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제목이다. 다른 것이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쉽게 의미를 갖다 붙여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좋다. “려행” ― ‘여행’이 아니라 ― 이라는 단어가 그랬다. 떠나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붙은 이 제목은 “살고있는 고장을 떠나 딴 지방으로 오가는 일”을 뜻한다.1 물론 ‘여행’ 역시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혹은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님”을 뜻하므로2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적어도 “려행”의 풀이에서는 목적이 명시되지 않는다는 점, ‘가다’나 ‘다니다’가 아니라 ‘오가다’라는 동사가 쓰인 것 따위를 들 수도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사전을 뒤적인 것은 영화를 다 본 후의 일이다. 거슬러 말하자면 오가는 일을, 좀 더 정확히는 돌아가는 일 혹은 적어도 그것을 염두에 두는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려행”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단어이므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밖에서 그곳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붙이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탈북. 그야말로 목숨을 건 월경. 그리고 남한으로의 입국 혹은 귀순(역시 뒤늦게 찾아보았는데, “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거나 순종함”이라는 뜻이었다).3 목숨마저 잃을 것을 각오하고 감행하는 이동이므로 쉽게 온전한 단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곳에 남은 누구도 만나지 못해도 좋다는 마음, 그곳의 모든 것이 싫어서 떠나고 싶었던 마음, 같은 것들을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실은 언론 따위를 통해서 이미 종종 보아왔듯, 그들은 그곳에 두고 온 가족, 친구나 이웃, 누군가의 묘,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 그러한 함께 함을 가능케 했던 문화와 분위기, 이 모든 것을 그리워하곤 한다 ― 많은 그리움은 때로 체제에 대한 그리움으로까지 보일 만큼, 굳게 얽혀 있다. 그러나 꼭 그리움이 문제는 아니다. 새로이 정착한 곳이 좋을 때도 싫을 때도, 적어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고향은 비교대상으로서 되돌아 올 것이다. 남겨둔 것이 없을 때조차, 미련도 그리움도 없을 때조차,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을 때조차, 그들은 그곳을 반복해서 방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려행”이라는 단어가 크게 걸린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감독이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닐 테다. 〈려행〉(임흥순 감독, 반달 제작·배급, 2019)을 소개하는 리플렛에는 “영화를 만들면서 북한을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알다시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북한을 여행할 수 없는데 이런 현실을 〈려행〉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 밝은 미래를 여행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싶다”는 감독의 말이나 주인공이자 인터뷰인 이들을 가리키는 “여행자”라는 단어 같은 것들이 실려 있다. 내가 받은 느낌 혹은 내가 했던 생각, 자유로이 한반도의 남북을 오가는 여행, “밝은 미래”를 향하거나 거치는 여행, 그리고 ― 그런 말들 위에 적혀 있는 ― 주인공들의 여정을 가리키는 “용감한 여행”이라는 말들은 모두 조금씩 미끄러지고 엇갈린다.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왜 이응이 아니라 리을로 시작하는지도 불분명한 저 제목을 가장 마음에 든다고 내세우기가 저어된다면, 대신 이(런) 미끄러짐을 들어도 좋을 것이다.
시사회 상영 전 잠깐 스크린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네며 감독은, 영화로서의 만듦새야 어떻건 적어도 중요한 자료는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렇다 할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당사자들이 출연해 북한을 벗어나 남한에 들어온 과정이나 북한에서의 삶, 혹은 남한에서의 삶에 대해 길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다지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브로커, 사기, 수용소, 인신매매, 차별, 출발 희망 따위의 익숙한 키워드들로 요약될 수 있을, 이미 여러곳에서 조금씩은 접해 본 이야기들이다. 물론 여간해서는 북한의 실상이나 탈북의 과정을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남한 국적의 사람들에게는 자신 있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릴 만한 일관된 자료는 없으므로 여러곳에서 조금씩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하지만, 이 영화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감독은 이 영화가 자료가 되는 것을 애써 차단하는 듯 보인다. 혹은 이 영화는 자료가 되는 것을 스스로 차단한다. 약간의 자료 화면을 제외하면 〈려행〉은 당사자들의 인터뷰 장면과 그들이 배우로 등장하는 연출된 장면들의 교차로 구성된다. 인터뷰 장면은 걸으며 대화하는 이들의 뒷모습, 앉아서 말하는 이들의 앞모습이나 옆모습들인데 종종 원경이다. 그럼에도 인터뷰어는 프레임에 잡히지 않는다. 묻는 말의 소리 또한 스피커를 통과하지 않는다. 여전히 북한 어딘가의 말씨가 묻어나지만 자막은 없다. (노래 가사만이 자막으로 나왔던 것 같다.) 꽤 기이하거나 묘한 모습으로, 그들은 말한다. 적어도 그들의 발음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남한의 관객들은 종종 단어들을 놓친다. (김일성 사적비를 날마다 닦던 이야기를 하는 음성과 함께 나오는) 동상처럼 서 있는 사람을 가꾸는 다른 사람의 모습,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을 떠오르게 할 만큼 양식화된 방식으로 월경 시점을 재연한 대목 같은 영상들은 무언지 모를, 또한 이유 모를 유모어(유머러스함, 이라고 썼다가 고쳤다)의 냄새를 풍긴다.
크게 보아 새롭지는 않다고 해도 여전히 독자성과 구체성을 띤 것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자료’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료가 되는 것을 방해 받는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어떤 분위기다. 나로서는 ‘어떤’이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주인공들이 제 경험을 거치고 소화한 나름의 방식들도, 콕 집어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연출 방식도, 쉽게 한 단어로 묶을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다. 누구에게서나 다르므로 언제나 새롭고,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으므로 언제나 귀한, 그런 ― 자료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라도 ― 것들이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려행〉은, 여성들이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북한의 체제 내에서 여성으로서 갖게 되는 (가져야 하는) 역할과 태도, 여성이기에 겪어야 했던 환란들 같은 것들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딱 그만큼이다. 그것이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래서 그 삶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런 이야기들은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이라면, 이 영화가 가치 있기 위해서는 이런 지점에서라도 새롭거나 힘 있는 무언가가 있었더라면 좋을 것이라고, 나는 또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그저 방기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적어도 다른 모든 요소들과 일관된 궤 위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일관됨을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려행”이라는 말로 다시 돌아간다. 여행이, 혹은 려행이, 얼마나 길어질 수 있는지를 ― 언제쯤이면 끝이라고 말해도 좋은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