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아니면 가난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나. 티브이 없이 사니까, 이따금 본 드라마는 (출신 배경이야 어쨌건) 소위 전문직의 세계가 주인공이거나 했으니까, 잘 모르겠다. (60년대라든가를 배경으로 한 것 몇을 제하면) 《서울의 달》(MBC, 1994) 같은 걸 자료 화면으로 조금 봤고 《한지붕 세 가족》(MBC, 1986-1994)이나 《파랑새는 있다》(KBS, 1997) 같은 걸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아주 희미하게. 그러므로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건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장기하 작사·작곡, 2008) 정도다. 기억은 역시나 희미하므로 길게 말하거나 무언가를 비교하거나 할 수는 없지만, 가사를 쓴 장기하 자신은 그런 집 ― “축축한 이불”과 “삐걱대는 문”이 있는,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집 ― 에 살아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놀라워 했던 걸 보면 그 노래를 들으며 특별히 불쾌함을 느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차피 단편적인 이미지였다.
보통은 떠오르는 말들을 다 쓴 후에 성의 없이 붙인다. 제목 말이다. 무엇에 관하여, 무엇에 대하여 따위의 것들이거나 혹은 본문에 쓴 단어 몇 개를 적당히 늘어 놓은 것이거나. 떠오르는 말들이란 대개 문장이고, 단어나 구를 떠올리는 일은 잘 없는 탓이다. “진정성이라는 기생충”, 그러나 오늘은 이 말을 우선 떠올렸다.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가난에 대해선 늘 할 말이 많다. 실은 그렇지 않고, 그저 단돈 몇천 원이 없어 못 해 본 일들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 뿐이지만, 종종 그렇다는 기분이 든다. 피곤하게 사느니 가난하게 살겠다고 마음 먹고는 생기는 돈벌이도 마다하곤 하지만, 풍족함을 겪어보지 못해 욕망하지조차 못하는 것은 아닌가 늘 의심해야 한다. 스스로 택했다고는 해도 가난은 불편하고, 그래서 가난에는 늘 예민해진다. 그래서 쉽게, 잠식당하곤 한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식탁 위를 뛰는 꼽등이, 언제나 몸에 베어 있는 퀴퀴한 냄새, 옆집의 인터넷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 좁은 집을 이리저리 훑는 일, 볕은 제대로 들지 않지만 피하고 싶은 다른 모든 것은 너무도 쉽게 들어오는 지면에 맞닿은 창문,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변기(, 그리고 혹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검은 발바닥).1 미려한 화면으로 비치는 이런 것들은 섬세한 관찰과 날카로운 포착, 같은 말들을 갖다 붙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을 주지만 그 자체로는 이미 흔히 알려진 것들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것들을 묘사하거나 배치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현실감 없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와 버무려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잠식 당했으므로 나는, 궁금해 하고 만다. 늘 의심하고 종종 주저 없이 비난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잠식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스스로를 또한 의심해야만 한다. 결국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진정성을 따져 물으라며 다른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기생충. 이 이야기에서 무언가를 알게 되거나 떠올리게 되지 않는 이유, 이 이야기를 즐길 수 없는 이유 ― 그것이 나의 문제는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기생충.
물론 나의 감정이나 경험을 투사하지 않는 공정한 평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이것을 나를 잠식하는 기생충으로 느끼는 것은, 격앙된 감정으로 거침 없이 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아 머뭇대며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이 그저 부잣집에 숨어 살거나 그들을 속이고 경쟁자를 밀어내며 제 자리를 만든 이 인물들을 가리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다른 무언가에로 (되)돌려질 수 있는 경로를 이 영화가 제공하는가. 저 인물들과 이야기는 가난에 관한 선입견을 형성하지 않고 저들만의 이야기로 남거나 나아가 선입견을 깨고 새로운 무엇가를 만들 수 있는가. ‘순진한 사모님’(연교, 조여정 분)과 이 대책 없는 기생충들이 어떤 대비를 이루는가. 운전기사가 제 고용주인 사업가에게 부부간의 사랑을 묻는 일이 선을 넘는 일인 만큼 저 사업가가 운전기사에게 제 아이의 생일날 상황극 연기를 ‘일의 연장’으로서 요구하는 일이 마찬가지로 선을 넘는 일로 전달되는가. 언제나처럼 뻔히 떠오르는 이런 질문들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영화를 보았다. (나는 많이 멈추었으므로, 가난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기정(박소담 분)이라는 여성 캐릭터의 행동과 죽음이 이 서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충숙(장혜진 분)은 왜 해머를 던지는가, 같은 질문들도 그저 떠올릴 뿐 답할 수 없었다.)
이처럼 나를 갉아 먹는 것은 가난, 혹은 그에 대한 설움이나 억울함 같은 것이 아니다. (물론 가난 또한 종종 나의 양분을 빼돌리는 기생충처럼 굴곤 하지만) 진정성이라는 기생충, 이라고 느꼈다. 나는 종종 진정성을 따져 묻는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저 소재로 소비하려는 것은 아닌지, 클리셰나 편견, 혹은 납작한 이미지 따위의 말들이 어울릴 만한 것들을 뒤섞어 두었을 뿐인 것은 아닌지 따지고 들곤 한다. 창작자의 속이야 알 수 없는 일이고 실은 별 생각 없었거나 악의로 차 있었다고 해도 우연히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지만, 조금 덜 날카롭게 굴면 굳이 통째로 걸러 내지 않고 좋은 점만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리 하려 든다. 아마도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작품 같은 것을 믿지 않는 탓일 테다. 작가의 이름값에, 묘사되거나 지시되는 다른 존재들에 영향을 미치는 작품밖에는 알지 못하는 탓일 테다.
그러므로 진정성이라는 것을 좇지 않을 것도 아닌데, 기생충이라고 느낀다. 나에게 또한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 작품에게서, 혹은 저 작가에게서 진정성을 판별할 만큼 나는 진정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가. 다른 모든 일에서 그러하듯 나는 내가 겪은 것, 혹은 내가 보고 들은 것만을 안다. 그러나 유독 가난에 대해서만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가난이 내가 경험하는 가장 큰 제약이기 때문일 것이다. 억하심정이 있다는 뜻이다. 대개 방에 앉아 글을 쓰고, 밖에서도 멀리서 관찰만 하며 지내므로 나는 부유한다. 크게 건강하지 않아도 문장을 떠올리고 타이핑을 할 수는 있다. 마주 앉아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외모도 음성도 중요하지 않다. 달리 책임져야 할 이름이 없으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아무런 제약도 없는 체, 자유로이 떠도는 체,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한 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은 오늘도 밥벌이를 해야 하고, 가끔 말을 삼켜야 한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지만 그렇다고 다 내려 놓을 수는 없으므로 나쁘지 않은 일을 골라야 하고 때로는 나쁜 일을 나쁘지 않다고 속여야 한다. 다행히 적게 일해도 죽지 않을 만큼은 벌 수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이 멀지는 않으므로, 내가 버는 동안 벌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만다. 또한 수시로 치고 드는, 이렇게 부유하며 사는 것이, 실은 가난하여 아무데도 가닿지 못하는 탓은 아닌지 하는 의문에 (어쩌면 거짓으로) 답해야 한다.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난을 모른다고 믿는 것. 집은 없지만, 오늘 일하지 않으면 내일 굶어야 하지만, 다행히 다른 것은 가졌다고, 그리하여 오늘 일할 수만 있다면 모레쯤까지는 굶지 않을 수 있다고,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있지 않으므로 나는 가난을 알지 못한다고, 여전히 자유로운 체 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예의가 아니다. 다른 이의 삶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일 따위가 아니다, 라는 말이 아니다. 무례하다는 뜻이다. 어차피 모르는 가운데 안다고 믿으며, 또한 아직은 모르지만 알 수 있으리라 믿으며 산다. 그러면서도 이것 하나만큼은 알 수 없으리라고 믿는 것, 그것은 무례한 일이다.
- 봉준호·한진원 각본, 봉준호 연출, 《기생충》, 2019. ↩
물론 그럭저럭 자주,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고 생각한다.
모리의 글, 〈눈물이 나타났다〉를 읽었다.
오늘은 손희정의 〈봉준호의 영화들에서 보여진 여성 이미지 재현의 문제에 대하여 <기생충>을 중심으로〉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