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도 절망도 없이, 344명

메시지도, 그것을 전하는 방식도 아주 선명하다. 1971년 프랑스에서 ‘나는 낙태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343인―당시 ‘343인의 창녀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에 관객을 더해 붙인 《344명의 썅년들》(강윤지 작·연출, 극단Y 주최·주관, 서울: 알과핵, 2021.02.19-28.)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렇다.[1]여기에 간접인용한 설명과 다음 문장의 직접인용문은 모두 공연 홍보물에서 가져온 것이다. 저 343인의 선언과 이듬해 가을 “또래 남학생의 성폭행으로 임신을 한 16살 미성년자 여학생이 임신중지를 한 죄로 기소된 형사 사건 재판”인 ‘보비니 재판’을 극화한 것만으로도 이미 분명한 메시지를 객석을 향해 직접 말한다. 프랑스에서의 선언, 그에 화답한 독일에서의 선언을 이끈 인물들은 객석 양 옆의 발코니에서 동참을 호소한다. 두 사람이 무대에 선 이와 이루는 삼각형 속에 관객들이 앉아 있다. 임신중지 합법화 이후로도 산재해 있었던,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들―의료시설이나 정보에의 접근성 확보, 거짓 정보와 낙인의 금지 등―을, 배우들은 객석을 향해 그야말로 브리핑한다.[2]27일 공연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은 이 대목에서 객석에 조명을 밝힌 것이 자신 역시 그 역사를 함께 한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소감을 … 각주로 이동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하며 그조차도 시작일 뿐이다. 모두가 낙인이나 위험, 경제적 부담 없이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성교육을 비롯한 제반 영역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344명의 썅년들》은 에두르지도 깎지도 않고 곧장 이런 메시지를 건넨다. 하지만 이야기도 굽은 데 없는 직선인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선명하고 해석의 여지가 크지 않은, 이를테면 강렬한, 소수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는 스토리라인은 주저 없는 직선보다는 물결과 나선에 가깝다. 첫 장면의 배경은 의사 마리 끌레르(강서희 분)와 사무원 디안(강주희 분)이 일하는 산부인과다. 아마도 온갖 사건들로 가득한 수십 년이 지난 후인, 마지막 장면의 배경 역시 같은 곳이다. 두 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3]이 극은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낸 몇 달 후, 아직 효력을 잃지 않은 형법 낙태죄 조항의 향방을 아마도 자신 있게 예측할 수는 … 각주로 이동

마리 끌레르는 법과 가톨릭 교리, 의사 협회의 지침을 따른다. 임부의 생명이 위태로운 등 몇 안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임신중지 시술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밖에서는 68혁명이 함성이 한창이지만 디안에게 괜히 관심 갖지 말라는 투의 말을 던진다. 디안 역시 그런 모습에 이렇다 할 불만을 갖지 않는다. 강력하거나 구체적인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전화나 방문으로 시술 요청을 받아도 거절할 뿐, 나서서 신고하거나 캠페인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의사로서 직접지원과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하고 있는 시몬(김소영 분), 역시 의사로서 그런 시몬에게 분개하는 알랭(변승록 분) 모두가 마리 끌레르의 병원을 찾는 그의 친구다. 그는 다만 이 둘의 열성을 상대하는 것이, 그리고 둘이 마주쳐 시끄러워지는 것이, 조금 피곤할 뿐이다.

굴곡들 혹은 충돌들

시술을 거부당한 후 원치 않는 출산을 하거나 ‘뒷골목’에서 위험한 시술로 다치고 죽은, 조용히 사라진 여럿과 달리 한 “여자”(백혜경 분)는 마리 끌레르의 병원 앞에 아이를 두고는 높은 곳에 오른다. 그의 죽음에 세간의 관심이 쏠린다. 마리 끌레르는, 그리고 같은 시기에 원치 않는 임신의 당사자가 된 디안―첫장면에서 그는 헛구역질을 한다, 입덧일 가능성은 아직 생각하지 못한 시점이다―의 세계는 그렇게 달라진다. 그런 그들에게 시몬의 소개로 미셸 끌레르(이산 분)와 그 딸이 찾아 온다. 강간으로 임신하게 된 열여섯 살의 마리 끌레르(이청 분)다. 시몬이 귀띔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그저 당황스런 사건이다. 세계는 바뀌었지만 그는 그대로이므로 의사 마리 끌레르는 갈등하고 두려워 한다. 디안의 말에 힘입어―혹은 떠밀려―마침내 첫 시술에 나선다.[4]이 모든 사건은 이렇다 할 전조 없이 갑작스레 찾아 온다. 68 혁명 시위를 표현한 효과음―구호를 외치는 소리와 함께 나온, 갑자기 음량이 높아졌던 … 각주로 이동

불법 낙태의 당사자인 두 마리 끌레르, 그 과정을 돕고 주선한 시몬, 미셸, 디안 등 도합 일곱이 기소된다. 개인들의 목소리만이 오가던 무대는 이제 피고 7인과 그 변호사 지젤 알리미(백혜경 분)가 검사(변승록 분)와 맞서는 법정이 된다. 말하자면 임신중지를 둘러싼 개인들의 수고가 실은 국가의 문제임이 이 시점부터 이야기된다. 검사는 이 무대에서 가장 덜 연극적인 발성을 한다. 소근거리는 말조차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싣는 무대에서의 일반적인 발성과는 달리, 꽤나 맥없는 목소리다. 커지고 빨라지는 때에도 그렇게 들린다. 그는 법과 가톨릭 교리와 의사협회의 지침을 반복해서 말하기만 하면 되므로, 그래서 태아는 죽여도 좋다는 말이냐고 되묻기만 하면 되므로, 그에게는 오직 이 권위와 반복만으로 충분할 뿐 다른 어떤 설득력도 필요하지 않으므로, 여기에서 그런 발성은 썩 어울린다.[5]변승록은 배역의 이런 특성 덕에 연기가 어렵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머지 여덟의 목소리는 종종 떨리고 움츠러들면서도 시종 힘을 잃지 않는다. 이 여덟은 시종 목소리에 최대한의 힘을 싣는다. 역시나 그들의 말에 어울리는 발성이다. 자료와 논리, 경험과 감정,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아야 비로소 가능한 말이자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모두가 절박한 말이다. (이 문장을 쓰며 나는, 앞에 쓴 삼각형의 선언 대목에서 무대에 섰던 지젤 알리미의 표정을 떠올린다. 결기하는 비장함보다는, 기쁨과 자긍심이 보였던 미소를 떠올린다.) 그리고 하나의 목소리가 더 있다. 문자 그대로 목소리로만 등장하는―판결을 내리기 전 잠깐의 휴정을 전후해 들리는 발소리를 제외하면 그를 몸을 가진 사람으로 믿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판사. 국가는 이렇게 실체 없이 힘만을 행사한다. 아무런 영향도 되돌려 받지 않으면서 오직 일방적으로.

희망도 절망도 없는 나선

어린 마리 끌레르는 무죄, 조력자들은 벌금형,의사 마리 끌레르는 징역형. 이것이 국가의 판결이다. 아주 약간의 진보라고 해야 할까. 의사 마리 끌레르는 면회를 온 마리 끌레르에게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묻는다. 일상을 되찾았다는 답을 듣는다.[6]다른 이들의 면회도 묘사된다. 관객들은 항소하자는 다른 인물들의 말에 마리 끌레르가 분명히 답하지 않는 것, 디안이 마리 끌레르에게 당신이 어떤 … 각주로 이동 원치 않는 출산을 하고 퇴학 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 살아 온 자리를 잃지 않은 것, 밀려나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달리 나아가지도 않았다. 다만 어떤 가능성을 지켰을 뿐이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여전히 출발점에 있는 셈이다. 디안은 아이를 낳기로 했다. 비혼모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의사 마리 끌레르에게 이를 전하며,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시작해야 하리라고 덧붙인다.

아주 약간의 진보, 라고 한다면 아마도 너무 깎아내리는 말이 될까. 실은 국가의 질서에 균열을 낸, 이어진 많은 변화를 가능케 한, 수많은 이들의 목숨과 생활을 지킨, 분명하고 커다란 승리다. 하지만 마냥 희망을 갖기는, 즐거워 하기는 쉽지 않다. 마리 끌레르는 감옥에 있고 디안은 낙인을 겪을 것이며 마리 끌레르가 미래에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죽고 다치는, 학교나 직장이나 마을을 떠나야 하는 사람은 분명 줄어들겠지만 그것이 고통의 총량이 줄어듦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남은 과제는 산적해 있고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전과는 다른 지반에서 전과는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등장할―전까지는 인지되지 않았던―고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는다. 필요한 일을 한다. 거침 없이 쭉 뻗지 못하고 나선형으로 빙빙 돌게 될지라도 그렇다. 마지막 장면은 마리 끌레르의 진료실이다. (디안 역의 강주희가 사무원 자리에 앉아 있지만 이 장면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것 같다. 의사는 자신의 이름이 마리 끌레르라고 말한다.) 이곳의 사무원은 미처 생각지 못한 채 헛구역질을 하는 대신 임신 테스터를 들여다 보고 있다. 아마도 첫 장면의 진료실과는 다른 곳, 다른 시대일 것이다. 첫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여자’(마찬가지로 백혜경 분)가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이름을 밝히지 않고서 진료를 요청한다. 진료실에 들어서고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다. 이 진료실에서도 또 무언가가 벌어질 것이다. 좋은 미래든 나쁜 미래든, 희망도 절망도 없이 겪어야 할―그러나 그저 떠밀리는 것은 아닐.

*** 나선상의 과거와 미래

마지막 장면의 마리 끌레르는 열여섯 마리 끌레르의 나중일까. 두 마리 끌레르는 물론 별개의 인물이다. 나이도 사회경제적 지위도 다른―미셸 끌레르는 집을 나가버린, 양육비를 대지 않는 남편 없이, 운 좋게 구한 일자리와 부업으로 버는 빠듯한 돈으로 마리 끌레르를 비롯한 네 아이를 기르고 있다. 그 역시 임신중지를 원했으나 가능한 곳을 찾지 못한 인물이자 이번 역시 자신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한 비용을 요구하는 병원들을 돈 끝에 의사 마리 끌레르를 찾았다―상황에서 서로를 만난다. 둘의 이름이 같음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사이의 고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녀 마리”[7]이 글에서 어린 마리 끌레르 등으로 칭한 배역의, 공연 팸플릿에 적혀 있는 명칭이다. 의사 마리 끌레르는 “마리 끌레르”로 기재되어 있다.를 의사 마리 끌레르의 (아마도 과거이자) 다음 세대로, 미래로 제시하는 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다음 세대에게 과제를 남기는 것은 물론 희망을 거는 일을 (종종, 다음 세대를 ‘위한’ 지금 세대의 무언가를 말하는 것 역시도―그러니까 ‘지금’은 주변에 놓이는 ‘다음’을 말하는 것을, 그리고 아주 약간이라 할지라도 그런 낌새를 갖는 모든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이 극을 보면서도 그랬다.[8]초반에는 진료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개인들만이 등장하는 것에도 약간의 의심을 품으며 보았다. 의사 마리 끌레르의 나중일 수도 전혀 다른 마리 끌레르일 수도 있는, 어린 마리 끌레르의 미래라 할지라도 어쩌면 과거와 전혀 다른 바 없을 곳일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경계심을 풀었다. 나선상의 과거와 미래는 과제와 유산을 상속하며 나아가는―실상은 희망을 가질 만하지 않음에도 유증하고 계승한다는 사실만으로 거짓 희망을 상정하곤 하는―시간과는 아마 다를 것이다.

References
1 여기에 간접인용한 설명과 다음 문장의 직접인용문은 모두 공연 홍보물에서 가져온 것이다.
2 27일 공연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은 이 대목에서 객석에 조명을 밝힌 것이 자신 역시 그 역사를 함께 한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연출은 실은 무대를 최대한으로 밝혔을 뿐이라고 설명하면서도, 그 장면에서 조명에 대해서든 함께 함에 대해서든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관객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그보다 한두 줄 뒤에 앉은 탓인지 나로서는 조명이 켜졌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저런 감상이 자연스러운 극이다. (이후의 각주에서 언급하는 연출이나 배우, 관객들의 발언은 모두 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들은 것이다.)
3 이 극은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낸 몇 달 후, 아직 효력을 잃지 않은 형법 낙태죄 조항의 향방을 아마도 자신 있게 예측할 수는 없었던―낙태죄 폐지 자체에 대해서조차도 긴장을 조금도 늦출 수 없었던―시점인 2019년 늦가을에 초연되었고 당시의 첫 장면은 이것과는 달랐다. 초연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연출의 설명에 따르면 마리 끌레르의 전사前史를 다룬 1막이 사라졌고 나머지 두 막 역시 흐름은 유지했지만 모든 대목을 새로 썼다고 한다. 이번 공연은 시한이 되어 낙태죄 조항이 공식적으로 삭제된, 달리 말하자면 몇 번의 부정적인 (낙태죄를 유지하는) 개정 시도를 막아낸 후 무대에 오른 것이므로, 관객 역시 초연 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보았을 것이다.
4 이 모든 사건은 이렇다 할 전조 없이 갑작스레 찾아 온다. 68 혁명 시위를 표현한 효과음―구호를 외치는 소리와 함께 나온, 갑자기 음량이 높아졌던 듯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북소리 같은 무언가―과 디안의 헛구역질이 겹치는 한 장면도 그렇게 읽혔다. 저 소리는 어쩌면―디안이 일반적인 주수에 입덧을 했다고 가정하면, 그리고 태내의 발생 과정이 일반적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가정하면―기구를 쓴다면 몇 주 전쯤 들을 수 있었을 심박음 혹은 아직은 아마 느껴지지 않을 태동을 연상시키기도 할 것이다.
5 변승록은 배역의 이런 특성 덕에 연기가 어렵지 않았다고 말한다.
6 다른 이들의 면회도 묘사된다. 관객들은 항소하자는 다른 인물들의 말에 마리 끌레르가 분명히 답하지 않는 것, 디안이 마리 끌레르에게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 곁에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 등을 인상적인 대목으로 꼽았다. 이에 더해 내게 기억에 남은 것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의사 마리 끌레르에게 디안이 던지는 핀잔 섞인 걱정의 말이다. 여기서 디안은 마리 끌레르의 (여전한) 친구로, 시몬 뿐 아니라 알랭을 언급한다 (알리미를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문장의 문맥 뿐 아니라 극 전체의 맥락에서도 알랭이 더 적절하다고 느끼므로 따로 확인하지는 않기로 했다).
7 이 글에서 어린 마리 끌레르 등으로 칭한 배역의, 공연 팸플릿에 적혀 있는 명칭이다. 의사 마리 끌레르는 “마리 끌레르”로 기재되어 있다.
8 초반에는 진료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개인들만이 등장하는 것에도 약간의 의심을 품으며 보았다.

One thought on “희망도 절망도 없이, 344명

  1. 셰어뉴스레터 2021년 2월호 뉴스 브리핑 코너에 낙태죄 폐지 이후의 최근 동향이 소개되어 있다. (오늘 공개됐지만 며칠 전에 작성한 것이라 뉴스레터에 링크된 기사에는 미프진 수입시판을 준비 중인 제약사의 이름이나 자세한 현황이 밝혀져 있지 않은데, “현대약품은 영국 제약사 라인파마 인터네셔널(Linepharma International)과 경구용 임신중단약물의 국내 판권 및 독점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오늘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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