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 바엔, 너는 왜 사느냐고 물었던
사내도 있었다.
이렇게 살 바엔—
왜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모른다
[중략]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들추고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의 시신을 내다버린다, 무서울 것이 없어져버린 세상. (「매음녀 1」 부분)
이연주. 1953년 태어나 1992년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 시인의 이름이다. 등단해 첫 시집을 낸 이듬해였다. 사람이 시를 읽고서 죽음을 결심할 수 있다면, 나는 그가 자신의 시를 읽고 죽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이 세계를 읽고서 죽음을 택했으리라는 뜻이다. 슬프고 아픈 세계를, 슬프고 아픈 말들로 쓴 시들이 실린 그의 첫 시집은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흔한 말부터 해 보자. 제목은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 시집은 하층 여성의 삶을, 그것도 시장 속에서의 삶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비판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지촌 인근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매음녀’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응축된 이 세계의 원리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쓴 시일 것이다.
“그들에게 응축된 이 세계의 원리를 보았을 것이다”라고 쓴 것은, 한 기사에서 이연주가 “세상과 여성의 관계를 그녀들의 삶에 투영했다”는 문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기사에는 아예 “'매음녀' 연작에서 시인은 도시와 자본주의의 타락을 한 여자의 육신에 구겨넣는다”는 문장까지가 나온다. 출판사의 보도자료에서 나온 문장인지 기자들이 직접 생각한 문장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시들을 나와는 정 반대의 방식으로 읽었다는 것이다.
같은 소재를 택할지라도, 같은 문장을 낳을 수는 없는, 정 반대의 접근이다.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쓰는 것과, 자신이 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대상을 찾는 것은 말이다. 이연주의 시가 정말로 전자인지를 확언할 길은 없으나 — 그저 나의 느낌이므로 — 후자였다면 이런 문장이 나오지는 않았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쯤 되면 나는, 앞서의 흔한 말을 거두고 싶어진다. 이 시들은 가부장제와 시장 경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와 시장 경제 속에서 고통 받는 어떤 삶에 대한 담담한 기록이다. 비판은, 이 시를 읽은 우리들의 몫이 될 것이다.
숏타임 오천원,
오늘밤에도 가랑이를 열댓 번 벌렸다
입에 발린 ✕✕, ✕✕✕
죽어 널브러진 영자년 푸르딩딩한 옆구리에도 발길질이다
[중략]
멀쩡 몸뚱어리로 뭐 할 게 없어서 그짓이냐고?
어이쿠, 이 아저씨 정말 죽여주시네 (「매음녀 3」 부분)
그런 시를 알고 있다. 제목도 작가도 잊었지만, ‘작부’에게 ‘우리는 밑바닥 인생’이라 말하며 술을 따르라고 하는 한 사람이 읊는 시가 있었다. 스스로의 비참함을 말하기 위해, ‘가장 비참한 존재’를 끌어다 쓴 시가 있었다.
이연주의 시는 ‘매음녀’들의 삶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상징하지 않는다. 그들이 성을 팔듯 노동력을 파는 다른 노동자들을 상징하지도, 그들이 삶의 이유를 모르듯 삶의 의미를 잃은 누군가를 상징하지도 않는다. 몇 인칭 시점인지 불분명한 「매음녀 3」에서 시인과 화자, 그리고 ‘매음녀’는 같은 사람일 수도,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시는 ‘매음녀’를 통해 시인 자신의 아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혹은 화자는, 불분명한 시점을 매개로 ‘스스로 매음녀가 된다’. 그저 그들의 삶을 온전히 느끼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아무런 투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질서를 벗어나 다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소수자 되기’가 있을 뿐이다.
이런 이연주의 시를 읽으며, 혹은 이연주의 시를 이렇게 읽으며, 나는 재현의 윤리를 생각한다. 무엇을 왜 재현하는가, 재현이 예술의 중심은 더 이상 아니라고 해도, 이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그저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기 위해 어떤 것을, 어떤 삶을, 단순한 상징으로 격하시켜도 좋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재현할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이야기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매음녀」 연작의 다른 시들은 때로는 1인칭 시점을 취하고 때로는 3인칭 시점을 취하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이 삶의 고단함을 말하는 데에 그친다는 것, 이 삶을 무언가의 비유로 혹은 무언가의 극단으로 만들어버리지 않는다는 것.
이 시가 무언가를 비판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부장제와 시장 경제 하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삶을 보여줌으로써가 아니다. 다른 무언가로 전치되지 않는 어떤 삶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이 시들은, 모든 것을 쉽사리 교환가능하고 대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떤 체제들을 비판한다.
‘매음녀’들의 이야기가 그저 고단한 삶의 비유일 뿐이라면, 이 시들은 반드시 그들에 관한 것일 필요가 없다. 다른 가난한 삶을, 다른 병든 삶을 보여줌으로써도 그러한 삶을 만드는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시들은 반드시 그들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이 시가 재현하고자 하는 것, 이 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