 본 것을 적어 둔다. 이 공연은 원래 2020년 말 상연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방역 문제로 취소되었고 함께 제작된 영상만 공개된 바 있다.
2 이하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은 모두 작중의 대사.
3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는 스스로를 게릴라 연극으로 소개하고 실제로 한때 교회로 쓰였던 폐허 풍의 건물에서 상연되지만 사실 그곳은 교회로 지어진 건물에서 운영되는 전시공간이다. 연습은 물론이고 대관일정을 잡고 대관료를 치르는 등의 분명한 ‘준비’ 이후에 상연되는 공연이다. 호의적으로 덧붙이자면, 누구도 준비하고 태어나지 않고 누구도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공연하지는 못한다.
4 앞의 주석에서 들었다고 쓴 말에, 이것이 포함되어 있다.
5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가운데 습관적으로 우루에게서 최초, 근원을 뜻하는 게르만계 접두어 ur나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같은 것을 찾다가 이내 말기로 했다.

One thought on “우회의 흔적, 끊어진

  1. 들은 것, 이 글로 나왔다. “사랑하는 일에도 살아가는 일에도 실패하는 우루를, 그 자신만은 끝까지 사랑하고 또 살게 할 것이라고. 우루가 잃어버린 것들만이 우루 곁에 남아 우루를 지켜볼 것이다. 우루가 잃어버린 것들만이 비로소 우루가 될 것이다.” 하은빈, 「우루라는 이름의 우루, 혹은 우리라는 이름의 우리」, 《고대대학원신문》 2022년 4월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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