꿰매고 이은 사진들, 산동네를 말하다

꿰매고 이은 사진들, 산동네를 말하다

* 부산의 고은사진미술관은 올해부터 매년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해 부산을 기록하도록 지원하는 ‘부산 참견錄’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작가로 선정된 강홍구는 지난 3월부터 5월에 걸친 기간에 <사람의 집―프로세믹스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부산의 산복도로들 곁 산동네 집들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7월에 이 작품들은 서울의 트렁크 갤러리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내가 본 것은 트렁크 갤러리의 전시 <사람의 집―Proxemics : 근접 공간 학 / 생존의 건축 –부산->이었다. 이하에서 큰따옴표로 직접 인용한 것은 모두 작가 노트에서 가져 온 것이다.(작가 노트는 아래에 링크된 주소로 가면 볼 수 있다)

안창17

ⓒ강홍구 <안창17>(80*240cm, pigment print, 2012)

프로세믹스 proxemics

프로세믹스. 프록시믹스나 프락시믹스 정도로 읽어야겠지만 한국에서는 프로세믹스라고들 많이 쓰는 모양이다. 근접학, 공간학, 혹은 근접공간학 등으로 옮긴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제안한 이 학문분야는 인간이 속한 문화적 공간을 다룬다. 근접공간학이란, 관계맺음에 필요한 물리적 · 심리적 거리 또는 한 공간 안에서 인간의 행동 양식을 탐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홍구는 작가 노트에서 이 단어를 “공간 사용법”으로 번역한다. 그에 따르면 이 용어는, “사람과 사람이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에서부터 인간이 어떻게 공간을 생산, 조직하고 소비하는지를 거쳐, 문화에 따라 다른 공간에 대한 인식과 사용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 단순히 공간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공간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행동이 어떻게 문화화 되고 개인화 되어 실천되는지를 아우르는 용어”라는 것이다.
 
작가는 카메라를 통해 근접공간학적 연구를 한 셈이다. 그 집들, 그 골목들에서 주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집들과 골목들이 주민들의 삶을 어떻게 구획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를 이런 연구로, 이런 작업으로 이끈 것은 “집과 마을의 다양성과 비좁은 공간을 탁월하게 이용하는 효율성”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든 주거면적을 넓히기 위해 일층 보다 이층을 조금 더 넓게 지은 ‘한 뼘 이층’”을 예로 든다. 그는 산동네를 구성하고 있는 집들을 “생존의 건축, 집짓기의 밑바닥, 건축가 없는 건축, 원초적 건축” 같은 말로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를 쓴다면 “토속적 건축을 의미하는 버네큘러 건축(vernacular architecture)”이라고도 칭한다.

그러니까, 이 사진들이 담고자 한 것은 집들의 외형이 아니라 집으로 대변되는 삶 자체다. 거대하고 화려한 외관으로 풍경과 사람을 압도하는 ‘건축 예술’이 아니라, 그저 삶의 공간이 되기 위해 지어진 집들, 삶을 압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구획하는 집들이 이 사진들에 담겨 있다. 이 집들이 내뿜는 아우라는 건물의 ‘작품성’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낡고 기운 집들과 2013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간극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한 채의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집들의 과거가 상상이 간다”고 한다. “움막과 루핑집에서 판자집, 그리고 벽돌집을 거쳐 이층과 삼층으로 진화”하며 “다양한 집들이 문자 그대로 유기적으로 생장하고 변모”해 온 역사에 이 집들의 아우라가 있다.
 

우암03

ⓒ강홍구 <우암03>(100*120cm, pigment print, 2012)
 

에토스와 건축

서구의 예술사와 미학사에서, 건축이 ‘예술’로 분류된 역사는 길지 않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로 분류된 것은 – 예술이라는 말의 정의조차 지금과는 다르지만 – 시와 음악 정도였다. 회화를 비롯한 몇몇 장르들은 기나긴 투쟁을 통해서, 근대에 와서야 예술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 · 회화 · 조각이 시나 음악과 함께 ‘예술’이라는 범주로 분류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전의 건축은 신에게, 혹은 그 자신의 용도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감히 말해도 좋다면, 예술로서의 건축은 예술가의 영감이나 자의식, 혹은 그의 미감에 종속되어 있다.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작품 중 ‘빌라 사보아(Villa Savoye)’라는 주택이 있다. 기둥으로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고 벽을 마치 도화지처럼 자유로운 공간으로 남겨둔 그의 작업들을 대표하는 이 건물은 그의 미의식이 가장 잘 반영된 작품 중 하나이다.

그런데 건축가들, 혹은 이 집을 작품으로 감상한 이들은 그 아름다움을 찬양했지만, 정작 이 집에 사는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당시는 방수기술이 부족했고, 지붕을 평면으로 짓고 옥상정원을 꾸민 탓에 비가 샜던 것이다. 평가는 분분하지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의 미감을 중심에 둔 건축물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 중 하나다.

기술적 난점들이 극복된 요즘의 건물들은 더 노골적이다. 화려한 경관을 위해 전면 유리로 꾸며진 건물들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냉난방이 다 수월치 않은 걸로 모자라, 이런 건물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사방의 시선에 종일 스스로를 노출시켜야 한다. 건축주나 건축가의 마음에 흡족한 건물이라도, 정작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이 건물들은 불편한 곳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건물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외면한 작품으로서의 건물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건축의 덕목으로 ‘에토스(ethos)’를 든다. 에토스란 개인의 성격이나 인품을 가리키는 희랍어다. 이 단어가 한 사회나 공동체에 적용되면, 그 사회의 성격이라 할 수 있는 구성원들의 공통된 생활양식이나 윤리를 뜻하게 된다. 건축의 측면에서 에토스란 다름 아닌 건축물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방식이다. 에토스를 고려한 건축, 즉 에토스적 건축이란 건축물을 단순히 작가에게 속한 작품이 아니라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적합한 공간, 가장 그들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보는 건축이라 하겠다.

건축 전문가들이 지은 건물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곳에 거주할 사람 스스로 지은 집이 더 좋은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 랜드마크인 거대 건축물을 짓는 유명 건축가가 아니라, 그곳에 오래 살아온 무명 건축가가 그곳을 이해하고 지은 건축물이 더 좋은 건축물이 될 것이다. 강홍구의 사진이 담은 건물들, 온전히 거주자를 위해 지어진 것이자 그 거주자의 삶과 함께 변화하고 개축되어 온 이 집들이 ‘에토스적 건축’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준다.
 

ⓒ강홍구 매축지25

ⓒ강홍구 <매축지25>(100*200cm, pigment print, 2012)

사진이 담은 균열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한편으로 위험하다. 그들이 그러한 집을 지은 것은 집을 에토스적으로 사유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니 말이다. 넓은 땅도 좋은 자재도 유명한 건축가도 없었기에, 자기 생활에 맞춰 집을 짓고 고쳐온 것을 두고 에토스적 건축을 운운하는 것은 위험한 낭만화가 되기 십상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이 있다. ‘천상의 옷에는 꿰맨 흔적이 없다’는 이 말은 나무랄 데 없이 자연스런 작품을 칭송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천의무봉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여기저기 덧댄 삶을 묘사하면서 꿰맨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린다면 그 삶은 제대로 표현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산복도로나 달동네의 집을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 그렇다. 낡은 건물도, 추레한 사람들도, 그 사진 속에서는 그저 추억처럼 묘사될 뿐이다.

강홍구는 사진에 과감히 꿰맨 선을 넣었다. 그는 “사진을 잘 찍거나 멋진 사진이 되는 것을 배제하고 일종의 풍경 아닌 풍경이 되도록 시도하기로 했다. 풍경 아닌 풍경이란 기록적인 측면과 집과 길들이 가지는 개별적인 존재감이 섞여 다큐와 개인적인 시선 사이에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잘 찍거나 멋진 사진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의 사진에는 이어 붙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좁은 골목들에서는 한 건물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이 경우 가장 쉬운 것은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는 것이다. 디지털 사진 기술은, 처음부터 한 눈에 들어 왔던 것처럼 사진들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어 붙일 만큼 발달했다.

그렇게 했다면, 이 집들은 어색함 없는 피사체가 되어 작품 사진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현실에서 작가가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수 없도록 그의 등을 막았던 집은 사라지고 만다. 사진에 찍힌 건물만이 남고, 그곳의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지나는 골목의 좁은 틈도, 옆집의 소리가 다 들릴 만큼 붙은 건물들의 빽빽한 거리도 모두 지워진다.

사진을 이어 붙인 흔적을 남겨 둠으로써 강홍구는 그 동네 주민들의 ‘공간 사용법’을, 그들의 ‘에토스’를 사진에 그대로 담아낸다. 그것들을 모두 지워 버린 후라면, “마을의 보존하고 살아 있도록 하는 것, 마을을 구경거리가 아니라 살만한 동네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말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이 집들, 이 마을, 그리고 그것을 담은 사진은 단순히 누군가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부대끼고 만나고 또 갈라서며 사는 삶 그 자체이다. 그 사실을 사진의 꿰맨 흔적들이 증언하고 있다.
 

* 관련 링크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http://goeunmuseum1.cafe24.com/gnuboard4/bbs/board.php?bo_table=prevex_goeun&wr_id=17

강홍구 작가의 작가노트 : 원앤제이 갤러리
http://oneandj.com/ko/portfolio/the-house-of-human-being-proxemics-busan-2-2/

트렁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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