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은 이 영화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잠깐 고민했다. 아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푸싱 데드Pushing Dead》(톰 E. 브라운, 2016)라는 제목의 함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 문구의 뜻 자체를 여전히 알지 못한다. 작년 언젠가 알게 된, 올해 초 언젠가 본 영화다. 몇 명인가에게 소개하면서는 건조하게 HIV/AIDS를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라고 말했다. 하지만 매번 덧붙였다.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지만 웃기다고 할 수는 없고, 헛웃음이 나오게 하는 영화라고. 그런 면에서, “영화제를 순회하며 계속해서 따뜻한 환대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톰 E. 브라운의 장편 데뷔작에서 그[HIV 감염을 코미디의 주제로 잘 다루었더라면 발휘되었을] 잠재력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는다”는 말이 가혹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1
그러나 나로서는 코미디라는 분류가 썩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헛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들은 조준에 혹은 균형잡기에 실패한 결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종류의, 딱 이만큼의 짧고 가벼운 웃음을 목표로 삼았다는 느낌이다. 코미디라는 장르에 흔히 기대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그러나 웃음이 가질 수 있는 같은 힘을 목표로 삼고 코미디라는 타이틀을 달았다는 느낌이다. 돌려 말하자면, “따뜻한 환대”를, 혹은 LGBT 영화제에서의 상을 받은 것이 그저 소재 덕이라거나 감독―그 역시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그것도 감염자는 물론 사망자 역시 그저 늘어가기 시작하던 1985년에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인물이다―혹은 관객들의 정체성 덕은 아니니라는 것이다. “따뜻한” 환대를 받기에 이 영화는 외려 너무 차갑다. 적어도, 흔히 접해온 HIV/AIDS를 다루는 방식들에 비해서는 말이다. 돌봄의 온기도 투쟁의 열기도 내비치지 않는다.
주인공 댄은 스무 해 넘게 HIV와 함께 살고 있는 인물이다. 신통치 않은 시인이자―타자기 앞에 앉지만 도통 써내지를 못한다―오래된 클럽의 직원―문지기이자 시 경연poetry slam의 사회자―이다. 어느쪽도 크게 벌이가 되는 일은 아니므로 그는 건강보험 혜택으로 약값을 해결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 잠깐까지는 그랬다. 생일선물로 백 달러를 송금 받은 것이, 그 돈이 보험 보장 대상자 구간을 벗어나는 소득으로 집계된 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이제 적어도 한동안은 약값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한 달에 삼천 달러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영화도 불합리한 보험 정책에 열을 올리지는 않는다. 소득 재산정에 관한 행정 절차를 어떻게든 빨리 끝내보려 공무원을 닦달하지도 않는다. 요행이나 속임수로 (약국에서는 보험 대상자 여부를 담당부서와의 통화로2 확인한다) 당장의 약을 구해보려, 헛된 시도를 할 뿐이다.
아마도 좀 더 적극적이거나 합리적일 행동에 나서는 대신, 그는 대체로는 한가한―어쩌면 하릴없는―일상을 유지한다. 친구의 인생 상담을 해준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파울라에게 벼룩시장에서 산 기이한 원숭이 인형을 선물한다든가, 밥의 부부싸움을 중재해 주려 든다든가, 아니면3 데이트를 한다든가. 처음에는 인형을 보고 기겁했던 파울라가 어느새 원숭이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넋두리를 하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일 테다. HIV 감염인에게조차도 스무 해 넘게 감염인으로 산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아득한 일이었던 탓에 데이트는 매끄럽지 못하다. 밥은 영 기껍지가 않다. 문지기라고는 해도 문을 지키는 데에는 소질이 없다. 사회자라고 섰지만 영 미덥지 않다. (끝은 어땠더라, 일단은 그랬다.)
그가 챙겨 먹는 약은 일곱 알이다. 아니면 여섯 알이다. 늙은 밥 역시 약을 많이 먹는다. 아마 여덟 알, 어쩌면 일곱 알. 아무튼 밥이 한 알 더 많이 먹는다. 둘은 누가 더 약을 많이 먹는지를―누가 더 아픈지를, 누가 더 약한지를, 누가 더 죽음에 가까이 있는지를―경쟁한다. 발모제였던가, 그건 안 쳐준다는 것이 댄의 입장이다. 밥이 한 알 더 많이 먹지만 그걸 빼면 동률이다. 노년의 밥과 장년의 댄은 엇비슷하게 죽음에 가까이 있는 셈이다.4 댄은 득의양양하다. 영화에서 몇 안 되는 웃긴 장면,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웃은 몇 안 되는 장면들 중 하나다. 또한 우습다. 쓸데 없는 경쟁으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의 모습이. 특히, 노년만큼이나 죽음이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애쓴다면 꽤 멀어질지도 모를 댄이 열을 올리는 모습이.
하지만 여기서―그리고 영화 전체에서―가장 우스운 꼴을 당하는 것은 삶 자체다. 살아야 한다는, 살기 위해 갖은 수를 써야 한다는, 오래도록 그래야 한다는 지상명령을 통해 지금과 같은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삶 자체. 결코 비웃을 수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비웃음 당하는 삶 자체가, 지금 여기서 가장 우스운 꼴을 겪는다. 병이나 노화 혹은 이런저런 사고의 가능성들이 드리우는 위협에도 포기하지 않고 삶을 꾸려 나가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지친 자는 삶을 살 수 없으므로, 지칠 줄 모르는 용기를 통해서야 비로소 삶의 시간은 가능해진다. 그러나 병이나 노화 혹은 이런저런 사고의 가능성들이 드리우는 위협을 웃어 넘기고 죽거나 말거나 하는 식으로 사는 데에도 (적어도) 다른 종류의 용기가 필요하다. 삶의 시간이 불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가능한 어떤 삶이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임무를 용맹히 수행하는 것과는 다른, 명령 없이도 나아가는 삶이.
두려운 것을 뒤틀고 비꼬아 우습게 만드는 것은 훌륭한 수법이지만 두려운 것이 두려운 힘을 행사하게 두면서도 두려울 것 없는 것인 양, 그러니까 싸울 필요 없는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여기서 비웃음을 사는 것은 살아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삶이지 순전한 삶(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도 삶에 가해지는 위협들도 아니다. 삶에 가해지는―이 영화에서는 HIV/AIDS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역학에서 비롯되는―위협들을 우스운 것인 양, 그냥 살면 되는 것인 양 속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댄은 일곱 알인지 여섯 알인지의 약을 챙겨 먹고 있다. 가볍게, 우습게, 살 것이다. 언제 어떻게 죽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친구들과 함께.
- Justine Lowe, “‘Pushing Dead’: Outfest Review,” The Hollywood Reporter, 2016. ↩
- 전화기로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ARS였으려니 한다. ↩
- 여기까지는 2020년 8월 25일에 썼다. ↩
- 여전히 헷갈린다. 어쩌면 저 한 알을 빼면 댄이 한 알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