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연습 ― 주황, 《온전한 초상》

이것은 주황의 사진전 《온전한 초상》(서울: 플랫폼 엘, 2016)에 관한 글이지만 나는 전시는 보지 못했다. 도록을 보았을 뿐인데, 그것이 아쉽지는 않다. 스터디 모임에서의 발제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작성 중이던 전문을 모임에서 공개하지는 않았다. 《온전한 초상》에 부친 박만우, 양효실, 장서윤의 글을 주로 인용했는데 주황의 홈페이지에는 이 중 양효실과 장서윤의 글이 실려 있다.

초상-풍경

박만우는 주황의 개인전 《온전한 초상Her Portrait》을 소개하는 글 도록의 첫머리에, 전시의 기획자이자 그 전시가 열린 공간의 관장으로서 쓴 글1 을 “갓난 아기에게 엄마의 얼굴은 생애 최초로 마주하는 풍경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주황의 이력이 초상사진 작업과 풍경사진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글을 조금 전개한 후 또한 이렇게 쓴다.

주황의 사진에서 초상과 풍경은 동등한 위상을 차지한다. 작가에게 초상은 풍경이고 풍경 역시 초상이 된다. 초상은 타인의 얼굴이고 풍경은 자연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결국 작가가 추구하는 사진은 타자의 초상 혹은 외부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 뒤에는 주황의 초상사진이 “무표정 사진”이라는 특성을 가짐을 지적하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에 걸친 〈얼굴〉이나 〈노래방〉에서부터 2009년의 〈소풍〉, 2016년의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에서 공개된 〈의상을 입어라〉, 그리고 같은 해의 개인전 《온전한 초상》에 걸린 〈출발〉 연작까지 일관된 특징이며 이국적이거나 강렬하지 않은2 풍경을 찍은 〈바꾸어진 풍경〉(2008)이나 〈임시 물류창고〉(2010) 연작에도 어렵지 않게 붙일 수 있는 말이겠지만, 이 전시의 나머지 절반을 이루는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에는 들어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무표정’에서조차 어떤 표정을 읽어내므로 무표정이라는 단어는 어렵다. 특히 여성의 웃지 않는 얼굴은 너무도 쉽게 불쾌감 혹은 반항심의 표현으로 읽힌다. 또한 언급한 사진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종, 사실은 가벼운 미소 정도를 띠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무표정”이라는 말은 다만, 작가든 모델이든이 구체적인 감정이나 분위기를 지시하기 위해 특정한 표정을 선택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를 예외로 남겨두거나 혹은 무표정이라는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기를 포기함으로써 초상사진과 풍경사진 사이의 등호를 또한 약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미소 짓지 않는 초원과 미소 짓지 않는 사람, 화내지 않는 강물과 화내지 않는 사람, 이런 것 너머에서 이 풍경들과 초상들이 공유하는 무언가를 또한 어렴풋이 감지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무언가를 가리키기에 가장 좋은 말은 ‘거리감’이라고 느낀다. 작가가 (또한 그 작업들이 전시된 공간에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는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로서는) 꽤나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풍경들, 그리고 작가가 일상적으로 교류하는 사람들,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 아마도 ‘여성’으로서, 때로는 ‘동양인 여성’으로서 ―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찍은 작업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면, 작가 스스로 쓴 “판단력 보류”라는 말을 빌어와도 좋을 것이다.

장서윤은 〈출발〉에서 보이는 무표정함을 이전 작업들에서도 찾으며 이렇게 쓴다.

〈얼굴〉, 〈노래방〉과 마찬가지로 〈공원에서〉(2008)에서의 인물은 물론, 풍경을 담고 있는 〈Altered Landscape〉(2006-2010)와 서울 근교의 임시창고를 찍은 〈Temporary Storage〉(2010)에서도 대상은 무표정하다. 표정을 갖고 있어야 할 것들이 표정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표정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에서 빗겨나 있는 주황 작가의 사진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낯선 감정은 대상으로서의 응시를 거부하는 동시에 판단 또한 유보시키면서 재현된 이미지 너머의 것을 보도록 촉구한다. 무표정함은 그 자체로 저항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판단력 보류는 가장 강력한 의미의 거부라 할 수 있다. 사진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립적으로 보이는 것을 다큐멘트 형식으로 위장하는 것이지 사실은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3

물론 이러한 서술에서도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연작은 열외에 놓이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작업에는 다른 종류의 무표정함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품 광고를 연상시키는 화면 속에서 주인공들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이런 사진이 미술관에 걸릴 때, 특히나 “외모지상주의”라는 비판적 뉘앙스를 띤 단어를 제목으로 갖고서 걸릴 때 흔히 기대하게 되는 분명한 패러디나 풍자, 냉소 같은 것이 여기에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외모지상주의, 특히나 단 하나만의 기준만을 가진 채 부과되는 외모지상주의에 무언가 불만을 갖고서 기획했음이 틀림없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데도 이 작업은 차갑다. (적어도 기대하기로는) 동일하게 경험하는 차별이나 배제를, 또한 그런 가운데 갖게 되는 동질감이나 연대의식을 기반에 두고 있는 〈얼굴〉 연작이나 여성 비정규직 감정노동자라는 뜨거운 이슈를 다루고 있는 〈의상을 입어라〉 연작이 차가운 바로 그만큼이나 말이다.

거리감

물리적으로 가까울지라도, 또한 심리적으로 역시 가까울지라도, 피사체와, 또한 주제의식과 적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수행한 작업으로 느꼈다는 뜻이다. 작가 ― 특히나 어떤 개념에 주목하며 시각적으로는 동일한 구도가 반복되는 연작 형식을 택하는 작가 ― 가 세계와 갖는 거리감, 미국에서 생활한 한국인, 꽤 긴 외국살이 끝에 비로소 돌아온 사람, 여전히 종종 국경을 넘지만 비행기 공포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일상과 갖는 거리감 같은 것들을 주워 섬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직업/작업 때문에 두 나라를 오가는 지인들을 공항까지 태워주거나 공항에서 픽업하길 즐기는, 말하자면 하릴없는 시간을 타인들에게 기꺼이 대여하는 여자(작가)”라는 식의 정보 혹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나 기록하는 사람, 예술가가 아니라 동네 여자, ‘주는/나누는’ 사람, ‘관계’ 속의 여자로 있길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추측 또한 있으므로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4

물론 많은 경우 그러하듯 그렇고 그런 속성들이 얽혀서는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컨대 나는 “화장품 회사들이 여성 고객에게 ‘넌 피부가 하얘야 예뻐’와 같은 무의식을 강요하는 것 같다”며 “여성들이 하얗고 잡티 없는 피부를 원하는 것은 사회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거나 “요즘 청년들이 ‘탈조선’을 꿈꾼다는 말을 듣고 ‘출발’ 연작 아이디어가 떠올랐다”와 같은 말들5을 보며 세상의 현재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은 물론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거리를 둔, 혹은 원한 것 이상으로 거리를 두게 된 결과물이 이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조금 강하게 말하자면 무능력, 혹은 실패를 의심한다는 뜻이다.

장서윤은 주황의 초상 작업이 “초상의 외피를 입고, 그동안 초상이 재현해온 사진의 문법 체계를 비판하는 것, 다시 말해 초상 이면에 초상이 감추고 있는 것을 들춰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며 이로써 그의 사진들이 명백한 초상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모호하고 애매하게 다가[오는]” “위장된 초상”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해 보이는 것들을 전면에 드러내 놓고서는 그 이면의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을 넌지시 암시하면서 관람객들에게 다음 수순의 자리를 넘겨준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특성이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에서 특히 두드러진다고 여기는데, 그가 체험한 이 위장의 작동 방식은 의미심장하다. “화장품 광고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배우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이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알아챔’을 통해 그는 “사진 속 여성이 아닌,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화장품 광고 그리고 이를 작동시키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6

이러한 깨달음은 박만우의 문장들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연작의] 사진을 처음 대면하는 관객들은 이 사진들이 각종 매체의 화장품 광고에서 이미 익숙해진 이미지 패턴을 지닌 것이어서 사진 속의 여성을 으레 광고 모델로 간주한다. 하지만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대형으로 확대된 사진 속의 낯선 얼굴, 광고에서 봐왔던 것과는 좀 다른 시선 처리 방식 등을 통해 그 얼굴들이 유명 영화배우나 연예인 혹은 패션모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7 모호하거나 차가운 ― 위장된 사진들이 내어주는 자리에서 이들은 사진 속 얼굴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분류하며 그것을 ‘알아챔’ 혹은 ‘깨달음’으로 칭함으로써 피사체의 속성을 소환하고 ― 피사체를 탓하고 ― 있는 것이다. 작가가 유지하는 거리감, 혹은 작가가 시도하는 판단의 유보는 관객에게 전이되지 않는다.

부작위

물론 이것은 다만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가 조금 ‘난해한’ 작업임을 뜻할 뿐일지도 모른다. 비판의 대상을 분명히 지목하면서도 비판의 제스처를 강력하게 취하지 않는 이 작업 앞에서 관객은 자신의 힘으로 그 미지근함을 다른 무언가로 변환해야 한다. 작업 스스로는 별다른 실마리를 주지 않으므로, 쉬운 길을 찾게 마련일 것이다. 작가와 모델의 관계, 작가의 권위와 모델의 개성 정도에 머무는 것이 관객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따지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다. 장서윤과 박만우의 깨달음 혹은 알아챔을 비난했지만, 나 또한 성실하거나 뛰어난 관객은 아니므로, 저들의 문장을 읽지 않은 채 무언가 썼다면 같은 문장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출발〉은 쉬우므로 문제를 차단한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쉽다는 말은 단지 ― 익명의 여성들이 ‘편안한’ 혹은 ‘꾸밈 없는’ 차림새를 하고서 국경을 넘으려는 참이거나 넘은 참이라는 점에서 ― 여성이 드디어 갖게 된 약간의 권력과 그것을 통해 얻게 된 월경의 자유를 기뻐하거나 반대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이 어떤 불안정성과 유동성의 촉진일 뿐이라는 점을 슬퍼하거나 하는 사이에서 선택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만 가능하다. (주황은 “탈조선”을 포착했고 박만우는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남성들이 독점해왔으며 배타적인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장소로서의 공항이 여성들에게도 열린 점을 짚었으며 (장서윤은 이를 인용했다) 양효실은 “이 여자들이 육화한 디아스포라는 정치적인 망명으로서의 디아스포라의 무거움에서 비켜있다”고 쓴다. 나는 이 모두에서 어떤 가벼움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진들은 이들이 어떤 이유로 비행기를 타는지는커녕 어떤 기분으로 타는지조차 ― 기쁜 탈출인지, 희망찬 이주인지, 아니면 불가피한 도주인지, 비상을 즐기는지, 추락을 두려워하는지, 이유야 어쨌건 하늘과 바다를 모두 피하고 싶지는 않은지 같은 것들을 ―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데에 있을 것이다. “계열성”이라든가 “표면”이라든가 하는 것들. 박만우는 〈의상을 입어라〉 연작 이후의 주황이 자신의 작업에 계열성을 도입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로부터 대량복제-대량소비의 구도 속으로 뛰어들며 작품에 (“숭배가치cult value”는 흘려 보낸 채) “노출가치exhibition value”만을 남겨두는 시도를 읽는다.8 그리고 양효실은 “작가의 사진은 깊이, 존재론을 전달하지 않는다. 작가의 사진은 표면에 대한 것이고, 내부가 막혀 있거나 없는 상황, 기존의 경험으로 환원시킬 게 별로 없는 감각의 출현을 위한 것이다.”라고 쓴다.

(“노출가치”에 대해서도 “감각”에 대해서도 아는 바는 거의 없지만, 어쨌거나 말을 이어 보자면) 이렇다 할 것을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않는 작업 ― 앞에서는 “무능력 혹은 실패”라는 말을 썼다 ― 조차도 하는 일이 있다.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보는 이를 불안하게 하는” 일이다.9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이미지에 아우라를, 그리고 제의적 가치를 부여하는 피사체로서의] 사람이 사진으로부터 물러날 때, 바로 거기서 전시적 가치가 비로소 제의적 가치를 능가한다. 이러한 과정에 전시적 가치의 자리를 부여했다는 것은 앗제Eugène Atget의 비견할 수 없는 의의이거니와, 그는 1900년경 사람이 없는 시점에서 파리의 거리를 포착했다. 사람들이 그는 파리의 거리를 범행현장처럼 찍었다고 말한 것은 아주 정당하다. 또한 범행현장에는 사람이 없다. 범행현장을 찍는 것은 증거[확보]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사진 촬영은 앗제에 있어서 역사적 과정에서의 증거물이 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진의 은폐된 정치적 의미가 된다. 이미 그 사진은 어떤 의미에서 수용을 요구한다. 자유롭게 표류하는 명상은 그 사진들에는 더이상 걸맞지 않는다. 사진은 보는 이를 불안하게 한다; 보는 이는 느낀다: 사진에 이르려면 어떤 길을 찾아야만 한다고.10

인물을 풍경처럼 포착하는 주황의 사진들을 두고 ‘사람이 사진으로부터 물러났다’고 말해도 좋다면, 뒤의 문장들 또한 적용해도 좋을 것이다. 《온전한 초상》의 작업들, 혹은 그 이전의 작업들을 보며 무작위와 부작위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초상 작업들만을 볼 때 주황의 작업은 일관되게 (대개는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동양인 여성을 담고 있으므로 무작위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판단 보류’를 조금 틀어서 말한다면, 부작위라는 말을 써도 좋을 것이다.11 나는 주황의 작업들이 피사체를 선택하고 결과물을 선택하고 그것을 내어 보이는 모든 과정에서 부작위에 기대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부작위의 틈을 메우는 것이 곧 관객의 몫이 된다. 그러나 실은, 현대의 관객은 그 몫에 의무감을 갖지 않는다. 쉽게 불안해 하지 않는다. 벤야민과는 다른 시대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 단련되어 있다. 이미 몇 가지의 길들을 배워서 알고 있으므로, 적당한 곳을 찾아가 쉴 수 있다. (격변기의 잠깐을 제외한다면 늘 이럴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무능력 혹은 실패”를 말하는 것은 종종 별 의미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벤야민은 저 문장들에 이어서 “같은 시기에 화보신문들이 그에게 이정표를 세워주기 시작한다. 이정표가 옳은 것이건 틀린 것이건 그건 마찬가지이다. 화보신문들에서 설명문구가 최초로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고 썼다. 종종 틀린 것일 그 문구들이 불안을 잠재우기 않기를, 그 문구들 앞에서 나의 불안이 잠들지 않기를 바란다. 배워서 아는 몇 개의 길들, 혹은 사진 아래 붙어 있는 문구가 가리키는 길, 의심 없이 그리로 가 자리를 잡는 대신, 불안을 유지하며 ― 그러나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편이 좋겠다. 아무런 답도, 아무런 길도 기대하지 않고서 사진 앞을 서성이는 편이, 길을 찾기에는 오히려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1. 「주황의 온전한 초상」. 이를 비롯해 도록에는 양효실과 크리스티나 리쿠페로의 비평 「떠 있는 여자들을 떠도는 감각」,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가 실려 있다. 이 글에서는 셋 중 앞의 둘을 참조하는데, 이 책에는 쪽수가 표기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후에서의 인용은 쓴 이의 이름만으로 표시한다.
  2. 이국적이라는 말로 ‘뜨거운 남국의’ 같은 식의 감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전면에 때로는 낯선 산세가, 때로는 낯선 수종이, 때로는 낯선 하늘의 색이나 물의 색이, 또 때로는 낯선 건축물이 배치된 모든 경우 ― 말 그대로 ‘이국’의 것으로 읽히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로 썼다. 최근에는 알프스 산맥의 어딘가를 찍은 사진에 한국의 등산로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판이나 노점들을 합성한 사진을 보았는데, 그 사진의 게시자가 말한 대로 낯선 무언가를 보여줌으로써가 아니라 익숙한 것을 제거함으로써 또한 그런 감각을 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렬하다는 말은 채도가 높은 색의 사용, 대비도가 두드러지는 배치, 혹은 초광각 렌즈를 사용해 잡은 구도 같은 것들을 생각하며 썼는데, 실은 앞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3. 장서윤,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초상(들)」, p. 104, 『미술세계』 51호, 미술세계, 2016, pp. 100-105. 인용된 작가의 말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따 온 것이다. 한편, 양효실 역시 이와 같은 판단하지 않음, 혹은 판단 유보에 대한 문장들을 썼다.
  4. 큰따옴표로 묶은 구절 및 “자신의 일상과 갖는 거리감”에 귀속시키며 열거한 정보들은 양효실의 글에서 인용.
  5. 변지은, 「사진작가 주황 개인전 ‘온전한 초상’… “한국 여성의 정체성 묻는다”」, 《여성신문》 2016년 12월 2일자 기사. 두 인용문 중 앞의 것은 주황이 직접 한 말이며 뒤의 것은 그의 말을 기자가 정리한 문장이다.
  6. 장서윤, 앞의 글, p. 101.부연해 두자면, 박만우는 무표정함이라는 특성을 감정의 배제, 무관심함과 연결짓고 그것과 그 이면에 있는 작가의 견고한 주제의식이나 이 작업의 사회적 의미 같은 것들이 형성하는 구도를 “위장”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그것이 〈출발〉 연작에서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
  7. 또한 박만우는 저 깨달음의 문장에 이어 이 사진들을 촬영하는 장면을 상상해 길게 서술한다. “〈Liking What You See: A Documentary〉의 여성들은 광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선 기성 모델들과는 달리, 카메라 뒤에 선 작가와 긴장된 특정한 관계 혹은 심리적 태도를 설정한다. 그들은 관람자가 일반적 광고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광고 모델에게 기대하거나 예상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와 다른 무엇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이 유명 광고 모델들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아우라도 없고 그저 스타의 스타일을 쫓하 하기 위해 메이크럽과 포즈에 최선을 다해 시뮬레이션하는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본래 자아를 노출하고 있다. // 이 촬영 작업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작가와 이중적 계약을 맺고 있다. 소위 ‘화이트닝’ 화장품 광고를 모방하는 예술작품 사진 촬영을 전제로 그들은 메이크업, 의상, 헤어스타일, 그리고 포즈를 위해 노력한다. 이들이 계약에 동의하는 이유는 이번 촬영을 통해 자신들의 행위모델인 스타들과 일순간이나마 동일화하는 만족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때 카메라 뒤의 작가는 이 의도된 ‘착각의 체험’을 최대한 만족하게 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 작가는 연출된 장면을 ‘연기’하는 모델에게 은연중에 그 모델만의 고유한 개성이 노출되기를 기대하고, 모델은 자신이 스타를 모방하기는 하지만 그 부족한 차이가 예숙작업의 차원에서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주황 스스로도 “모델분들은 이 프로젝트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의 포즈를 취함으로써 모델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 과정의 어디쯤에서 젊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자신의 욕망도 투사”한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인 과정은 조금 다르다. “촬영에 들어가면 대체로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고 카메라를 응시하라고 하고, 가끔은 화장품 광고 모델처럼 포즈를 취해보라고 디렉션을 주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면서 많이 긴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면서 좀더 자신의 표정이나 포즈를 컨트롤하게 됩니다. 이러한과정 속에서 모델들의 표정은 어색함, 불편함 혹은 자연스러움을 미세하게 드러내죠. 〔…〕 리터칭해서 완성된 사진을 보여주면 모델 하셨던 분들의 반응이 모두 다릅니다. 인생 사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분도 계시고, 자기와 너무 달라서 이상하다는 분도 계시죠. 컴퓨터로 보정을 많이해 너무 인공적이라고 좋아하지 않는 분도 있고요. 저는 이러한 모델들의 (나아가 관객들의) 서로 다른 반응이 이 작업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주황, 「온전한 초상」, pp. 189-191, 『황해문화』 제 97호, 2017, pp. 178-205. 사진이 주가 되는 가운데 짧게 덧붙여진 글에서 인용한 것이며, 앞의 두 인용구는 뒤 인용문에서 생략한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8. 그는 〈의상을 입어라〉의 설치 방식, 그리고 이 작업을 시작으로 주황이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한 것을 전환의 지표로 꼽는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 이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사진은 대량생산‧대량소비와 맞닿아 있었으며 주황의 이전 연작들 또한 반복에 크게 기대고 있으므로, 나로서는 거기에서 단절과 선회를 읽는 것이 조금은 의아하다.
  9. 박만우에게서 인용한 “숭배가치”와 “노출가치”는 발터 벤야민의 용어이다. 나는 “제의적 가치”와 “전시적 가치”라는 역어에 더 익숙하며, 아래 인용한 글에서도 같은 역어를 쓰고 있다.
  10. 발터 벤야민, CP Group(강유원, 김성열, 김재석, 박수민, 서민우, 신기철, 지주형) 옮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 p. 7, PDF 파일(이 파일이 첨부된 게시물은 찾지 못했다).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11. 사전적으로 부작위는 응당 해야 함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을 당위로 설정할 것인가는 언제나 논란 속에 있으므로, ‘응당 해야 함을 알면서도’는 일단은 빼는 편이 나을 테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는 것 ― 주황의 작업에 부작위라는 말을 붙이려면 이 단어의 의미가 이 정도로는 약화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곳에 있는 어떤 공백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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