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엉키기 / 하릴없이 엉켜도 어떻게든 안녕하기

무대 밖에서 겪고 있는 이별 혹은 상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손나예는 객석 한쪽에 앉아 있다. 관객을 마주 보고는 차마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객석에 앉았다고,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청한다. 한동안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조금 더 숨을 수도 있었는데 — 그는 객석 가운데열 왼쪽 끝에 앉아 있고 적어도 뒤통수를 대책 없이 노출하고 있다 — 애매하게 저런 데 앉았네, 하는 생각이 스칠 때쯤 다음 고백이 이어진다. 엉키기, 를 생각할 때 가장 솔직할 수 있다고 했던가.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엉키고 싶다는, 그것도 무대에서 낯선 이들과 엉키고 싶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계단을 걸어내려와 무대에 선다.[1]“이 작업은 미완성된 ‘안녕히 엉키기’라는 안무의 스코어에 관객을 초대한다. 엉키기란 풀기 힘들 정도로 서로 한데 얽히게 되는 것을 … 각주로 이동

상처 주는 몸도 상처를 받는다(역시 정확하지 않다)는,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에서 인용한 문장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발로 땅을 구르며 반작용의 충격을 전한 후에는 역시 같은 책에서 본, 고문 받는 자의 몸만을 사용해 그 몸을 고문하는 한 방법을 시연한다. 곧추 서서 하늘을 바라 보게 세워두고 침을 삼키게 하는 것. 그 상태로 말을 잇는 그의 피로와 고통이 점차로 선명해진다. 말을 마친 그는 자기가 목이 좀 안 좋다며, 누군가 와서 제 목을 제자리로 돌려놓아 달라고 청한다. 관객 한 명이 나가 조심스레 그의 목을 젖혀 세운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관객들(의 몸)과 엉키는 것. 그래서 준비한 것은 두 가지의 워밍업과 그 시연. 여럿이 둥글게 서서는 몸이 맞닿을 때까지 간격을 좁혀 가며 각자가 감각하는 공간 — 그 범위와 침범 — 을 확인하기, 바닥에 눕거나 엎드려서는 눈을 감고 이동하기. 몇 개의 하얀 상자가 서서 시야를 가리는, 그밖에는 없으므로 휑하게 펼쳐진 무대에서 그는 혼자 이런 동작들을 선보인다. 바닥을 기는 그의 몸이 상자 뒤로 사라졌다가 반대편에서 나타난다.

다시 관객을 청한다. 방금의 그 동작들을 함께 할 여남은 명이 필요하다. 이제 나는 약간의 궁금증을 갖는다. 객석에서 내려가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 엉킨다, 는 것은 그의 욕망이다. 같은 욕망을 가진 이들이 있겠지만 아직 그의 엉킴은 보지 못했으므로 확실치 않다. 누군가는 마찬가지로 엉키고 싶어서, 또 누군가는 무용이 궁금해서, 또 누군가는 그를 돕거나 그의 가까이에 있으려 자리를 털고 일어섰을 것이다. 내게 엉키기는, 혹은 침범하고 훼손하고 침범 당하고 훼손 당하는 것은 대개 욕망이기보다는 의무이거나 어쩔 수 없는 조건에 가깝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첫 번째 워밍업은 금세 끝났다. 두 번째 것은 조금 오래 걸렸다. 눈을 감은 채 여러 낯선 몸을 스치거나 피하며 기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이동을 마치고 자리를 잡자 손나예가 일어나 몸들을 잡아 끈다. 여기에도 한참이 필요하다. 각자가 정한 자리에 흩어져 있는 몸들을 모아가 조금씩 겹치거나 얽히게 둔다. 혼자서는 쉽지 않아서 또 도움을 청한다. 세 명이었나, 무대로 내려가 몸들을 주워 모은 관객이 또 있었다. 두어 부위가 두어 겹씩 쌓여 있고 때로 접힌 채 꼼짝 않고 (혹은 못 하고) 누운 몸들을 향해 그는 이대로, 몸끼리 닿은 데를 떼지 않고, 일어서 보자고 제안한다. 끙끙대고 휘청대는 몸들을 보며 객석에 남은 이들 사이에서 조금씩 웃음이 나온다. 엉거주춤한 몸들에서도, 탄식이나 신음과 함께, 웃음이 나온다. 엉거주춤한 몸들은 종종 제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 상대들과 말을 주고 받으며 임무를 수행한다.

각자 자신의 공간을 확인하기, 서로의 공간에 들어가 상대의 몸을 느끼기, 대화하며 간격을 조정하기. 워밍업을 마쳤으므로 이제 엉킬 차례다. 여기저기 서 있던 상자들은 둥글게 모여 벽이 된다. 벽마다 양쪽에 한 명씩이 자리한다. 바깥에 선 사람이 상자를 밀면 안쪽에 안거나 누운 사람이 밀린다. 원이 좁아지고 몸들이 가까워진다. 더 좁아질 수 있도록 몸을 웅크리고 서로의 품을 파고 든다. 그렇게, 몸들이 엉킨다. 이제 궁금증은 의구심이 된다. 저들이 무엇을 원해 저기로 나아갔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더 잘 엉키기 위해 몇 번을 흩어졌다 다시 엉키는 동안 그들이 나눈 대화 중에는 엉키고 싶다는 말도 있었고 엉켜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것을 묻지 않고서 그저 그들을 미는 벽의 힘 혹은 그 성격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 전에 이미, 그들은 오직 남의 힘을 통해서 겹쳐지고 쌓였다.

안녕히 엉키기, 보다는 하릴없이 엉켜도 어떻게든 안녕하기를 시도하는 중으로 보였다. (손나예는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것을 강조했고 언제든 멈출 수 있도록 몇 가지 장치를 준비했다.) 엉키고 싶거나 말거나 엉킬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밖에는 길이 없으므로, 묻지 않고 닥쳐드는 것들에 속절없이 밀려 엉키는 와중에도 서로를 감각하고 서로를 해하지 않을 틈을 찾는 연습으로 보였다. 아무도 밀지 않으면 사라지는 벽이라면, 그러니까 어떤 약속과 협의로 쉽게 없앨 수 있는 벽이라면, 그다지 유용한 연습은 아니리라. 나는 여기에 멈추어 있다. 벽이 사라지지 않을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저 벽이 어떤 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회니 구조니 하는 것들의 힘인지, 혹은 다칠 것을 알면서도 엉켜드는 일밖에는 알지 못하는 이를테면 본능이나 충동의 힘인지, 그조차 아니라면 그저 가까이 있고 싶고 닿고 싶다는 소박한 욕망일 뿐(인데 안타깝게도 그 결과가 늘 엉키고 긁히는 상처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

객석에도 여전히 (가장 많은 수의) 관객이 있다. 그는 벽을 밀거나 그에 밀리는 이들이 아닌 객석에 남은 이들에게도 한 가지 일을 맡겼다. 바라보기, 위험해 보이면 말해주기, 혹은 더 파고들 틈이나 더 잘 파고들 방법이 보이면 말해주기. (나를 비롯해) 객석에 남은 이들이 실제로 가장 많이 한 일은 웃기이다. 남의 것이면서 아주 크지는 않은 고통은 웃음으로 이어지곤 하는 법이니까. 벽이 좁아지고는 웃음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다. 벽이 그들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보이는 것은 그 위로 삐죽 솟은 머리꼭지나 발끝뿐이었기 때문이다. 몇 명은 무대로 내려가 벽 너머로 엉킨 몸들을,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이런저런 의견을 건넨다.

여전히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저기에서 엉키고 있는지를 궁금해 하고 애초에 안녕하고 싶다면 적어도 저런 식으로 엉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내 곁에서 다른 이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건,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보고 있건, 저 무리 속에 들어가지 않은 이상 의도와는 — 관객 자신의 의도와도 창작자의 의도와도 — 상관 없이 관음하는 위치에 놓이고 만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시도 때는 도중에 상자를 치웠고 엉켜서 혹은 엉키려 꿈틀대는 몸들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이제는 머리꼭지나 발끝을 훔쳐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위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했다. 관음하지 않으려면, 가볍게 웃지 않으려면, 저들이 왜 저기에 있는지 조금이라도 알아내려면, 저 무리에 파고드는 수밖에 없겠지. 안녕하고 싶은 나는 그저 눈을 감기로 한다.

References
1 “이 작업은 미완성된 ‘안녕히 엉키기’라는 안무의 스코어에 관객을 초대한다. 엉키기란 풀기 힘들 정도로 서로 한데 얽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몸을 가진 우리가 서로와 관계 맺고 함께 있기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로서, 침투와 훼손, 침해를 동반한다. 그것은 우아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우악스러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안녕히 엉키기는 바로 그러한 순간의 몸의 조건, 이를테면 언어가 부서지는 순간에 말해지는 것들, 한데 얽혀 구겨지고 어그러진 몸들의 말하기와 듣기를 탐구한다.” 손나예 안무, 〈안녕히 엉키기〉(서울무용센터 입주예술가 작업공유회), 서울: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2023.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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