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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쯤이었나, 길을 나서다 문득 이 말을 떠올렸다.
종말은 그렇게 왔어요. 나는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었고 의사 선생님이 옆에 계셨죠. 선생님은 무척 놀라셨어요. 어떻게 이렇게 큰 귀지가 있냐고. 이십오 년 의사 인생에 처음 본다고. 그동안 들리기는 했냐고 농담까지 하셨죠.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갸웃하시더니 이것 좀 보라고 화면을 가리켰어요. 전 봤어요. 지구였죠.
선생님, 이건 지구가 아닌가요? 재밌는 농담을 다 한다고요? 그러고 보니 얼추 닮았다고요? 네? 이걸 꺼내자고요?
지구 종말은 제가 막을 수 있었죠. 저만 참으면 됐으니까요. 드르륵, 드르륵. 행성이 굴러가는 천둥 번개 소리는 저한테만 들렸어요. 뭔가가 무너지고 있었죠. 우르르르, 우르르, 쾅쾅. 의사 선생님이 제 귓속을 쑤신지도 벌써 몇 분이 지났어요. 선생님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기 시작했죠. […] 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건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란 걸. 다른 것일 리는 없단 걸요. […] 그렇게 된 거예요. 제가 세상을 멸망시켰죠. 쾅.[1]우지안, 『다정이 병인 양하여』, 안티무민클럽AMC, 2023, 13-15쪽. 실은 이 책은 읽지 않았다. 낭독극(우지안 작·연출, 서울: 책방 풀무질, 2023.10.15/22)으로 … 각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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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생각했다. 세상에, 이만한 자의식 과잉이라니. 제가 세상을 품고 있었고 제가 세상을 멸망시켰다니.
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여러 해 전에 인터넷에서 자주 보았던 사진 한 장. 중국집 전단이 붙어 있는 사진 속 화이트보드에는 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자의식 과잉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되찾자!
1.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기 ^-^
2. 모두가 나에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는 점을 깨닫기
무슨 이야기인지 알므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으므로, 특별히 말을 꺼내지는 않고서 종종 생각했다. 자의식이 과잉되지 않는다면 무슨 말이든, 무슨 참견이든 할 필요가 있을까. 모두가 자신의 밖으로 넘치지 않는다면 세상이란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침잠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요를 지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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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 과잉에는 아마도 혹은 적어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자’는 평범하거나 심지어 보잘 것 없으면서 의식만 비대하여 성가시게 구는 사람. 아마도 저 사진 속 문구가 경계하는 것은 이쪽일 것이다. 반대로 의식을 아무리 줄여도 이미 ‘자’가 너무도 커다래서 언제나 비집고 나가버리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다시 적어도 둘로 나눌 수 있겠다. 자기가 여럿이거나 울퉁불퉁하여 도무지 가두어 둘 수 없는 사람. 그리고 실은 그다지 크거나 복잡하지 않지만 세상이 허락한 자리가 너무 좁아서 애초부터 비져나가 있는 사람. 아마 이 둘은 앞의 둘보다는 덜 분명히 나뉜다. 자기란 본래 여럿이고 울퉁불퉁하므로.
둘 중 어느쪽이든 후자에 속할, 제 귓속에 지구가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구다정은 사방으로 넘친다. 상처와 죽음을 갈구하고 폭력에 기꺼이 노출되고 불의에 분개한다. 동물원을 탈출했다 사살당한 퓨마와 세월호 탑승객에게 이입하고 동시에 그들을 죽인 세상에 이입하며 (더없이 직접적으로) 책임감을 느낀다.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삶을 확인하면서, 어쩌면 그래서겠지만, 세상 모든 고통이 제 탓인양 군다. 그래서 미안해 한다. 미안해 해서 미안해 한다. 이따금 미안하지 않으면 그래서 또 미안해 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며 죄책감과 책임감을 반복해 겪고 상연한다.[2]말 그대로, “다시 시작할게요”라고 말하며 다시 시작한다. 이 무력한 책임감,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고 다만 괴로워 하고 말할 수 있을 뿐인 이 책임감이 세상을 구성하고 고친다. 주어진 자리가 너무 좁아서 자신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두가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나까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는 사람들이. 이 못난 자의식 과잉인 사람들이.[3]인용할 문장이 실린 쪽을 찾아 책을 펼쳤다 본 이연숙(리타)의 작품 해설 「망가진 여자애가 반복한다」에서 이런 말을 발견했다. “극의 말미에 … 각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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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돌아갔다. 책을 읽기 전에, 공연을 보기 전에 먼저 들었던 어느 문장들로.
친구가 그랬거든요. 연애라는 게 그 사람이 노란색 옷을 싫어하면 그 사람 만날 때 굳이 노란색 옷을 입지 않는 거 아니냐고.
근데 내가 노란색 옷을 입은 채로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노란색 옷이 나한테 너무 중요하면 어떡하지?[4]같은 책, 77쪽. 뒤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다 말해 버리고 만 거예요. 나는 네가 원하는 여자친구가 될 수 없어… 그냥 가만히 있을걸. 병신 같이.” … 각주로 이동
마찬가지로 자의식 과잉이어서 개의치 않을 ― 정확히는 저 자신만을 개의할 ― 사람들을 상상한다.
연애라는 게 그 사람이 노란색 옷을 입고 있으면 노란색을 좋아해 주는 그런 거 아닌가.
이어서
근데 내가 노란색을 보면 구역질이 나게 태어났을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노란색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면 어떡하지?
혹은
근데 내가 노란색을 알아볼 수 없게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아무리 봐도 노란색인 걸 모르면, 그래서 매번 그냥 지나치면 어떡하지?
↑1 | 우지안, 『다정이 병인 양하여』, 안티무민클럽AMC, 2023, 13-15쪽. 실은 이 책은 읽지 않았다. 낭독극(우지안 작·연출, 서울: 책방 풀무질, 2023.10.15/22)으로 보았고 그 대사를 떠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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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말 그대로, “다시 시작할게요”라고 말하며 다시 시작한다. |
↑3 | 인용할 문장이 실린 쪽을 찾아 책을 펼쳤다 본 이연숙(리타)의 작품 해설 「망가진 여자애가 반복한다」에서 이런 말을 발견했다. “극의 말미에 이르러 다정은 교수가 “화대”로 준 복권의 “잠재력”을 비꼬듯 이어 받으며 “세상 전체를 배면, 그걸 낙태할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다정이 부치걸에게 던진 농담인 “지가 없으면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믿는 새”는 다정 본인에게 곧장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다정이 병인 양하여〉가 살기 위해 자해를 반복하는 망가진 여자애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 여자애가 세상 전체를 망가뜨리는 반-영웅 서사이기도 한 이유는 바로 다정의 숨겨지지 않는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다정은 이 나르시시즘 때문에 숭고해지지 않을 수 있다. 이건 다정 자신에게도, 다정과 같은 나르시시스트가 필요한 우리 모두에게도 다행인 일이다” (같은 책, 124-125쪽). |
↑4 | 같은 책, 77쪽. 뒤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다 말해 버리고 만 거예요. 나는 네가 원하는 여자친구가 될 수 없어… 그냥 가만히 있을걸. 병신 같이.” 바로 앞은 이렇다. “걔가 너는 내 거야, 너는 내 거야, 했을 때, 마음속으로 좋았어요. 걔가 그랬거든요. 다정이 너는 어느 선까지는, 그 안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어. 그 선 안에서 너는 자유롭고 안전할 거야.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너도 단단히 미쳤구나, 싶어서. 그치만 생각해 보면 그게 독점적 연애의 본질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