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봐도 비디오/상영회의 관객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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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봐도 비디오(Obviously Video)라는 행사에 다녀왔다. 첫 회를 대신하는 프리뷰스크리닝으로, 김혜연, 임유정 두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상영했다. 행사의 이름은 아마도 언어유희다. 안 봐도 비디오, 라는 마음으로 영상 작업을 끝까지 보지 않는 관객들을 비꼬기, 그리고 누가 보든 안 보든 이것은 비디오-영상이라는, 어떤 선언. 나는 영상의 런타임을 확인하지 않고 보는 편이다. 그러다 질릴 때쯤 – 대개는 영상이 끝나기 전이다 – 확인하곤 한다. 전시장에 걸린 영상을 회화나 설치의 들러리 쯤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마음이 들 때는 종종 있다. 사회자는 어떤 작업이든 안 봐도 비디오일 수는 없다고 말했지만, 서사가 없는 작업, 어떤 동질적인 화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 안 봐도 비디오인 경우는 흔한 일이다.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감각적으로 작업을 경험하는 예민한 관객에게도 그렇고, 화면 속의 변주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둔감한 관객에게도 그렇다. 그 사이에 있는 이들에게만 적절한 비판이 될 것이다.

굳이 찾아 다니며 볼 만큼 영상 작업들을 즐기지는 않으면서도 굳이 먼 길을 가서 상영회에 참석한 것은 여기서 상영되는 작업의 작가들을 곧 만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A Research on Feminist Art Now라는 행사에서다. 한 명 당 10분 씩의 발표 시간만이 주어지는 저 행사에 참여할 두 작가가,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무엇을 내어 보일지 궁금했다. 물론 미디어 리터러시가 떨어지는 나로서는 가서 본다 한들 요령부득이지만. 보고 온 작업들에 대해 기록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마디 적어 놓자면, 대개는 영상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하는 작업들이었다. 퍼포먼스의 기록, 이상의 것을 시도하지 않는 듯한. 영상미를 노리거나, 시각 효과들에 공들이지 않는, 작가가 기획한 사건이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얌전히 담는 작업들이 대부분이었다. 김혜연의 작업이 특히 그랬고, 임유정의 작업 하나가 또 그랬다. 상영 앞뒤로 퍼포먼스라 할만한 것이 행해져서, 그런 느낌은 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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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말했던가, 두 작가 중 누구 하나가 말했던가, 인터넷에서 다 볼 수 있는 작품들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상영회를 기획하고 누군가는 상영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그저 작품을 보이고 보는 것 이상의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큰 화면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심일지도 모른다. (아주 최적화된 상영 환경은 아니었고 화질 역시 인터넷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지만.) 조금더 찾자면, 작가들에게는 관객의 존재를, 그들의 감상을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것이고 관객들에게는 작가에게서 직접 어떤 설명을 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것이다. 관객으로서 나는, 작가들의 언변을 크게 믿지 않으므로, 후자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내가 궁금한 것은 관객들의 존재, 그들의 감상들이다.

어떤 작품의 관객이 아니라, ‘상영회의’ 관객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혼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굳이 여럿이 모여서 보는 이들을 생각한다. 자신만의 리듬으로 볼 수 없는, 정해지거나 약속된 어떤 속도를 따라야 하는 환경에서 작품을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을 생각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이들의 존재이다. 주워 듣기로는 관객들의 동시적이고 집단적인 현전에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모두 같은 자세로 한 곳을 바라보다 보면, 서로 호흡을 맞추다 보면, 혼자 볼 때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것을 느끼게 될까?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마음으로 볼 때 서로 다른 것을 느끼던 이들이, 하나의 집단이 되면 집단의 마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집단의 감상을 갖게 될까? 이런저런 장면들에서 사람들이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그 웃음이 거슬릴 뿐인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남의 웃음에 동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한데 모여 있어도 여전히 다른 존재인 개개 관객들이, 서로의 존재와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는 데에 나는 관심이 있다. 상영회의 마지막은 흔히 그러하듯 ‘작가와의 대화’였고, 이 자리에서 몇몇 관객들은 자신의 감상을 조금씩 내어 보이며 작가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니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감상을 조금씩 내어 보이”는 이 관객들이다. 관객끼리의 대화, 같은 것을 상상했다. 서로가 어디까지 같고 어디까지 다를 수 있는지, 관객들이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 말이다. 작가에게서 답을 얻고자 하는 이들만 모인 자리라면 금세 지루해지고 말겠지만, 뭐, 그래도 좋다. 관객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에 그만한 자리도 없을 테니 말이다.

동질화된 집단 주체가 아니더라도, 집단이 된 관객에게는 어떤 힘이 있을 것이다, 라고 아직은 믿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에 그런 힘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서로 다른 존재들을 한 자리에 호출하는, 그들이 서로를 확인하게 하는, 그들이 서로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게 하는, 그런 힘이 말이다. 작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는 데에 그친다면, 그 작품을 통해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가능하다 한들, 그 작품이 새로운 세계를 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작업이 촉매가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게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고, 나는 아직 믿는다. 작품을 통한 개개 관객들의 특별한 경험도, 말해질 때에야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을 가장 좋은 청중은 같은 작품의 다른 관객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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