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했을 당시 혼자 극장에 가서 보고 왔다던 친구가 권했던 것인데, 이렇게 늦게서야 보게 되었다. 그나마도, 원래 보려 했던 “러브 토크”라는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 상태가 안 좋았던 탓에 대타로 말이다. 말하자면, 친구의 추천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뜻이다. 의도치 않은 이러한 박정함이 쌓이고 있다. 요즘들어 주변에 관심을 둘 여유도, 의욕도 부쩍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일부는 몸 상태가 안 좋은 데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은 마음의 상태가 안 좋은 데에서 오는 것이다. 게을러지고 있다는 뜻이다. 삼엽충의 시간이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해대는 것만 봐도 뻔한 일이다.
베아트릭스 포터, 영화에서 그는 정신병자로 나온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1900년대의 영국에서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그린 그림을 친구로 삼아 그것들과 대화하고, 땅이 개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모한 금액으로 경매에 입찰하는―늘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공상에 잠겨 사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다른 말이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그를 바보로 본 원 형제가 괜히 한 번 출판 기회를 준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어쩌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환자 쯤으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르주아 가정 미혼 여성의 히스테리성 어쩌고 하는 수치스러운 병명을 달고 말이다.
비록 온전히 자연 속에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동물들을 보고 동물들과 함께 뒹굴며 자라났다. 어린 시절 몸으로 경험한 동물들과의 소통을 그림으로 옮겨 또한 그 그림들과 온전히 소통하고자 했을 것이다. 덕분에 그는 혼자서도 외롭지 않았으며, 대화하지 않아도 막히지 않았고, 상상해도 오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삶의 어떠한 원리에서 오는 것일 터이다. 동물들과 뒹굴며 몸에 익힌 어떠한 원리, 그것이 그의 삶을 온전히 아름다운 것으로 나중까지 이끌었음이리라. 그러한 삶에서 오는 순수함과 따뜻함, 그리고 그것들의 사이에서 가능한 어떠한 종류의 소통과 사랑, “미스 포터”에는 그것이 담겨 있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바보―혹은 정신병자로 살면서 그가 선취했던, 삶의 혹은 삶에 대한 작은 혁명. 그것을 찾아야 한다. 세상의 언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를 찾는 것, 세상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찾는 것, 세상의 가치가 아닌 자신의 가치를 찾는 것, 그것이 그 혁명을 찾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내내 그림을 그리고 책을 내는, 그리고 사랑하는 작은 일들에 기쁨을 느끼는 별것 없는 인물로 나오지만 그의 삶은 사실, 이 세상―적어도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사는 법,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원리를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많은 아픔을 갖고 산 인물이었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쩌면 상상하지 않아도 좋을 아픔들을 갖고 산 인물이었다. 이 영화가 고마운 것은, 어쩌면 그 아픔들을 숨겨 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혁명이니 뭐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아픔을 숨겨 두어 내가 그것을 못 본 체 지나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 아픔들을 내게 전하는 영화였다는 나는, 그의 삶을 두고 감히 혁명이니 뭐니 하는 말을 지껄일 수 없었을 터이다. 감히 남의 삶에 대해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터이다. 마치 동화책같이, 좋은 것만을 보여 주기에 고마운 영화인 셈이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기껏해야 삼엽충 따위에 관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기껏해야 나에 관한 것이다. 빼곡히 들어찬 고통들, 내가 다가갈 수조차 없으면서 그냥 지나칠수도 없는 그 고통들의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다. 가끔 찾아오는 휴지休止, 그곳에서 나는 모자란 이야기나마 꺼내 볼 엄두를 낼 수가 있다. 사실은 그 휴지 속에도 고통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기에, 그래서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때가 흔치 않기에, 이런 넓은 틈을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가끔씩 들이쉬는 상쾌한 공기만큼이나, 가끔씩 보이는 반짝이는 물결만큼이나 즐겁고 고마운 일이다.
"Miss Potter"
안팎 / 2008.07.02.
나도 미스포터 한번 봐봐야 겠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