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티사르의 자동차: 현대 예멘 여성의 초상화』(페드로 리에라 글, 나초 카사노바 그림, 엄지영 옮김, 미메시스, 2015.). 제목의 “자동차”라는 단어와 “현대 예멘 여성의 초상화”라는 부제만 보고 골라든 책이다.1 (인티사르는 주인공의 이름이고 아마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이름인 듯하지만 책을 펴기 전까진 사람 이름이리라고 아무 근거 없이 짐작했을 뿐이다.) 예멘이라는 나라에서의 여성의 삶, 아마도 저항적인 어떤 삶의 방식, 을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다른 이유 하나를 들자면 만화책이라는 점. 이슬람 문화권에서의 여성의 삶에 대해 보다 풍부한 정보를 제시할 줄글로 된 책 몇 권을 알지만 아직 펼쳐 본 적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게으름이다. 그 다음 이유는 만화에서 제시되는 매우 분명한 시각적 표식 — 히잡, 부르카, 니캅 같은 — 이 갖는 힘이다. 절반쯤은 이 역시 단순한 게으름으로 인해 선입견에 기대는 일이고, 나머지 절반쯤은 그것이 상징하는 극단적인 억압과 그것이 또한 동시에 보여주는 상황의 복잡성을 의식하는 때문이다.
이슬람권의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한 여성 이야기를 읽었던 때들과 마찬가지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책이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한’이라는 말을 확신을 갖고 하지조차 못할 만큼, 내가 구분하지 않고 읽기 때문이다. 예멘에 대해 아는 바는 이전과 다름 없는 곳에 머물러 있다. 이슬람 문화권이라는 것, 내전 발발지라는 것. 이 책을 통해서 얻은 정보가 아닌 것은 물론 다른 책을 통해서 얻은 정보도 아니다. 오래 전 ‘블로그 친구’를 통해 접한 이야기다. 예멘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다. 랜덤블로그니 이웃맺기니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털사이트 블로그 시스템을 통해 맺은 인연들 중 몇몇은 나 혹은 상대가 블로그를 폐쇄한 후에도 이어졌지만 이 친구는 아니다. 그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시점에 예멘과의 연결고리도 끊어졌다.
인티사르는 자가용을 몬다. 그의 아버지는 존재조차 모르는 차다. 자신의 신변에 관한 서류에 스스로 서명할 수 없는, 남성 친적이 보호자 — ‘왈리’ — 로서 대신 서명해 주어야만 하는 예멘의 여성으로서 살아 간다. 집을 나설 때면 니캅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는 삶을 산다. 하지만 니캅 뒤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삶을 산다. 남녀가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는 나라에서 산다. 여자들만 모인 곳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삶을 산다. 이슬람권 여성의 생활을 전할 때 흔히 하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당사자인 딸 대신 혼인신고 서류에 서명할 수 있거나 혹은 딸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 해고를 청하면 그곳의 결정권자가 군말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곳은 아니지만 그래봐야 결혼이나 퇴직을 종용할 수 있는 곳인 한국과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중, 여고, 여대에서 가장 짐승이자 가장 인간이었다던 친구들을 떠올린다.)
최근에는 그 문장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연장으로는 아버지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누군가 이 문장과 함께 ‘가진 것이 아버지의 연장일 뿐일 땐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 선언의 맞고 틀림, 혹은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연장을 내가 쥐었을 때조차도 그것은 여전히 아버지의 연장인가, 를 어느 아침 출근길에 생각했다. 연장은 연장일 뿐이므로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직 갖지 못한 새 집의 설계도가 문제일 것이다. 새로운 집을 설계할 건축술을, 혹은 집 없이 살 각오나 용기를, 갖고 있는지 혹은 가질 수 있을지가 말이다.
다른 문제가 있다면 아마도, 연장을 빌린 경우일 테다. 아버지의 연장이야 빼앗지 못하고 빌려 왔다 해도 갚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실은 그냥 하기 쉬운, 그리고 딱히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의심을 해 보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의 이야기를 쓴 페드로 리에라는 스페인 출신으로, 예멘에서 일을 하게 된 아내와 함께 그곳에 갔다. “예멘에서 산 지 열 달이 지나고서야 네 명의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녀들과 만나는 자리에는 언제나 내 아내가 있었”다. 반대로 이 아내, 그러니까 알리에노르 베노아2는 많은 여성들을 직접 만났다고 한다. 인티사르의 이야기는 40여 명과의 인터뷰를 거친 후에 쓴 것이지만 인터뷰이 보호를 위해 이야기의 구성은 신문 자료 등에 더 의존했다고 했다. 하지만 인티사르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예멘 여성”을 모델로 삼고 있다.
(억압의 도구인) 니캅을 방패 삼아 얻을 수 있는 자유, 혹은 (억압의 도구인 대중문화에 속하는) 리한나아 비욘세의 노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용기 같은 것들을 (또 한 번 답 없이) 생각한다. 종종 저항을 내세우는 것은 그러지 않고서는 저항과 순응이 쉽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종 삶 자체의 힘과 희망을 역설하는 것은 실은 그러지 않고서는 희망도 힘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니캅이나 마호메트나 코란에 대해 배운 것은 아마 곧 잊을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 하나를 기록해 둔다.
“나는 집에 굴러다니던 어떤 잡지에서 이 기사를 발견했다. 예멘에서 낙타 점프를 스포츠로 즐긴다는 내용이 거기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잡지 이미지에는 낙타를 나란히 세워 놓고 그 위를 뛰어넘는 식으로 멀리뛰기를 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기사에 따르면 바하데르 M. 코바이세이라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운동을 했는데, 1997년이 되고서야 프로로 전향했다고 한다. 글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다. 읽다 보면 죄다 사실 같으니 말이다. 하여간 예멘에서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말인지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다.”(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