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개인전 〈nothing〉(서울: 레이져, 2017.12.01.-12.14.)에 전시된 이정식의 작업은 신파스러운 데가 있다. 눈물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나는 아마 울었을 것이다. “私は セックスワーカをしています(저는 성노동자입니다)”라고 외치며 일본에서 죽임 당한 게이 성노동자를 기리는 영상이나 ‘내가 HIV/AIDS 감염인인 것을 알아도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까’ 하고 뇌까리는 영상을 보며 감정이 흔들리지 않기는 어렵다. 보다 미니멀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설명이 붙어 있는, 약을 챙겨 먹지 못한 날을 공란으로 표시한 작업이나 챙겨 먹지 못해 남은 약을 녹여 캔버스를 칠한 작업 같은 회화 작업들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너무 직설적이라는 뜻이다. 영상 속에서 이정식은 종이를 칠하고 찢는다. 종이를 칠하고 찢으며 게이 사우나에 대해서든 HIV/AIDS 감염인의 고통에 대해서든 직설적으로 말한다. 새하얀 화면 가운데에 자리한 그는 찢긴 종이에 파묻힌다. 그럴싸한 화면이 진행되는 내내, 마치 관객들이 화면은 보지 못해도 좋다는 듯이, 그는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는 말들을 하고 또 한다. 시각적인 것만 놓고 보면 어쩌면 전형적인 현대미술 작업의 하나이지만, 그 장면들과 함께 토해지는 음성은 다큐멘터리에 그대로 실려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문장들이다.
여기에 이정식의 전략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이라는 것, 그리고 HIV/AIDS 감염인이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저 가십이 되기 딱 좋은 소재다. 한 번 알려지기만 한다면, 이정식이 어떤 작업을 하든 저 둘은 꼬리표처럼 따라 붙으며 작업들의 1차적인 해석틀이 되고 말 것이다 ― 게다가 그 해석들마저도, 작업보다도 훨씬 신파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정식의 작업 방식은 어쩌면 이러한 난관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말하기 전에 스스로 말한다. 신파적인 프로파간다로 오용되기 전에 스스로 신파적인 프로파간다를 만든다. 이런 접근을 통해 그는 동성애자이자 HIV/AIDS 감염인인 작가에서 동성애와 HIV/AIDS에 대해 말하는 작가가 된다. 그에 관해 말해야 할 것은, 그에 관해 가십이 될 수 있을 것은, 이미 스스로 말하고 있으므로 관객들은 다른 지점들을 찾는 수밖에 없게 된다. 관객들은 그의 작업을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다르게 읽기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많은 관객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 관한 가십이 떠도는 것을 온전히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는 하나의 역전이 일어난다. 그는 가십의 소재가 되면서도 그저 가십의 소재로만 남지는 않는다.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 관객들보다 우위에 있게 된다. 그가 이미 한 말들만을 반복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고자 한다면, 그럼으로써 결국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고자 한다면, 관객들은 역시 무어라도 읽어내기 위해 애쓰는 수밖에 없다.
그는 할 말을 마쳤다. 이제 관객들의 차례다. 그가 말하지 못한 것, 혹은 그가 직설적인 말 뒤에 숨겨낸 것들을 찾아 낼 ― 비평하는 관객으로서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간 자리를 점할 차례 말이다.
이정식, 신파의 전략
안팎 /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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