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극은 몇 년 전에 본 《갈매기》(1896)에 이어 두 번째다. 언젠가 《바냐 아저씨》(1899)를 본 듯한 기분도 들지만, 아마도 대학에 다니던 시절 곳곳에 붙은 동아리 공연 포스터를 여러 번 보았을 뿐이다. 예정에 없이, 그리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 공연을 못 보게 된 이가 티켓을 주어 ― 《벚꽃동산》(1903)[1]김광보 연출,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2023.05.04-28.을 보게 되었다. 배경은 벚꽃동산이 보이는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저택. 주인공은 벚꽃동산과 저택의 주인이자 곧 파산을 앞둔 이를테면 몰락귀족인 라네프스카야(백지원 분)와 주변 인물들. 누가 가족이고 누가 지인이며 누가 하인인지를 파악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긴 이름에 익숙해지는 데에도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곳곳에 배치된 유머들이 원작의 것인지 각색의 일환인지 궁금해 하는 데에도 꽤 시간을 썼다.
무대에는 동산은 물론 벚꽃도 보이지 않는다. 벚꽃동산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인물들은 객석 방향을 바라본다. 무대에는 몇 개의 가구가 있고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테두리를 따라 약간의 공간을 두고 유리벽이 서 있다. 투명하지만 그 너머는 검은색 벽이므로 유리벽은 거울이 된다. 객석등이 꺼지기 전까지는 내 뒤로 않은 관객들의 표정이 보였다. 공연이 시작된 후로는 배우들의 뒷모습이, 때로는 돌아선 그들의 앞모습이 비쳤다. 이따금 배우들 대신 거울을 보았지만 대개는 그러지 못했다. 이래저래 시간이 필요했던 탓에.
등장인물이 많지만 대개 선명하게 대비되는 편이다. 라네프스카야는, 그리고 그 혈연들 ― 오빠 가예프(강신구 분), 딸 아냐(이다혜 분) ― 은 말하자면 낭만가들이다. 사랑과 여흥을 좇는다. 혹은 벚꽃동산의 아름다움과 저택에 쌓인 추억을 좇는다.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었지만, 그래서 걱정은 하지만,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들의 지인으로 역시 몰락한 지주인 피시치크(곽은태 분)는 하석상대下石上臺로, 그러니까 빚을 빚으로 막으며 삶을 즐긴다. 평민 출신으로 라네프스카야의 양딸이 된 바랴(정슬기 분), 젊은 하인인 두나샤(홍지인 분), 아샤(장석환 분)는 해야 할 일을 하거나 자그마한 실리를 좇는다. 라네프스카야 집안 농노의 자식인 로파힌(이승주 분)은 수완 좋은 상인이 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들의 사이 어딘가에 둘 수 있을, 평생을 하인으로 살며 늙었지만 구질서를 그리워하는 피르스(박상종 분), 아둔한 집사 예피호도프(송철호 분), 수 년째 대학생이자 가정교사일 뿐인 룸펜 혁명가 트로피모프(윤성원 분), 역시 가정교사이지만 마술사이자 예술가인 샤를로트(하지은 분).[2]이름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도 끝내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조금 전에 검색해서 채워 넣었다. 러시아인은 이름이 길고 애칭도 따로 있으므로, … 각주로 이동
사랑을 좇아 파리에서 지내던 라네프스카야가 저택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진 돈은 이미 다 썼고 남아 있는 저택과 동산은 경매로 넘어가기까지 몇 달 남지 않은 시점이다. 로파힌은 몇 번이고 벚꽃동산을 별장용지로 개발하면 재산을 잃지 않고 돈도 벌 수 있으리라고 제안하지만 라네프스카야는 아끼는 동산을 해치고 싶지 않다. 친척에게서 돈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희망만을 품은 채,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에 울상이 되면서도, 여전히 돈을 허투루 쓴다. 경매날이 될 때까지도. 친척에게 얻은 약간의 돈으로는 동산을 되살 수 없었다. 열띤 경쟁 끝에 최고가를 부르고 저택과 동산을 낙찰 받은 것은 다름아닌 로파힌이다. 농노 해방 이후 무능력한 귀족 가문이 몰락하고 그 부를 해방 농노 출신 신흥 상인이 인수하는 (그리고 그 주변에서 노동자 혁명이 조금 언급되는) 이야기였지만 이 세대 교체, 체제 교체가 아주 말끔하지는 않았다. 라네프스카야에게는 실은 별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 빚도 어쩌지 못하면서 피시치크에게 돈을 융통해 주는 것이 합리적인 일은 아니다. 건강도 좋지 않다. 하루하루, 스스로 몰락을 향해 거침 없이 나아간다. 그러나 라네프스카야는 여전히 이곳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자 거의 유일하게 타인의 행복을 신경 쓰는 사람이다. (가예프를 비롯해, 위기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이들이 더 있지만 이들은 대개 자신의 행복을 즐기는 데 그친다.) 아직도 벚꽃동산의 아름다움에 웃는다. 서로 마음을 품은 채 몇 년이 가도록 진척이 없는 아냐와 로파힌의 사이를 이어주려 애쓰고, 트로피모프도 외면하는 부랑인(박진호 분)에게 선뜻 금화를 내어준다. 이 ‘철없는’ 행동들에 주변에서는 속이 타지만, 언제든 털고 떠날 수 있다면 구태여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두려움에 떨며 경매 결과를 기다리긴 했지만, 결국 집과 동산을 잃었다는 소식에 잠시 아연하긴 했지만, 지체 없이 돌아간다, 파리로. 사랑을 찾아.
그리하여 불행한 것은 라네프스카야가 ― 일단은 은행원이 되어 살 길을 찾은 가예프도, 어떻게든 붙들고 있던 땅에서 자원이 나와 상당한 돈을 벌게 된 피시치크도, 트로피모프를 통해 알게 된 다른 삶을 꿈꾸는 아냐도 ― 아니다. 바냐는 멀리 어느 집의 가정부로 가게 되었지만 이 집의 양딸로서 하던 집안일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일을 계속할 테다. 두나샤, 아샤, 샤를로트, 예피호도프의 삶도 조금은 달라지겠다만 당장 행불행을 들이밀 만한 변화는 아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 유일하게 불행한 사람은 로파힌이다. 그는 원하는 부를 얻었고 농노였던 아버지를 괴롭게 했던 지주의 집안에 대한 복수라면 복수랄 일도 해냈지만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눈물 흘리고 울부짖는다. 일로서든 여행으로서든 많은 곳을 다니겠지만 결국은 이곳에 매여 있다. 그는, 유일하게,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인물들의 이면을 비추는 거울이거나 화려한 장식이었던 저택의 유리벽은 그만을 위한 감옥이 된다. 무능하고 대책 없는 당신이 잃은 이 저택을, 내 아버지의 땀으로 지은 이 저택을 내가 갖게 되었다며 울부짖는 그만이, 유리벽 너머에서 말한다. 그의 말소리는 좁은 공간에 울리고 막혀 먹먹하다. 그는 끝내 바냐를 붙잡지 못한다. 싫지는 않다고 몇 번인가 말했을 뿐이니 애초에 붙잡고 싶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이런 것은 모두, 잃은 자의 허세이거나 가졌던 자의 저주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바뀌어 농노가 해방되고 귀족이 몰락한다 한들, 여전히 행복은 ― 재산과 지위는 잃었으나 품위와 고상함은 잃지 않은 ― 고귀한 이들의 것이라고 애써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빼앗겼던 제 것을 되찾으려는 결기를 한낱 원한과 억울함으로 깎아내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반쯤은 마찬가지로 무능하고 대책 없는 자로서, 또 반쯤은 이제 신흥 상인들과 반목하는 자로서, 몰락한 존재의 자유와 기쁨을 생각하며 보았다. 되찾을 길 없는 것을 그리워 하는 대신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는 자유와 기쁨을.
라네프스카야가 떠나고, 가족과 하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로파힌마저 출장을 나서며 텅 비어버린 저택에서 무언가가 꿈틀댄다. 흰 천으로 덮어둔 가구들 사이에서 잊혀졌던 피르스의 늙은 몸이 부스스 일어난다. 세 면만이 유리로 막혀 있었던 무대는 이제 사방이 모두 막힌다. 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그는 홀로 무언가 뇌까린다. 길게 말했는데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말들, 자신만이 과거로 남겨지는 것을 서러워 하는 말들이었으려나. (연극이 으레 그렇듯) 모든 것이 육성이었던 이 무대에서, 그의 이 독백만이 마이크와 스피커를 거쳐 흘러 나왔다. 이 독백만을, 남김 없이 잊었다.
↑1 | 김광보 연출,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2023.05.0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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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름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도 끝내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조금 전에 검색해서 채워 넣었다. 러시아인은 이름이 길고 애칭도 따로 있으므로, 무대에서 불린 것과 다른 이름을 적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