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bara Kruger: Forever》(서울: 아모레퍼시픽미술관, 19.06.27-12.29.)에 큰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 의미가 있을 만한 작업들은 이를테면 ‘교과서’를 통해 여러번 보아 왔고, 책에 인쇄된 이미지와 실물 사이에 큰 차이가 없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벽을 가득 채우는 설치 작업도 있다는 건 어째선지 최근에야 알게 되었지만 큰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종종 읽었고 이따금 인용한 바 있는 작가의, 한국에서는 흔치 않을 (아시아 최초로 열린다는) 개인전 ― 그저 이 정도가 전부였다.
번역의 어려움
어려우리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어려웠다. 책에서 보았던 작업들, 그러니까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든가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 같은 작업들을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여겼거나 이해하지 못했거나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문장으로 가득한 이 전시가, 그러니까 영어 문장으로 가득한 이 전시가 번역문 없이 펼쳐졌다는 점이었다. 어느 기사에서 “권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남성과 여성, 영어에 밝은 사람과 영어를 못하는 사람에 따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 굳이 번역하고 해석하지 않은 채 놔두는 것이 크루거 전시의 원칙”이라는 말을 보았고, 아마도 전시장에서도 나는 그 이유나 효과를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1
물론 낯선 태도는 아니다. 적어도 현대의 많은 작업들은 이런 식으로 ― 설명 없이 온전히 관객의 경험(해석조차 아니라)에 맡기는 식으로 ― 제시되니까. (나는 꽤나 자주, 여기에서 일종의 방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렇게 묶기에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은 1차적인 메시지, 프레임 가득 혹은 프레임 한가운데에 문장으로 직접 표명되어 있는 그 메시지가 너무도 중요하므로, 의아했다. 전시장을 향해 내려가는 계단참에 걸려 있는 〈모욕하라 비난하라SHAME IT BLAME IT〉(2010)의 가운데에 적혀 있는 영어 문장을 읽지 못하고 그저 바늘에 찔리기 직전인 눈동자만을 보는 관객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이해해야 하나. 전시장 첫 번째 방의 네 벽과 바닥을 덮고 있는 설치 작업 〈포에버Forever〉(2017)가 인용하는 조지 오웰이며 버지니아 울프며의 문장들을 전혀 해독하지 못하는 관객은 무슨 이유로 그 거대한 글자들에 짓눌려야 하나, 나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이 전시에 오는 많은 사람은 영어를 읽을 줄 알 것이고 (대개는 짧은 문장들이고 단어 또한 어렵지 않은 편이므로) 문장의 이해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큰 수고는 아니라고 해도 얼마간의 애를 쓰는 동안, 작업들을 이미지로서 경험할 기회가 조금은 줄어들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네 개의 벽을 모두 사용하는 영상 설치 작업의 등장 인물들은 영어로 말하지만 영상 위에는 물론 옆에조차도 자막은 뜨지 않는다. 방 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앉은 이들이 클리어파일과 화면(들)을 번갈아 보며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으니 아마 거기에 무언가 적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문장들을 놓쳤고, 그들은 그 문서를 보는 동안 잠깐 비친 어떤 장면들을 놓쳤을 것이다. 첫머리에 인용한 것과 같은 포스터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충돌 혹은 빗겨감, 그것이 내가 아는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이었으나 ― 한눈에 들어오는 짧은 문장들이므로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 조금씩 피로가 쌓일수록 그 충돌은 희미해졌다. 어떤 배경에 어떤 글씨로 어떻게 써도 좋을 평범한 문장만이 남게 되었다는 뜻이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이 아닌 덕에) 전시장에서 유일하게 자막이 제공된 영상이었던 짧은 다큐멘터리 〈바바라 크루거: 담론의 일부〉2에서 바바라 크루거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때 보았던 ‘해독decode’이 필요했던 전시들, 암호code를 모르므로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경험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며, “[그래서] 내 작업이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I think the availability of my work was important to me”고 말한다. 단순히 과거의 입장이 그랬고 지금은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면 번역문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지금은 바뀌었다면, 이렇게 바뀐 것이라면, 나로서는 큰 흥미가 생기지 않는 전시다.
같은 영상에서 그는 “나는 물론 페미니스트이지만 젠더나 섹슈얼리티를 계급과 별개로 생각할 수 있었던 적이 없고 인종과는 별개인 계급을 생각한 적도 없다”고 말한다. 평소라면 반가워 할 문장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의심스럽다. 먼 곳에 있는 한국어 사용자까지 따질 것 없이도, 미국 안에서조차 언어는 계급이나 인종과 (그리고 짐작컨대 종종 젠더와) 밀접한 영역에 있으니 말이다. 애매한 위치의 국가에서 애매한 계급에 속해 살며 영어를 애매하게만 하는 이로서 갖는 사소한 불만일는지도 모른다. 억하심정 같은 것 말이다. 전시 준비를 위해 내한해 즉흥적으로 제작했다는 한국어 텍스트 설치 작업 〈제발 웃어 제발 울어〉가 고까운 것도 그래서일는지도 모른다.
분하면 뾰족하라
그래서 최소한의 번역을 제공했다면, 상상컨대 한국어 캡션을 확인해 뇌리에 새겨 둔 후 이미지를 봄으로써 순간적으로 조합해 예의 그 충돌을 꽤나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까. 좀 낫기야 했겠지만 나는 다른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작품 수가 많은 작가의 활동기간 전체를 포괄하는 형태로 기획된 전시다. 그러므로 벽에 걸린 액자들은, 하나하나를 ‘작품’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았고 모두가 외로웠다. 포스터도 잡지 페이지도, 그렇게 붙이는 물건이 아니니까. 게다가 화이트큐브, 게다가 대기업의 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 걸려 있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장 또한 모종의 충돌을 일으키겠지만, 그 충돌에서 누가 이길지를 낙천적으로 전망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시대다.
미술관의 기획도 작가의 방침도 실망스럽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여전히 한 번쯤 보고 싶은 것은 미술관의 흰 벽에 수십 년 전에 제작된 ‘작품’이 걸려 있는 모습이 아니라 거리의 담장에 어제쯤 인쇄된 포스터가 줄지어 붙어 있는 모습이다. 재생산권 운동에 뛰어들었던 바바라 크루거가 곳곳에 붙였던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 같은 오늘의 무언가를 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지난 십여 년간 꽤나 큰 운동들의 곁을 지나며 종종 보았던 풍경이지만.
“충분하면 만족하라”. 전시장을 향해 내려가는 계단 앞의, 그러니까 티켓 박스가 있는 공간의 높고 긴 벽을 가득 채운 텍스트 설치 작업의 문장이다. 이 또한 대기업미술관과 부딪겠지만, 적어도 굳이 돈까지 내고 계단을 내려간 내게 그 끝은 밝지 않다. 동행을 기다리며 서성이다 어느 자리엔가 섰을 때 ‘충’은 시야 밖에 놓이고 ‘만’은 기둥 뒤에 숨었다. “분하면 ○족하라” ― 분하면 뾰족하라, 라고 읽기로 했다. 바바라 크루거가 아니라, 내게 하는 말이다.
- 노형석, 「‘제발 웃어 제발 울어’…바바라 크루거의 세상 향한 ‘문자 절규’」, 《한겨레신문》 19.06.27. 기사. ↩
- Art21, “Barbara Kruger: Part of the Discourse”, 2018. 이하의 인용에서 번역은 내가 한 것. 제목은 “1981년, 83년의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작업을 내어 보이는 건 담론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어요.”라는 영상 속 바바라 크루거의 말에서 따온 것일 텐데, 전시장에는 이름 외에는 번역하지 않은 “바바라 크루거: Part of the Discourse”라는 제목으로 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