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린 입이 있다. 흘러나오는 소리가 있다. 웅크린 몸이 있고, 뒤척이는 몸이 있고, 얼어붙는 몸이 있고, 흘러내리는 몸이 있다. 제 몸을 치는 몸이 있다. 제 몸을 일으켜 세우거나 주저앉히는 몸이 있다. 제 몸을 삼키고, 내뱉고, 내버려두고, 못살게 굴고, 다시 지켜보는 몸이 있다. 그 뒤에, 그 앞에, 그와 동시에, 벌린 입이 있다. 고통을 입은 입. 고통을 입은 입은 말하지 않는다. 고통을 입은 입은 소리를 낸다. 소리는 소통을 모른다.
소리는 있었다가 사라진다.
유지영은 묻는다. 소리에 회신할 수 있을까. 벌린 입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1]희음의 공연 소개글.
무대도 구성도 단순하다. 〈고통의 입기〉(유지영 안무·컨셉, 서울: 연희예술극장, 24.07.05-06.)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펼쳐진다. 양쪽으로 객석이 비치된 기다란 무대다. 객석은 무대와 같은 높이에서 시작해 서너줄 정도 갈수록 높아진다. 퍼포머들 ― 박민지, 이종현, 유지영 ― 은 방석을 깔고 앉은 관객의 발치에 엎어진 채 가슴을 치고 울부짖는다. 맨뒷줄에 앉은 관객은 제 키보다 훌쩍 높은 곳에 놓이게 된 눈으로 무대를 내려다 본다. 객석도 밝다. 공연은 핏자국을 연상케 하는 (그러나 납작하고 둥글어서 별 것 아니기도 한) 작은 깔개로 시작된다. 깔개를 들고 나온 이가 그 위에 엎드리면 다른 둘이 차례로 그의 몸을 덮고 엎드린다. 자리를 옮겨 가며 몇 번을 반복한다.
나란히 눕기도,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쓰러지기도 한다. 이윽고 몸을 뒤틀거나 허벅지를 두드리는 움직임과 아- 하는 소리가 더해진다. 갈수록 주먹질이 격해지고 소리가 커진다. 언제부턴가 소리는 ― 낮은 음으로 이어지는 ― 기나긴 비명 혹은 신음이 된다. 공연이 대개 그렇듯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코앞에서 혹은 높다란 데서, 괴로워 하는 이들을 그저 지켜만 보게 하는 구도가 폭력적이라는 혹은 시선의 폭력을 상기케 한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2]지난 몇 달 사이 본 어느 공연에서 이런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것이 이 공연에서였는지는 분명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타자의 고통을 (옷을 입듯이) ― 그 자체로 ― 입는 법을 찾는, 괴로움 어린 소리에 또 다른 신음으로 답하(고자 하)는 길을 찾는 공연이었으려나. 줄곧 고통을 (해를 입는다는 의미에서) 입는 이들을 생각하며 보았다. 아무런 사건도 보여주지 않고 그저 괴로움에 뒹구는 몸들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보듬고 고통을 나누는 듯해 보이던 이들이 차츰 멀어져 서로 다른 자리에서 조금씩 다른 크기로 치고 울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늘 같은 시점에 같은 움직임으로 비명하고 신음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놓인 다른 삶들에 동시에 가해지는 고통을 생각했다는 뜻이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집단적으로 느끼게 되는 고통이든, 정말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 그저 괴로운 삶만을 자아내는 세상이 보내는 ― 고통이든,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피할 도리 없이 함께 겪게 되는 고통, 기껏해야 각자의 체력과 감수성과 참을성 같은 것들의 차이로 조금씩 다른 정도로 느껴지고 표출될 뿐인 고통.
저기에 타자의 고통이 있다. 그것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않고도 공감하거나 함께 겪을 수 있을까. 정말로 ‘타자의’ 고통이 ‘저기에’ 있을까. (아직은) 신음하지 않고 있는 나 혹은 또 다른 타자의 (아직은) 아무런 낌새도 없는 고통을 찾을 수 있을까. 타자의 고통을 (옷을 입듯이) 입는 몸짓이 그러한 발굴과 감지의 실마리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보았다.
말미에는 셋이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고서 서로를 향해 혹은 세 개의 머리가 모인 한 점을 향해 목놓았다. 포효咆哮일지 비통悲慟일지 알 수 없는 소리, 제 고통을 내뱉는 것일지 마주 엎드린 이의 고통을 삼키는 것일지 알 수 없는 호흡이 공간을 채웠다. 침이며 눈물이며도 흘렀던가. 이미 한참 전에 눈을 감은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