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무언가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쓸쓸함을 달랜 후 다시 읽기 시작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황정은의 소설은 쓸쓸합니다. 제목이 뭐였더라, 저번에 읽고 친구에게 선물한 다른 책을 읽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마 평범하게 예닐곱 편쯤의 소설이 묶인 단편집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소설을 읽고부터 나는 쓸쓸해졌습니다. 마저 읽기가, 조금은 힘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도 녹록치 않았을, 그러나 보상은 흔치 않은, 그런 삶이 등장합니다. 역시나 쓸쓸한 책의 첫부분을 읽으며 나는,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것이 삶에의 다짐일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는, 어쩌면 훨씬 더 마음 약한 이의, 주억거림이었습니다.(실은 저 문장의 앞뒤로 빈줄이 있었으므로, 이야기하다 말고, 살아보겠다고 다짐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책 표지를 둘러싼 종이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습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가끔 어떤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약간의 사랑을 쏟곤 하는 저입니다만 인간이 사랑스러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아는 것은 다만, 인간이란 하찮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힘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찮은 것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힘,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야기는 때로 착각하게 합니다. 이것이 지금 느껴지는 것만큼 하찮지는 않다고, 여기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여기에도 끝은 있을 것이라고, 그때쯤 되면 무언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쯤이면 괜찮은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하찮은 삶이지만 한 편의 이야기를 꾸릴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은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글쎄요, 이야기의 끝에 어떤 의미라는 것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실은 황정은의 글도 그랬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픈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그의 글이 쓸쓸하다는 것, 쓸쓸한 한 사람이 저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점뿐입니다. 그 정도라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나의 이야기의 끝에, 누군가가 나의 기분을 알아준다면, 그 정도로 괜찮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야기의 힘이란
안팎 / 2017.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