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과 ‘이정식’과 나무(좌)와 나무(우)

이정식.

제목만 놓고 보자면 아주 튄다. 아무것도 아니거나 아무것도 없음(《nothing》, 서울: 레이져, 2017.12.01.-14.)과 이름도 얼굴 없음(《김무명 Faceless》, 대전: 구석으로부터, 2018.09.01.-21.)의 뒤를 이어 갑자기 나온 구체적인 이름, 그것도 작가 자신의 이름. 이정식의 세 번째 개인전(유은순 기획, 서울: d/p, 2020.10.13.-11.14.)에는 《이정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1“대개 작가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회고전 혹은 전시 제목이 없는 경우 대체 제목으로 작가 이름을 제목에 사용”하지만 “이 전시는 2015년부터 작업을 시작한 작가의 때 이른 회고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땅한 제목을 찾지 못한 것도 아니다. 이 전시는 제목 그대로 ‘이정식’에 관한 전시이다.”2

소재는 익숙하다. “혈액을 매개로 전염되는 질병인데 일종의 성병이기도 [한]” “내 병”.3 앞의 개인전들과 마찬가지로 HIV/AIDS 감염인의 삶에 대한 작업들이다. 다만 이때의 ‘나’는 이정식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인 미키Miki다. 이 말은 이정식의 것이 아닌 목소리로 발화된다. 헤드폰을 통해 ‘나’의 말을 내보내는 두 개의 모니터 맞은편에는 익명의 감염인들과 인터뷰한 작업을 토대로 만든 영상이 투사되고 있다.4 《nothing》 때에 비하자면 이정식이라는 개인은 오히려 훨씬 덜 적극적으로 내세워진다. (그 전시에서의 ‘나’라는 화자가 내가 믿은 대로 이정식 자신일 경우의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당시에 그렇게 믿었는지, 전시 정보 어딘가에 무언가 단서가 적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별 근거 없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 물론 당사자성을 가진 이가 그 당사자성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자기’ 이야기라고 함부로 믿는 것은 종종 큰 실수다.) 여기서 그는 다만 열한 개의 푸른 얼굴로만 존재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듣지 않으며 아무 데로도 시선을 보내지 않는, 내밀 손은 애초에 없는―이정식의 얼굴을 모르는 관객으로서는 실제의 얼굴을 닮기나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스티로폼 머리들로.5

그러므로 여기서 이정식이라는 이름은 유은순이 저 머리들을 가리켜 쓴 대로 “빈 기표”다. 이것이 지시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어떤 자리다. 공포의 대상으로서든 혐오의 대상으로서든의 HIV/AIDS로는 차지 않는, 혹은 그것에 내어줄 수 없는 어떤 자리. 그렇다면 이것은 신원을 숨기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그 삶이 존재했던 자리만큼은 표시하기 위해 쓰였던 ‘김무명’과 아주 다르지만은 않은 이름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겨우 표시하는 닫힌 기표와 같을 수는 없다. 비었으면서도 열려 있는 기표. 사소하기 그지없는―그러므로 대개는 밝혀지지 않을 것까지를 포함해―내용으로 가득할 자리, 또한 타인의 삶과 이야기가 드나들 자리로서의 기표. 이정식에 관한 전시가 아니라 “‘이정식’에 관한 전시”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미키.

〈오, 미키〉를 가장 유심히 보았다. 상영 시간 내내 헤드폰 두 개를 다 귀에 대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음원은 하나다. 예의 ‘나’가 무언가를 말한다. “성병의 일종인 만성 전염병”―앞에 인용한 것과 이것을 비롯해, 이 병은 이런 식으로 몇 번인가 건조하거나 차갑게 언급된다―에 걸린 사람이다.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기도 하다. 건강이 상해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원가족을 찾아가지만 병명을 밝힐 것도 없이 냉대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화면은 두 개다. 한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친다. 잠깐은 거의 같은 상반신 정면들이다. 언젠가는 앞모습과 뒷모습. 언젠가는 줌을 당기고 민 뒷모습. 또 언젠가는 춤추듯 움직이는 하반신과 앉은 상반신. 또 언젠가는 좌반신과 우반신. 때로 입을 벙긋거리지만 음성과 맞지는 않다. 애초에 화면에 비친 몸의 주인과 헤드폰에서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다. (혹은 그 몸과 이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다.)

처음은 두 개의 협탁이다. 배경도 놓인 위치도 그림자의 방향도 같다. 하나의 영상을 복제한 것인지 두 번 촬영한 것인지 혹은 길게 촬영해 앞뒤로 나눈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보면서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으므로 동영상조차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는 같은 공간에서 바닥은 아닌 어딘가에 앉은 예의 몸이 등장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협탁이 아니라 의자였던 모양이다.) 소매가 없고 등이 파인 검은 치마를 입은 머리를 동여맨 사람의 앞모습과 뒷모습. 몸통 너머로 보이지 않을 작은 카메라가 있다면 동시에 촬영할 수도 있을 만한 장면이다. 아직 시차時差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윽고 두 화면은 앵글이 달라졌다 같아졌다를 오가며 변한다. 같은 앵글일 때도 두 몸의 동작은 때로는 조금씩, 때로는 꽤 많이 다르다. 시차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시간에 속한 둘은 그러나 여전히 같은 몸이다. (그렇게 보인다.)6 왼쪽 화면에 좌반신, 오른쪽 화면에 우반신이 비치는 동안에는, 솟고 떨어지는 시간이 엇갈리는 때에조차도, 하나의 몸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입과 소리가 어긋나지만, 계속해서 나는 이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

〈김무명〉에 서술되는 이야기들에는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라는 표지가, 〈오, 미키〉의 것에는 이은주라는 이의 소설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김무명〉은 구석구석 세심하게 만들었거나 찾은 배경에서 벌어지는 보다 재현적인 연기들―허전한 공간을 걷거나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 혹은 투명인간이 된 듯 아무도 듣거나 보아주지 않는 파티 참석자, 까맣게 지워진 가족사진 같은 것들―을 비추고 〈오, 미키〉는 그 자체로 해석의 대상은 아닐 몸짓들을 비춘다. 〈김무명〉이 무명이라는 허사虛辭 너머의 구체적인 자리들을 떠오르게 할 때 〈오, 미키〉는 여럿의 삶이 오갈, 그러므로 가물하고 아득한, 그러나 때가 맞아들면 언제라도 선명해질 자리들을 생각하게 한다. 미키의 이야기가 김무명의 이야기보다 사소하거나 가벼웠을까, 음색만이 기억날 뿐이다.

사로잡은 것은 마지막의 앙상한 나무다. 밑둥 어딘가부터만 보였지만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앉아 있던 곳과 같은 데라면―일단은 그래 보인다―그 아래엔 화분이 있을 것이다. 두 화면이 같은 나무를 보여준다. 아니, 나무가 아니라 나무들일까. 같은 나무라면 앞뒤로 돌려 찍은 것일 테다. (앵글과 나무의 굵기를 생각하면 동시에 앞뒤를 찍은 것 같지는 않다.) 같아 보이는 가지들이 거울에 비춘 듯 반대 방향으로 뻗어 있다. 다시 한 번 보고 눈치 챈다. 가지는 같아 보이지만 잎은 한쪽이 좀 더 많다. 잎의 크기들 역시 다르므로 이 사이에는 분명한 시차가 있을 것이다. (잎을 뜯어내는 것만으로 만들어질 차이는 아니어 보인다.) 그렇다면 가지들 역시 실은 다를 것이다. 아무리 느리게라도, 잎이 늘고 넓어지는 동안 가지들 역시 길고 굵어졌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같다는 것에 대해. 이정식과 ‘이정식’과 이은주와 김무명과 열한 개의 머리와 영상으로 혹은 음성으로 이 공간을 채운 여럿과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여럿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그들이 오가고 머문, 오가고 머물, 자리 혹은 자리들에 대해.

  1. 《nothing》을 보고는 「이정식, 신파의 전략」이라는 후기를 썼다. 《김무명 Faceless》은/는 보지 못했고, 기획전 《틱-톡》에서 작업의 일부만을 보았다. 이 전시를 보고는 「순간, 점, 바깥,」을 썼다.
  2. 유은순, 「‘이정식’이라는 메아리」, 전시 리플렛.
  3. 이정식, 〈오, 미키〉, 2채널 비디오, 16분 47초, 2020. 혹은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 후자의 판권면에는 저자로 이은주, 저작권자로 이정식이 올라 있다.
  4. 〈김무명〉, 1채널 비디오, 30분 54초, 2020. “작가는 두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출판물 『김무명』을 기반으로 영상작품을 제작한다. 책 『김무명』은 인터뷰 당사자가 아닌 작가와 네 명의 배우들에 의해 낭독되며, HIV/AIDS 감염 사실을 알게 된 후의 고립감, 관계의 재정립에 관한 고민과 불안함이 담겨 있다.”(유은순, 같은 글.)
  5. 〈이정식11〉, 스티로폼‧우레탄도료, 각 22×25×33(cm), 2020. “〈이정식11〉은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여러 라인 중 악세사리 라인 넘버가 11인 것에 착안하여 11개의 작가 두상을 제작한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실존적 삶을 미술로 재현하는 상황과 미술계에서 자신이 소비되는 방식을 고민한다. 정체성에 관한 작업은 그가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때로는 단편적인 이해에 그치기도 했다.”(유은순, 같은 글.) 한편 이것은 유일하게 현장에 판매 안내문이 걸려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열한 개의 두상은 열한 권의 『오, 미키』와 짝을 이루어 각자 팔려나갈 수 있다.
  6. 서로 닮은 두 사람이 두 화면 각각에 등장했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시간에 속한 몸들이 여전히 ‘같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관한, 습관적인 유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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