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순전히 상상에 기대어 문장들을 이어나갈 것이다. 지금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사실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냥 무어라고 써야 할 것 같았고, 별수 없이 상상에 기대기로 했다. 모르는 것에 대해 쓸 것이므로 의미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겐 채널이 없다”고 썼지만, 사실 나는 애초에 그 ‘우리’에 속해본 적조차 없다.
<무한도전>은 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방송시간대에 친구들과 함께 있는 일이 잦았던 시기에는 친구들이 틀어 놓은 것을 어깨너머로 보곤 했지만, 시끄럽고 정신 사나워서 스스로는 찾아 보지 않았다. 이십 년 전쯤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친구들은 대중가요를 들었다. 좀 빠르게는 서태지와 아이들, 늦어도 g.o.d 쯤으로 그들은 가요를 듣기 시작했다. 발라드 곡들이라면 나도 들어본 것이 몇 곡 있었지만 댄스곡들은 시끄럽고 정신사나웠나. 어느 드라마 주제가가 내가 아는 유일한 대중가요인 시기가 꽤 길었고, 나중에 알게 된 여러 노래들도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들은 것이었지 가수가 부른 것을 듣고 안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열광했던 가수들은 하나둘씩 활동을 그만 두었다. 그룹이 해체되거나, 인기가 없어져 어느새 티브이에 나오지 않게 되거나, 혹은 죽은 사람도 있고 구속된 사람도 있었다. 제가 아끼는 가수들이 더 이상 티브이에 나오지 않게 되면 그들은 새로운 가수를 찾아 또 애정을 쏟았지만 예전만은 못했다.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가수들을 다 알기도 어려웠고 해야할 일도 많았다. 어느새 많은 친구들은 예전에 듣던 노래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고, 유행하는 노래들은 기껏해야 길거리에서 들려온 후렴구만을 아는 수준이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친구들이 좋아했던 가수들이 다시 티브이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유행하면서였는지, 혹은 기성 가수들을 불러다 연 경연 대회가 그 시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친구들이 찾아 듣던 노래가 티브이에서 다시 흘러 나왔고, 내친 김에 신곡을 내는 가수들도 있었다. 꾸준히 신곡을 내긴 했지만 인기를 되찾지 못했던 이들이 다시 섭외되기 시작한 것도 같다. 뮤지컬이나 영화로 전업했던, 여전히 그것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몇몇 이들 역시 다시 음악프로그램의 무대에 서는 모양이다.
그리고 지난 2주동안, <무한도전>은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인지 “토요일 토요일은 가요다”인지 하는 특집무대를 방송했다. 나는 보지 않았고 “토토가”라는 약칭만을 수차례 들었다. 90년대를 풍미한 인기가수들이 나온 모양이다. 그 시간에 나는 딴짓을 하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었는데, 수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를 해댄 통에 그들의 노래가 들리는 듯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실, 이정현이나 엄정화의 노래는 몇 곡 알아도 지누션의 노래는 아마 들어본 적이 없고, 터보의 노래는 기껏해야 검은 고양이 네로 정도를 알 뿐이므로, 아무것도 들리지는 않았다.
즐겨 들었던 노래를 십여 년만에 다시 듣는다는 것,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다시 주인공이 된 그 가수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듣는다는 것은 아마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딱히 연예인에게 열광해 본 적은 없지만 어릴 적 자주 보던 연예인을 오랜만에 화면에서 보게 되면 왠지 반가운 감정이 내게도 든다. 그러니 그들이 좋아하는 것 자체는 신기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오히려 적지 않은 이들이 그 당시를 한국 가요의 전성기로 여기는 듯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양적으로 훨씬 성장했음에도 지금은 비슷비슷한 노래들 뿐이고 천편일률적인 섹스 어필이 전부인데 반해, 90년대에는 오히려 관객을 지배하는 디바가 있었고 선구적인 음악들이 있었다는 듯한 회상들이 눈에 띄었다. 내게는 그때 노래들이나 지금 노래들이나 똑같이 시끄러우면서 뻔한 것들처럼 비쳐서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가요를 듣지 않으므로, 알 수 없는 회상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다. <아이야>나 <악동보고서> 같은 저항적이거나 비판적인 색체를 띤 노래들이 더는 들리지 않고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없앤다’는 뜻이라고 들은 핑클 같은 작명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요즘 그룹들은 이름도 몰라서 핑클과 비교해 볼 만한 것을 찾지 못했고, <아이야>는 음반을 선물 받아서 우연히, <악동보고서>는 춤을 연습하는 친구들을 구경하다 우연히 들은 것이었을 뿐 그때도 티브이나 거리에서 주로 주워 들을 수 있었던 것들은 사랑노래였으므로 지금 노래들 중에서도 찾아보면 몇 곡쯤은 있으려니 했다. 그저 길에서 듣는 것이 그렇고 그런 노래들 뿐인 것이리라 여겼다. 지난 세기의 말에 유행했던 ‘전사’의 이미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물론 어느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시절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방관자인 나로서는 지금의 음악들에 대해 그 당시의 음악들이 크게 내세울 수 있는 점이 있지는 않아 보였다. 한 흐름의 시작으로서의, 예를 들면 아이돌 문화의 시작으로서의 차별점 정도야 있겠지만 반대로 지금에 와서는 시스템의 성숙 같은 차별점이 또 생겼을 테니 말이다.(이런 건 그 시기에밖에 없었다, 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게는 김건모의 노래들이 속하는 장르 정도다.)
나는 괜히 또 못마땅해졌다. 자기것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 마냥 나쁜 일이야 아니지만, 어쩌면 나는 그런 자부심을 가질 것이 없어서 단순히 배가 아픈 것인지도 모르지만, 괜히 또 못마땅해졌다. 요즘 노래엔 깊이가 없어, 라는 말은 트로트 혹은 그 이전의 ‘전통 가요’까지를 들어 온 세대에게서 여러번 들은 말이다. 나 역시 나보다 앞선 세대의 노래들을 내 친구들이 들은 노래들보다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노래들에 깊이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티브이에 나오지 않아도 좋았던, 그래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했던 노래들이 좋았을 뿐이다. 티브이에 나온 노래들이야 어차피 뻔했다.(오히려 시장이 커지면서 언더그라운드에서 방송으로 편입되는 노래들이 조금씩 늘고, 그 노래들을 생각하면 나는 90년대보다 지금이 좋다.) 그러니까, 제가 제일 힘들었고 제가 제일 열심히 살았으며 제가 제일 가난했지만 그럼에도 제가 제일 훌륭했다고 말하는 앞세대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그들에게 그것은 일상이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특별한 행사라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는 많은 이들을 보았다. 지금 이렇게 열광하지만 잠깐의 추억팔이일 뿐이고,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잘은 모르겠지만, 결국은 요즘 새로 나오는 가요들에로 돌아간다는 뜻인 걸까.
산업화 시대를 추억하고 유신시대를 추억하는 앞세대에 그대로 내 세대를 갖다 대고 싶지는 않다. 겨우 그 시대의 가요를 추켜세우는 것이 저 시대의 정치와 경제를 추켜세우는 것만큼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서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일상이고, 우리에게 그것은 그저 행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채널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내 앞 세대가 추억하는 가수들은 이제 선생님 소리를 듣는다. 한때 검열 당했고 한때 저질로 취급 받았을지언정, 그들은 이제 선생님 소리를 듣는다. 포크송을 불렀던 이들도 그렇고 트로트를 불렀던 이들도 그렇다. 방송 시장의 주류에서 밀려 났을지언정, 그들에게는 여전히 갈 곳이 있고 받을 인사가 있다. 그덕에, 선생님 소리를 들을만한 지위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도 또한 자리가 주어진다. 7080을 내세운 무대들이 있고, 케이블 채널 중에는 아예 성인가요 채널도 있다. 한때 그들의 라이브 공연을 찾아 다니고 그들의 LP판을 샀던 내 앞 세대들은 여전히 그 구매력을 갖추고 있다. 디너쇼에 갈 수 있고, 음반을 사지는 않을지언정, 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 앞에 배치된 이런저런 광고에 나오는 물건들을 살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들었던 노래를 부른 이들은 선생님 소리를 듣기엔 애매하다. 자기들 사이에서야 선배님 소리 정도는 듣겠지만, 성취를 이룬 음악인으로서도 기운이 넘치는 가수로서도 애매하다. 한때를 풍미했던,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어정쩡한 사람들일 뿐이다. 요즘 나오는 노래들과 큰 차별성도 없이 그냥 유행에 뒤쳐질 뿐이니 그때의 노래들을 모은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애매하고, 기껏 만들어 봐야 그 타겟이라곤 구매력도 없는 ‘삼포 세대’(좀 전에 오랜만에 이 말을 쓴 글을 보았다.)일 뿐이다. 한때의 주인공이었던 우리의 스타들, 그들을 좋아하고 그들을 소비함으로써 또한 주인공일 수 있었던 우리들은 이제 주인공으로 등장할 무대를 잃었다.
쓸데 없는 소리만 길게 했는데,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90년대 열풍이 부는 것은 그때의 문화가 지금 문화보다 나아서는 아닌 것 같다. 누구는 이 복고풍을 문화적 퇴행이 아니냐고 묻던데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유행이야 이리저리 변하지만 복고를 논할 만큼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의 우리에 속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저 답보하고 있을 뿐이니 돌아가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보인다. “채널이 없다”는 게 오히려 핵심인 것으로 내게는 보였다. 멋대로 그때의 우리들은 구매력이 없다고 썼지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인가요 채널을 보면서도 사이사이 나오는 보험 광고에 고민만 더해 갈 뿐 하나 가입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전히 90년대의 스타들을 위해 돈을 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이유로든, 채널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채널 없이, 그래서 분출할 곳 없이 쌓여가는 욕망들을 가끔 이렇게 터뜨리면, 즐거운 사람도 생기고 돈을 버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일상적으로가 아니라 열풍으로 휩쓸고 지나가는 것은 그래서는 아닐까.
한때 우리가 주인공이던 채널을 갖고 있었던 우리들은, 이대로 영영 채널을 갖지 못하게 될까. 이후의 어느 문화가, 트로트와 90년대 가요 만큼의 차이를 갖게 되면, 혹은 일이 잘 풀여서 지금은 가진 것 없는 우리들이 다시 작은 무대에서나마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게 되면, 하다 못해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가요들을 묶어서라도 채널 하나 쯤을 만들 수는 있을까. 또 어떤 사람들이 말했듯, 양로원에 들어가게 될 때쯤이면, 종일 90년대 방송들이 나오는 채널 하나쯤을 갖게 될 수는 있을까. 채널을 갖게 되면 지금의 어른들이 그러하듯 더 큰 자부심을 갖게 될까. 아니면 채널을 갖지 못하는 쪽이, 질리지 않을 정도로만 이따금씩, 굳이 찾아서 비교해보지 않는다면 반박하기 애매할 정도의, 자부심을 내비치는 데에 더 유리할까.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일상이라는 것이 생길까. 생긴다면 어떤 것일까. 더 이상의 상상은 내게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