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흐르는 시간

주인공의 마음, 혹은 이 영화를 만든 이의 마음,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주인공의 성별과 나잇대 정도를 짐작했을 뿐 애초에 다른 정보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친구들이 좋아하는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보기로 했다. 이 영화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조차 듣지 않았고, 그저 좋았다는 말만 들었다. 보기로 결정했지만 아직 예매를 하지는 않았던 어느 날, 모르는 이가 남긴, 이 이야기가 자신의 유년기처럼 느껴졌다는 감상과 그가 인용한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원형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는 감독의 말을 보았다. 잡지 인터뷰에서 인용한 것이었지만 기사를 읽어보지는 않았다.1 ‘시가 역사보다 보편적이다’라는, 배운 적 있지만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 그러므로 멋대로 생각하곤 하는 문장을 떠올렸다.2 그러나 이 이야기가 나의 유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으므로 원형이나 보편 같은 것을 생각하지는 못했다.3 이야기의 끝에 눈물이 나지는 않았으므로, 아마도 친구들의 마음 또한 알지 못한다. 주인공의 마음, 혹은 이 영화를 만든 이의 마음 역시도 아마 알지 못한다.

오빠에게 맞아본 적이 없어서, 바이섹슈얼이 아니라서, 성수대교 붕괴로 가까운 이가 죽지 않아서, ‘날나리’ 급우를 두 명씩 적어 내라는 담임과 한 해를 보내지 않아서, 혹은 높임말로 자기소개를 하고 난데 없는 민중가요를 부르는 학원 강사를 만나보지 않아서, 주인공의 유년이 나의 유년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씩 떼어 놓고 보자면 비슷한 경험들, 자의적으로나마 겹쳐 놓을 수 있는 경험들은 물론 내게도 있다. 그렇지 않다 해도, 하나씩 떼어 놓고 보자면,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경험들이다. 어려운 것은 주인공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 ― 혹은 그것의 지도를 그리는 일 ― 이었다. 1994년의 나는 중학생이 아니었고, 대치동의 학생이어 본 적이 없으며, 베네통 가방을 메어 보지 않았고, 부모의 일터에 불려가 노동하지 않았으며, 고등학교 입시 경쟁에 노출되지 않았고, 삐삐를 써 본 적이 없으며, 철거촌 앞길을 지나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이들 각자는 나로서는 앞에 열거한 것들보다도 좀 더 먼 거리를 두고 있는 경험들이므로 따로 떼어 놓고서도 좀 더 알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것이 하나로 얽혀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겹쳐 놓을 수 있는 경험들은 물론 있지만, 그것들을 잇기는 힘들었다. 이것들을 한데 잇지 않고서는 그 세계를 살아가는 주인공의 욕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가능성과 한계 속에서 움직일는지 상상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앞에 열거한 것들 역시 따로 떼어서만 생각할 수 있었다. 영화는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이 영화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세계와 욕망을, 그리하여 그의 경험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흔한 경험이다. 또한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한 것은 분명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안다. 종종, 설명보다는 묘사의 나열을 통해 더 많은 것이 전해지곤 한다. 종종, 설명은 정당화가 되고 정당화는 삭제를 전제하니까. 예를 들어 주인공이 목덜미에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의사는 가능성 낮은 부작용으로 안면 마비가 올 수 있다고, 그리고 어쨌거나 긴 흉터가 남을 거라고 말한다. 말을 잇지 못하고 크게 놀라던 아비는 복도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을 그치고 다른 가족들 앞에 앉아서는 의사들은 늘 겁을 준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지만 알 수 있다. 주인공의 안전이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흉터에 대한 걱정임을 ― 여자의 얼굴에 남는 흉터에 대한 두려움임을, 여자의 얼굴에 생기는 흉터에 그가 어떤 의미를 두는지를. 주인공도, 주인공의 유년과 자신의 유년을 겹칠 줄 아는 이들도, 모두가 안다. 이 영화의 다른 많은 것처럼 이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설명 따위를 하려 들면 안 되는 일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가 구체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때문은 아니다. 영화는 잘 짜여진 이야기를 따라가는 대신 그저 보여준다. 이야기, 라는 말이 과연 어울리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저 보여준다. 시간 순서대로라고 해도 좋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좋을 만큼 긴밀하거나 맞물리지 않는 연결들도 있었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원형으로서 다가갈 수 있는(실제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므로 ‘있을’ 정도가 안전하겠지만) 이야기라면, “보편적인 은희들”이라 칭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이 이야기가 주인공의 경험들, 사건들, 배경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닐 시시콜콜한 장면들을 담담히 늘어 놓기 때문일 것이다. 저것들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아서일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본인에게는 어쩌면 전부인 (혹은, 종종 전부가 되는), 그러나 여전히 시시콜콜한 장면들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극장에서 보았으므로, 여러 장면에서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 중 한 번은 언니가 좋다며 따라다니더니 돌연 자신을 피하는 후배에게 주인공이 이유를 묻고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라는 답을 듣는 장면이었다. 여러 명이 웃었다. 조금 덜 선명한 장면에서도 여러 명이 여러 번 웃었다.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의 영화이고, 나와 같이 관람한 이들은 대개 청소년기를 이미 지난 이들처럼 보였다. (물론 15세 언저리의, 그러니까 주인공과 같은 또래의 관객이라도 적지 않게 웃었으리라 생각한다.) 악의야 없었겠지만, 그들은 주인공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그러니까 어린 그들을 귀여워 하는 듯했다. ‘미성숙’한 ‘흔들림’들에 대한 악의 없는 비웃음. 누구나의 우스개가 되어 버린 ‘중2병’이라는 말을, 중학교 2학년생들을, 그들의 진지한 마음들을 생각했다. 설명하지 않는 영화는 이런 장면들에 대해서도 감히 웃을 수 없게 만드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웃건 말건, 비웃건 말건, 장면들은 넘어간다. 거창할 것 없는 삶의 시간이 흘러간다. 여러 명이 여러 번 웃을 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 또한 웃었다. 그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엔 울고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 그로 인한 슬픔 같은 것들이 화면에 비칠 때가 아니라 무겁지만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모두 끝나고 화면이 검어졌을 때 말이다.4

시시콜콜하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일들이다. 가정폭력, 악한 교사, (시대와 엮여 있는) 대형 사고, 위험부담이 있는 수술 같은 일들. 시시콜콜하지만 흔치만은 않은 일들이다. 맞고만 있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증거가 될 진단서를 떼어 줄까 묻는 사람이나를 만나는 것, 누군가와 서로를 좋아하거나 그 마음을 잃는 것, 오래도록 쥐고 있을 수 있는 소중한 편지를 갖는 것 같은 일들. 아무도 알려 들지 않는 작디 작은 일들, 그러나 누군가를 혼자이거나 혼자가 아니게 만드는 일들. 흔히들 가볍게 무시하고 넘기는 이런 무거운 일들을 홀로 겪는 이들에게 네가 ― ‘당신이’라고 썼다가 고쳤다, ‘네가’의 발음은 ‘내가’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반드시 혼자인 것은 아니라는 말을 건데는 것이 아마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가장 쉽게 지목할 수 있는 이 이야기의 메시지일 것이다. 저항할 수 있다는 힘을 주는 말, 얼굴 아는 사이야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 아는 사이가 과연 몇이냐 되랴는 명심보감의 문장, 다시 꺼내어 읽는 편지5의 문장들을 인용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지 못해도, 혹은 겨우 들은 문장들을 잊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가르마 방향이 바뀐 이유도, 주인공과 그 곁의 사람이 둘 다 왼손잡이인 이유도, 돌아오지 못한 그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도, 그래 놓고서는 돌아가면 말해주겠다는 편지를 보낸 이유도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알지 못한다. 이 영화를 만든 이의 마음도 여전히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그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이야기를 보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 영문 모를 그 이야기의 끝에 괜히 흐르는 눈물을 닦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일단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설명하고 해명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 그런 방식을 통해서야 비로소 포개어지는 삶들. 영화 속 인물들이 하는 말이나 영화 속 사건들이 상징하는 바가 아니라, 두 시간 십여 분을 그저 흐르는 시간에서 조금은 더 느꼈다고 생각한다 ― 힘, 희망, 위로, 같은 것들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이야기에 대해 쓰면서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은. 은희나 영지가 아니라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라도 좋을 일까지야 아닐 테지만, 수희나 지숙, 혹은 유리나 민지를 비추는 이야기였더라도 좋았을 것 같은 기분이다.6

  1. 트위터에서 보았다. 여전히 읽지 않은 인터뷰는 《GQ Korea》의 기사 〈김보라 감독의 삶〉.
  2.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3. 원형과 보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나를 상상했지만 실제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이 영화의 카피 중 하나가 “가장 보편적인 은희들을 위해”라는 사실이다.
  4. 앞에도 썼듯 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것 역시 흔한 경험이다.
  5. “은희에게”로 시작해 “- 김영지 -”로 끝나는,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같은 말이 적혀 있는 편지.
  6. 김보라 연출, 《벌새》, 2019의 등장 인물들이다. 앞에서부터 각각 박지후, 김새벽, 박수현, 박서윤, 설혜인, 안진현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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