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점, 바깥,

《틱-톡》은 만성질환자 혹은 아픈 사람이 처한 상태에 주목하고, 건강한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스테레오타입에 질문을 던지는 전시이다. 전시제목 ‘틱-톡 Tic-Tock’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불규칙적인 근육의 움직임을 보이거나 비자발적으로 소리를 내는 틱(Tic) 장애와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Tick-Tock)를 합친 것으로, 한 개인이 고통 받는 몸, 비정상적인 몸 상태에 의해 스스로 아픔을 자각하는 상태를 뜻한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끊임없이 째깍거리는 시계소리처럼 매 순간 자기 자신에게 닥쳐오는 실존의 상태로서 질병을 의미한다. 전시는 돌봄을 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아픔을 삶의 조건으로 수용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신체의 컨디션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아픈 사람의 경험을 다룸으로써 ‘정상적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1

전시를 홍보하는 온라인 게시물에 적혀 있던 이 정도만을 알고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에 더해, 달포 전에 우연히 만난 이정식에게서 들은 간략한 작업 소개가 내가 가진 정보의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퍼포먼스 ― 뒤늦게 본 전시 소개 전문의 문장을 빌자면 “전시 기간 동안 전시장에 찾아와 약을 섭취하거나 섭취하지 않는 행위를 선택하고 이를 영상으로 남기는 퍼포먼스, 영상 작업” ― 계획을 이야기했으므로, 처음에는 공연 시간대를 찾아 보았다. 어쩌면 다행히, 찾아내기 전에 멈추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보는 것’을 통해 내가 할 수 있게 되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 굳이 애써서 시간을 맞추어 가지는 않기로 했다.

보기 ― 나의, 시간. 공간. 순간. 점.

그리 하여 아무 날 아무 시에 찾아간 전시장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차분히 기다리세요”, “당신이 호명될 때까지”, “명단에 당신의 이름이 없습니다” 정도로 옮길 수 있을 영어 문구 세 개가 반복적으로 뜨는 모니터다.2다. “당신이 호명될 때까지 명단에 당신의 이름이 없습니다”와 같은 식으로 이상하게 ― 혹은 절망적으로 ― 연결되어 뜨기도 한다. 수이 낫지 않는 증상으로 병원에 오랜 기간 다녀야 했던 기억.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차례로 사람들이 호명된다(혹은 이름들이 모니터에 표시된다). 언젠가 나의 이름도 불릴(표시될) 것이다. 그러나 수이 낫지 않으므로, 완치자의 명단에 나의 이름은 오르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히 대기 명단에만 있는 이름, 그러므로 명단에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이름. 낫고 싶은 욕망, 이 없었다면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을까. 불리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면.

모니터 옆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다른 영상3이 재생되는 방이 있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방을 채운다. 승용차 운전석에서의 시야 위로 “요오오오야아아앙원” 같은(정확하지 않다) 자막이 뜨고,4 스피커에서는 앞 음절들의 모음을 길게 늘여 “sanatorium”을 발음하는 음성이 흘러 나온다. 요양소에서 생활하는 젊은 환자를 알지 못하는 나는, 가족이 아닌 이를 만나려 구태여 먼 교외의 요양원을 찾아가는 경험을 해 본 바 없는 나는, 할머니를 문안 가는 손녀 따위를 생각한다. “안녕, 엄마” 같은 말을 들은 시점에서는 어쩌면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의 딸을 상상했을 것이다. 아마도 실은 “모든 것이 빙빙 돈다”고 말하는 주인공 자신의 이야기다. 1인칭 시점의 운전석 장면이 넘어가면 트랙을 달리는 레이싱카, 경주장 스탠드에서 줄넘기를 하는 사람, 베란다에 설치한 모형 트랙을 달리는 ― 느리게, 오르막에서는 힘이 부쳐 잠시 멈추며 ― 미니카와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 이불을 덮어 쓴 채 침대에 엎드려 내민 발만 움직이는 사람 같은 것들이 비친다. 목소리는 “시간이 흐르려면 무언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병증이 이어지고 희망이 옅어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아마도 시간은 흐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다르게 흐를 것이다. 빙빙 도는 트랙에서는 랩 타입이라도 재지, 아픈 이에게는 종종 그조차도 없다.

물론 랩 타임 측정조차 없다는 말은 과장이다. 혹은, 랩 타입을 측정하면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기만이다. 옆에는 이정식의 방이 있다. 이전의 전시들에서도 선보였던 작업 ― 예를 들면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먹거나 거른 것을 날짜, 시간, 그리고 빈칸으로 기록해 둔 작은 화판 같은 것 ― 몇 점과 아마도 이번 전시의 기록을 겸하는 소형 즉석 사진 몇 장이 벽에 걸려 있고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있다. 나무판 위에 가로세로 줄을 맞추어 놓아 둔 알약들과 한쪽으로는 물컵, 다른 한쪽으로는 모래시계가 놓여 있는 테이블이다. 그 앞에 누워 있는 모니터에는 이 전시 기간에 속하는 날짜가 뜨고 아마도 그 날의 퍼포먼스 장면이 재생된다.5 내가 보지 않은, 약을 먹거나 먹지 않는 퍼포먼스. 치료든 관리든이 가능한 병이라면, 그리고 그 치료든 관리든을 하기로 맘 먹었다면, 적어도 약을 먹거나 먹지 않는 (혹은 다른 치료를 받거나 받지 않는) 선택의 순간이 주기적으로 찾아 온다. 이것의 랩 타임을 기록할 수 있다면 시간은 흐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약을 먹는 일 자체가 어떤 적극성을 요하는 일이므로, 그리고 약을 먹는 것은 다른 어떤 적극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어 줄 것이므로. 물론 늘 그렇지는 않다. 꽤 오랜 기간 약을 먹어야 했던 적이 있다. 중병은 아니었으므로 약을 먹지 않아도 기초적인 일상은 수행할 수 있었다. 약효가 크지는 않았으므로 약을 먹어도 여전히 큰 에너지가 필요한 일은 쉽게 해내지 못했다. 식사를 해야 한다든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든가 혹은 약을 들고 다녀야 한다든가 하는 제약이 있었으므로 꼬박꼬박 먹지는 못했다. 그 시기의 어느 날 일기에는 “먹은 약이 희망인지 남은 약이 희망인지”라고 썼다. 병증이, 그리고 약이 생활을 제약했고 나는 그다지 나아가지 못했다. 티나지 않는 약을 애써 챙겨 먹는 것보다, 차라리 먹지 않는 것이 힘찬 일인 시기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힘을 앗아가는 일이었지만. 시간을 조금이나마 흐르게 하기 위해, 시간을 멈출 각오를 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순간이 무한히 이어진다. 그리고 또한, 공간이 사라지고 점만이 남는다. 2층에 전시된 HIV 감염인들의 수기는 그것을 말해 준다.6 관계를 잃고 자리를 잃는 일. 운신의 폭을 점차로 좁혀야 하는 일. 이어온 삶의 터전을 떠나 요양을 위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요양에 용이한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일. 모두에게 주어지지는 않은 몇 가지 이유로 여전할 수 있는 소수만이 곁에 남게 되는 일. 그 글들을 읽다 보면 공간 한쪽에서 갑자기 쇠소리가 크게 울린다.7 읽고 있던 문장들, 흘려 듣던 희미한 자동차 소리 같은 것들이 일순간 사라진다. 시간이 멈추고 주변이 사라지며 나라는 작은 점만이 남는다, 무척이나 선명하게. 가라앉았던 증세 ― 통증을 비롯한 어떤 감각이거나, 혹은 어떤 심상이나 사고이거나 ― 가 갑작스레 치고 올라오는 그 순간.

읽기 ― 순간과 점의 바깥에 대하여

아픔이나 괴로움, 혹은 외로움을 담은 사연들 앞에서 쇳소리를 듣는다. 일순 아득해졌다가 정신을 차리려는데 뒤에서 어울리지 않게 우렁한 기합소리가 들려온다. 매일, 혹은 종종 반복될 어느 인물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다. 아마도 노령의 가족을 부양하는 젊은 경비원. 출퇴근을 하고 순찰을 돌고 CCTV 영상을 주시한다. 요양서비스 제공 기관이나 요양보호사와 통화하며 필요한 지원을 조율한다. 이론부터 방패술까지, 경비 교육을 받는 인물들 ― 기합소리의 주인공들 ― 의 모습이 교차된다(낯선 이들의 얼굴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나는, 교육 받는 사람들 사이에 주인공이 끼어 있는지 어떤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8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곁에 (아마도 스스로 또한 이미 지친) 돌보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높게는 절반쯤의 확률로 관람객의 동선 마지막에 위치할9 작업이므로 다소 뜨악하게 느껴졌다. 아픈 사람의 곁에서 함께 아파지는 사람, 이라는 꺼림칙한 전개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경비 교육의 이론 수업 장면 덕분이다. 화면 밖의 강사가 말하고 몇 명의 수강자가 듣는다. 첨단 경비 시스템은 초기 설치 비용이 많이 들지만 유지비가 적어 결과적으로 효율적이라는 말. 이 교육을 거쳐 당신들이 가고자 하는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 것이라는 말이 이어질 테다. 누군가를 지키고 돌보는 일은 자신을 돌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게 되리라는 말, 혹은 당신들과 다른 모두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말.

아픈 사람은 종종, 자신의 아픔을 발화하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아프다고 말할 뿐 어떻게 아프며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하지 못함으로써 ― 그리 할 수 있는 이름이나 기회, 혹은 자격을 얻지 못함으로써 ― 더 아프게 되곤 한다. 통증으로 환원되지 않는 병의 서사를 전시장에 펼쳐 놓는 일은 그러한 아픔을 더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 자연스레 ‘곁’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작업 너머 누군가의 삶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 구체적인 개개인의 삶에 자신의 삶을 내어주게 되는 것은 아니다. 힘과 선의를 가진 누군가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지만, 오래지 않아 지칠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또 한 명이 지치고 마는 끝을 피하는 데에,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자기를 돌보는 일과 타인을 돌보는 일의 구분을 뒤트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을 돌본다. 누구나 타인을 돌본다. 스스로는 약을 챙겨 먹을 수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약을 사주거나 물을 떠다 주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픔도 돌봄도 개인의 힘이나 의지 같은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돌아 나오면서 HIV 감염인들의 이야기를 다시 보다 문득 떠올린다. 아프지 않을 때조차도10 외로웠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지만 그들의 글씨는 아니다. 그들의 친구나 가족 혹은 동료 같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곁에 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쓴 사람들이 있었다.11 어느 개인을 돌보는 개인이 아니라,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관계망, 같은 희미한 상상을 조금 해 본다. 언제나 그렇듯, 아주 조금.12

나가기

오르는 길에는 슬쩍만 보았던 사진 몇 점을 다시 훑으며 내려온다.13 이정식의 퍼포먼스가 곧 끝날 참이다, 라고 입구참에 서 있던 이에게 들었다. 끝내 보지 않은 그 퍼포먼스에서 이정식이 먹었거나 먹지 않은 것은 아마도 항레트로바이러스제, 그러니까 항레트로바이러스에 속하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작용을 억제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의 발현을 막는 약이다. (〈nothing〉의 작업 시기와 같은 약이라면, 스트리빌드.) 여전히 상용화된 완치법은 없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까지만 해도 여러 약을 섞고 종종 배합을 바꾸어 가며 꾸준히 먹어야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던 HIV는 이제 ‘하루 한 알로 관리’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야 지극히 낮았지만 그럼에도 먹은 약과 남은 약을 셈하며 희망 나부랭이를 주억거려야 했던 나는 또 한 번, 병의 관리를 위해 나를 관리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자유 따위를 생각한다. 나의 병증을, 그리고 내가 종종 약을 거른다는 사실을 알았던 이들은 이따금 약을 잘 챙겨 먹으라고 보채곤 했다. 물론 순전히 걱정하는 마음으로 한 말이다.

‘HIV 감염은 더 이상 죽음의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는,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만성 질환 같은 것이 되었다.’ 아마도 적지 않은 감염인들에게 희망일 것이며 HIV/AIDS에 대한 사회적 혐오와 공포를 줄이는 데에 큰 힘이 될 이 말에는 종종 ‘당뇨와 마찬가지로’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당뇨에 대해 아는 바는 많지 않지만 당뇨를 앓는 이들이 순간 쾌락을 위해 미래의 건강을 포기하는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는 사람들, 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당뇨라는 것이 살찐 내가 (일상적인 관계를 조금만 벗어난다면, 예를 들어 의사 앞에 앉는다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을 경고의 단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당당한 장애(Disability Pride)’ 앞에서 당뇨약을 건넬 수 있을까” 하고 자문했던 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결국 ‘당뇨를 예방’해야 한다는 당위는, (당뇨에 수반되는 피로 등의 증상들을 논외로 하면) ‘장애를 예방’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라고도 썼다.14 대개의 병은 아프거나 불편하므로, 대개의 장애 또한 마찬가지이므로, 예방하거나 관리하거나 치료해서 나쁠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건강을 향한 욕망이나 선택이, 과연 내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너무나도 자주 건강은 의무로서 제시된다. 그 건강이란 매우 좁은 것이어서, 사지가 얼마나 유연하게 움직이고 큰 힘을 낼 수 있는지, 혈압은 얼마이고 혈액 성분은 어떠한지 따위로 정의될 뿐 지금 나의 안녕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해주지 않는다.15 약을 먹지 않는 선택, 같은 것은 환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잘못일 뿐이므로, 그것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것이다. 이따금, 혹은 종종, 자유를 잃고 얻어야 하는 건강에 대해 생각한다.

  1. 유은순 기획, 《틱-톡 Tic-Tock》, 서울: 온수공간, 2019.08.15-31. 이하에서 전시 및 작품에 대한 설명은 모두 유은순의 전시 서문 「자가진단: 포지티브」에서 인용.
  2. 장서영, 〈Keep Calm and Wait〉.
  3. 장서영, 〈스핀-오프〉. 스핀-오프는 파생효과나 파생상품, 혹은 파생된 스토리를 중심으로 하는 속편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자 노이로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4. 이 단락의 나머지 인용도 모두 정확하지 않다. 영어 음성을 들으며 한국어 자막을 보았고 일부만을 기록하거나 기억했다.
  5. 이정식, 〈nothing〉 및 〈ox〉. 전자는 2017년의 개인전 《nothing》(서울: 플레이스 막, 2017.12.01-14.)에서 공개된 바 있다. 이 전시를 보고는 「이정식, 신파의 전략」이라는 글을 썼다.
  6. 이정식, 〈김무명〉.
  7. 홍기원, 〈변주곡 1-1〉.
  8. 차재민, 〈보초 서는 사람〉.
  9. 어느 방향부터 관람하라는 표시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끝에 서면 오른쪽에는 〈변주곡 1-1〉이 있는 방의 입구가 있고 그 방 안에는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왼쪽으로 열려 있는 공간을 〈김무명〉이 채우고 있고, 그것을 지나면 있는 문을 들어서면 〈보초 서는 사람〉이 보인다. 나는 〈변주곡 1-1〉을 흘깃 본 후 〈김무명〉을 보았고 다음으로 〈변주곡 1-1〉을 자세히 보고 3층에 다녀온 후 〈보초 서는 사람〉을 보았다.
  10. 굳이 특정해 말하자면, HIV에 감염되었을 뿐 면역력 저하로 인한 추가적인 감염에 이르지 않았을 때조차도.
  11. 이것을 아는 것은 〈김무명〉 연작이 2018년의 개인전 《김무명 〈faceless〉》(대전: 구석으로부터, 2018.09.01-21.)에서 먼저 공개된 적이 있는 덕분이다. 전시는 보지 못했고, 작업의 일환이자 도록으로 제작된 동명의 책을 받아 보았다.
  12. 사회를 이야기하려면 아마도 (정희승의 작업 또한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홍기원의 〈변주곡 1-1〉을 좀 더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게는 고통의 순간을 알리는 공소리였지만, 소리를 내는 금속부는 사실 기수騎手의 채찍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옆에서 대화하던 낯선 관객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경기를 위해 혹독한 관리와 훈련을 받다가 작은 부상만으로도 폐사되는 경주마의 운명”과 “사회의 치열한 경쟁과 그 속에서 언제 낙오될지 모르는 개인의 불안”을 병치하는 조합이다. 하지만 ― 뒤늦게 읽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작업을 보며 소리로만 들어서일까 ― 내게 그 소리는 여전히 통증의 소리다.
  13. 1층에 뚫린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의 시야 한켠에,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는 길목에, 그리고 3층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 전체 공간을 통과하며 정희승의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 제 2부〉 연작이 여러 점 붙어 있다. 기획자는 이 작업을 이렇게 소개한다. “재작년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2007년 폐쇄된 광주국군병원을 촬영하길 요청받았다. 2018년이라는 시점에 1980년 5월의 광주를 2007년부터 방치되어 폐허가 된 장소에서 찾는 일은 녹록치 않았고, 작가는 역사적 사건과 좁힐 수 없는 간격을 실감한다. 그리고 1년 뒤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돌이켜보며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사진의 디테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작가는 사진의 일부를 크롭하거나 확대하여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 제 2부」를 제작한다. 작업은 공유 불가능한 경험과 보는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동시에 온수공간 내부와 작품과 작품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에 개입한다.” 앞에서 작가와 제목을 모두 주석에 배치하고 본문에서는 그저 묘사하기만 한 것은 이미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 이정식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아무것도 모르고 보았기 때문이다. 작품 설명은 물론 제목이나 작가 이름까지도 모두 작품을 본 후에 (대부분은 아예 전시를 다 본 후에) 뒤늦게 보았고 이 작업 역시 정보 없이 보았다. 병이나 장애 같은 것을 주제로 한 전시에 걸린 낡은 건물 사진이 풍기는 모종의 뉘앙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특별히 어떤 느낌이나 생각에 닿지 않았다. 전시장에서 겪지 못하고 넘긴 것을 뒤늦게 굳이 얽을 일은 아니므로 그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14. 유기훈, 〈당뇨병과 장애학 : 질병과 장애 정체성, 그리고 의학〉, 《비마이너》, 2018.08.22.
  15. 여기서 “안녕”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흔히 인용되지만 대개는 무력한, “건강health이란 단지 질병disease이 없거나 허약infirm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well-being한 상태”라는 WHO의 정의를 의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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