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 그린 점으로 현대를 긍정하다

2008년에 쓴 글. 문득 생각났다.

손수 그린 ‘점’으로 현대를 긍정하다
-야노 샵의 《update_pop_art》, 서울 백송 갤러리-

1.
야노 샵Janos Schaab은 독일의 팝 아트 작가로, 1960년에 헝가리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1978년부터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공부를 하던 중 독일로 건너 왔고, 1984년부터 디자이너, 아트 디렉터 등으로 일했다. 전업 미술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0년의 일이니 아직 10년이 채 안 된 셈이다. 현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3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뿐 아니라 일본 한국 등 각지에서 10여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한국에서는 2008년 10월 1일부터 14일까지 2주에 걸쳐, ‘updated_pop_art’라는 제목으로 백송 갤러리(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소재)에서 전시회를 연 바 있다.
updated_pop_art 전에 전시된 작품은 오드리 헵번을 그린 <audrey> 시리즈와 <마지막 만찬>을 패러디한 <last_supper>,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mona_lisa>, 도시의 모습을 그린 <shadow>, <berlin>, 커피잔을 그린 <illy> 등이 전시되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기도 하지만, 이 전시회에서는 특히 점과 선만으로 유명인이나 유명한 그림 등을 그린 작품들이 중심적으로 소개되었다. 아래에서는 그림 몇 점을 살펴보고 간단하게 그의 작품과 이번 전시회를 비평해 보고자 한다.

2.
전시회의 광고 전단은 정사각형의 두꺼운 종이로 제작되었다. 앞면에는 검은 색과 살색, 붉은색과 푸른색의 점만으로 이루어진 오드리 헵번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고 뒷면에는 작가의 이름과 전시회 일정이, 그리고 갤러리의 이름과 전화 번호, 위치 정도가 인쇄되어 있다. 포스터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 작가에 대한 소개나 사용된 작품의 제목, 혹은 전시회의 이름조차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야노 샵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시회의 홍보물이라는 것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심플하게 제작되었지만, 점만으로 표현된 오드리 헵번의 얼굴은 관심 없는 행인조차도 잡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다.
홍보에 사용된 것은 <audrey> 시리즈 중의 하나로 120cm*120cm 크기로 제작된 2008년 작품이다. 자세히 본다면 점의 모양이 완전한 원형이 아님을 눈치 챌 수 있지만, 얼핏 보아서는 영락없이 컴퓨터로 그리고 인쇄했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는 아크릴 물감으로 직접 그린 작품이다. 비록 전시회 홍보물에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아무런 소개가 없지만, 이 정도면 나올만한 키워드는 다 나온 셈이다. 유명인, 점, 적은 수의 색, 그리고 컴퓨터가 그것이다. 야노 샵의 그림은 대개 점으로, 혹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작품에 사용되는 색의 수는 많아 봐야 넷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누구나 알만한 유명인, 혹은 유명한 사물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편, 그의 작품은 얼핏 봐서는 컴퓨터의 작업물로 착각할 만큼 ‘그래픽 적’이다.

3.
유명인이나 유명한 사물, 혹은 유명한 미술작품을 창작의 소재로 삼는 것은 팝아트에서는 흔한 일이다. 팝아트의 대표격이라 해도 좋을 앤디 워홀의 작품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현대’라는 시공간은 매스미디어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매스미디어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또한 유명인, 소위 ‘스타’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스타’의 존재와 그 존재 방식은 사회 전반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소비성, 일회성, 허구성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대중에게 소비되는 존재이며 그러한 소비를 통해 대중의 삶을 상당부분 구성하지만 결국 그것은 대중의 삶에 있어서 진실이라기보다는 허구, 혹은 허위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것은 그날그날의 삶에서 일회적으로 사용되고 버려진다. 다음날 다시 사용된다 한들 그것은 똑같은 형태로 양산된 또 하나의 허구적 이미지일 뿐, 어제의 삶을 구성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야노 샵 역시 그러한 대중적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이번 전시에는 오드리 헵번과 샤넬 코코를 그린 작품이 전시 되었으며, 그 외에도 영화배우인 마를린 먼로와 그레이스 켈리,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등 유명인을 소재로 다수의 작품을 그린 바 있다. 영화배우, 디자이너, 작가 등 다양한 영역의 유명인들을 소재로 삼고 있는 그림은, 하지만 약간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면이 존재한다. 앞서 말한 소비성, 일회성, 허구성을 그 속성으로 갖는 것은 ‘현재의 스타’이다. 오늘 티브이 화면과 신문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내일이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야노 샵이 그린 것은 어떤 인물들인가. 오드리 헵번과 그레이스 켈리는 지난날의 흑백 스크린을 채웠던 배우들이며 샤넬 코코 역시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앤디 워홀 역시 마찬가지. 그가 그린 스타들의 공통점은, 하나의 ‘성’을 쌓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지 현재라는 시공간을 떠났음에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 인물들인 것이다.
그가 그리는 것은 ‘허구’라기보다는 진실이다. 그 중에서도 ‘진실이 되어버린 허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속성과도 일치한다. 온갖 과학 기술들과 같이 한때는 공상이라 불리던 것들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처음에는 흥밋거리이자 신기한 기술일 뿐이었던 각종 매체들이 일상의 일부분이자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필 오드리 헵번이나 코코 샤넬을 그 소재로 선택한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것들이 구성한 현대를 긍정하는 작가의 마음을 것이다. 그가 그들은 소재로 삼은 것은 구체적으로는 현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에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기의 미인 오드리 헵번, 세기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 그들이 세상에 보인 아름다움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 세상을 굳건히 받치고 있으니 말이다.

4.
다음으로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 ‘점’을 살펴보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점과 선을 통해서 그림을 그린다. 면은 점과 선의 연장으로서 음영을 강조하는 데에 일부 쓰일 뿐이며, 색은 특정한 부분을 강조하거나 유색의 음영을 통해 약간의 입체감을 주는 데에 사용된다. 이를 테면 <audrey> 시리즈의 얼굴은 점과 선으로만 그렸고, 머리카락과 일술, 콧구멍, 눈썹 정도가 검은 색 면으로 그렸다. 명암의 차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칠한, 밀도 높은 점들의 집합으로서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색물감은 사용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사용된 경우는 <audrey>시리즈의 일부에서처럼 점이나 선의 아래에 음영을 넣은 것과 코코 샤넬을 그린 <coco_03>에서 검게 그린 이미지를 유색으로 옆에다 똑같이 옮긴 것, 그리고 커피잔들을 그린 <illy>나 <coco_2>와 같이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의 그림에서 점과 선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2차원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점이나 선과는 다르다. 점이 연장 되어 선이 되고 선이 연장되어 면을 이루는 기존의 세계관과는 별개로 존재한다 해도 좋겠다. 그의 그림에서, 점과 선은 같은 화폭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야노 샵의 점과 선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침내 의미를 발현하는 것―갖는 것이 아니라―은, 그러한 점들이 하나의 면에 집합적으로 존재함으로써 하나의 그림을 이룰 때에 있다. 현실세계에 비유하자면 무수한 개인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audrey_07>에서 점의 아래에 그려진 유색의 음영이나 <coco_03>에서 검은색의 그림 옆에 똑같이 덧그려진 유색의 그림이 점들의 독립성을 방증한다. 유색 사물의 음영을 표현하는 데에나 적합할 검은 점들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승격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큰 그림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검은 점들은, 다양한 점들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상호작용의 상징은 또한 그림 바깥에도 존재한다. 그림 바로 앞에 눈을 갖다 댈 때에는 그냥 점일 뿐이던 것이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누구나가 아는 얼굴이 된다. 그린 대상의 특징을 없앤다 싶을 정도로 간소하게 그린 그림이지만 보는 이는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상대를 알아보기 위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인간의 대화, 비록 온전히 그려내지는 못한다 해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남는 인간의 기억을 그림과 관객이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러한 상호작용은 또 개개인의 안에서도 일어난다. 시각을 자극하는 개개의 점들이 감각기관 속에서 하나가 되어 기억 저편에 잠들어 있는 다른 이미지를 끌어 오는 것이다. 온전한 모양이나 유별난 특징이 아니라, 대강의 형체나 전반적인 이미지를 인간이 주고받으며 소통하고 느끼는 것을 야노 샵은 이야기하고 있다.
모두가 크기가 조금씩 다를 뿐 같은 색의 점인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공통성, 즉 서로 이해 가능한 소통의 기반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어떤 점은 눈썹을 구성하는 점이고 또 어떤 점은 코를 구성하는 점, 또 어떤 점은 커피잔을, 또 어떤 점은 도시의 거리를 구성하는 점이지만 그들 모두는 결국 같은 점인 것이다. 그 모든 점을 그는 손으로 직접 그린다. 멀찌감치 떨어져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그 점들은 마치 컴퓨터로 찍어낸 듯한 같은 점들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하나하나가 다른 점임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게 서로 다르지만, 다른 역할을 다른 공간에서 하고 있지만, 결국은 서로를 알 수 있는 원형의 기호들인 것이다.

5.
현대, 그 중에서도 ‘바로 지금’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키워드는 아마도 컴퓨터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의 그림에서는 컴퓨터의 흔적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점으로 그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컴퓨터의 방식이다. 컴퓨터 화면에서는 픽셀pixel이라는 점이 모여 화상을 구성하며, 인쇄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선과 면을 그리는 것은 점dot이다. 특히나 그의 그림처럼 화장 전반을 균일한 둥근 점으로 처리하는 것은, 인쇄술의 초기에 신문 등에서 그림을 찍어낼 때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낮은 기술력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화질 열화를, 점을 이용해 뭉뚱그리는 방식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그때의 사람들도 지금의 야노 샵을 보는 우리들처럼, 점으로 만들어진 사진을 쉽사리 알아보고는 했다.
또 한 군데에서 찾을 수 있는 컴퓨터의 흔적은 바로 전시회와 그림의 제목이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인 <updated_pop_art>와 작품의 제목들인 <audrey_07>, <coco_02>, <illy> 따위의 것들은 모두가 컴퓨터 폴더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기본적으로 MS 윈도우를 사용하는 컴퓨터는 폴더나 파일 이름에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으며 인터넷 등에서의 호환을 위해 빈 칸을 ‘_’로 처리한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붙일 때 이와 같은 관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audrey> 시리즈나 <coco> 시리즈에서 일련번호를 01, 02, …와 같이 붙이는 것 역시 컴퓨터에서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그림을 그릴 때에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크릴 물감으로 하나하나 꼼꼼히 그리고 있다. 심지어 검은 점 아래에 유색의 음영을 표시하기 위해 그는 검은 점을 먼저 그린 후 주위에 유색의 점―유색의 점 중 검은 점에 가리고 남은 일부―을 덧그린다. 유색 점을 그린 후 검은 점을 덧그리지 않고 굳이 그러한 수고를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린 인물 연작들은 겹쳐보면 똑같은 구도와 배치를 갖고 있다. 단색의 점으로 그린 것, 단색의 점으로 그리고 유색의 음영을 넣은 것, 단색의 선으로 그린 것, 단색의 선으로 그리고 음영을 넣은 것 등 다양한 그림들이 모두 똑같은 밑그림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밑그림에 색만 달리 하면 될 때에는, 특히나 밑그림이나 작업에 사용된 색이 단순할 때에는, 판화로 작업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의 경우 야노 샵과 마찬가지로 유명인들의 얼굴을 단순화한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그는 실크 스크린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작품을 찍고 자신의 작업실을 Factory>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야노 샵이 컴퓨터의 세계를 오마주하면서도 기어이 자신의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앞서 본 유명인을 소재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대한 긍정으로 읽을 수 있다. 앤디 워홀이 공장에서 유명인을 찍어 내 그들의 상품성과 허구성을 고발했다면, 야노 샵은 손으로 하나하나 그려 내어 그들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밑그림을 조금씩 다른 채색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앤디 워홀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색의 작품들을 내어 허무와 죽음을 그린 것과는 달리, 하나하나의 개인이 갖고 있는 여러 단면들이 모두 가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작품 몇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볼 것은 위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었으며 전시회의 홍보에 사용되었던 <audrey>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2005년부터 2008년에 이르기까지 열 점 가까이 제작되었으며, 이번 전시회에는 그 중 일곱 점이 전시되었다. 그 중 몇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제일 왼쪽의 것은 <audrey_07>로 검은 점으로 그린 오드리 헵번의 얼굴에 입술에만 붉은 음영을 넣은 것이다. 가운데 것은 검은 선으로만 구성된 <audrey_06>이며 마지막 것은 <audrey_08>이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더 많은 것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관객에게 주는 거부감이 더함을 볼 수 있다. 점으로만 그리던 것을 선으로 그리고, 혹은 점으로 두 번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관객들은 오히려 기억 속의 오드리 헵번을 끌어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을 무리하게 연장시키려 하거나 집단으로 묶으려 하는 태도, 혹은 서로 다른 개인, 혹은 공동체를 무리하게 중첩시키려 하는 태도를 경계하려는 그의 의식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터이다. 그 이외의 기법이 갖는 속성들은 위에서 누차 언급하였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위의 두 그림은 <shadow_01>과 <shadow_02>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으로, 각각 2004년과 2007년에 그려진 연작이다. ‘shadow’라는 제목은 중의적으로 읽히는데, 그림 속에 등장하는 행인들의 그림자와 실루엣으로 처리된 현대사회 거리의 모습―어두운 단면―의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행인들은, 자세히 따지지 않으면 그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누군가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림자가 상대적으로 더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다.
이 그림 역시 점으로 그려졌지만, 거기에 더해 실제로 현대 사회의 ‘점’으로서 살고 있는 개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이라 하겠다. 네모난 건물 사이로 곧게 뻗을 길을 하나같이 걷고 있는 사람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누가 누구인지 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조차 없지만, 그런 그들이 모여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모인 세상은, 누구 하나 주저앉은 이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그 세상을 꾸미는 같은 부품은 아닐 터, 관객은 그 속에 있는 나 자신을, 혹은 내가 사랑하고 깊이 살핀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 관객이 찾아 낸 그 붉은 사람은, 3년이라는 시간동안 저만큼을 걸었다.

이 그림은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해 그린 <last_supper>라는 작품이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유명한, 정치인, 연예인 등의 인물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만찬 테이블의 뒤에 걸린 초상화와, 테이블의 앞에 늘어선 군중이다. 유명인들의 만찬 앞에 서 있는 군중들은 일부는 만찬을 구경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쳐 걷고 있는 듯 보인다. 유명인들은 그들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 아니며,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혐오하거나 멸시할 만한 인물들도 아니라는 듯 그들은 걷고 있다. 유명인들조차도, 그저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나와 같은 개인들일 뿐인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왼 쪽에 커다랗게 그려진 마오 쩌둥의 초상화다. 무표정한 얼굴이 대비도 높게 표현되어 마지 죽은 사람의 것처럼 보인다. 소련이 망하고 냉전 체계가 해소된 후에도 사회주의 국가로서 강한 힘을 가진 채 살아남았던 중국, 그런 중국을 만든 이의 초상이 걸려 있는 서구인들의 만찬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야노 샵의 사상적 지향을 알 수 없어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이 역시 자본주의―혹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갖고 있는 소비와 자유―를 긍정하는 아이콘으로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7.
야노 샵의 전시회를 보고, 그가 소재로 삼은 것과 그것을 표현한 방식을 살펴보았다. 점이라는 개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빛을 주고받으며, 또한 동시에 원으로서의 공통성을 서로의 소통기반으로 삼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가 그의 그림에는 담겨 있다 하겠다. 또한 야노 샵은 그러한 개인들이 만든,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이 살아가는 현대를 긍정하고 있음을 또한 말할 수 있다.
그가 이제껏 연 다른 전시회들의 제목은 서울에서 연 것과는 달랐다. 독일에서 주로 열린 전시회들의 제목은 대체로 이름이 없거나 담백하게 전시 성격을 표현한 것들이었고, 이번 전시회와 비슷하게 명명된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2006년에 열린 ‘update_mona_lisa’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이번 전시회의 제목인 ‘update_pop_art’에는 조금은 의미를 무겁게 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가 업데이트한 팝아트가 한국의 것인지 혹은 세계의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조금은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 될 것이니, 그것을 알 수 있을 날을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참고 자료
사진 : 백송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bsartgallery.com/
기타 : 야노 샵 홈페이지 http://janosshaab.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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