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본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한 번은 일부를 발췌한 친구의 공연이었고 또 한 번은 국내 정식 상연 10주년을 맞은 해의, 극장에 정식으로 오른 공연이었다. 그리고 어제 본 서울대학교 인문대 연극동아리 인연동의 「보지 모놀로그」가 그 세 번째였다. 그러나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은 모놀로그 하나를 발췌한 공연이었고 두 번째는 토크쇼 형식으로 개작된 공연이었으므로, 원제(“The Vagina Monologues”) 그대로의 ‘모놀로그들’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몇 해 전 10주년 기념 공연을 보고 쓴 단평에서, 나는 몇 가지 불평들을 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라는 제목이 여전히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배우들이 관객들을 당연히 이성애자로 여기는 것에 대해, 나는 불평했다. 그런 점에서 어제 본 공연은 좋았던 셈이다. 그런 불평을 할 만한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번 공연은 「보지 모놀로그」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왜 반만 번역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의 주제이기도 한 ‘문제의 그 단어’가 번역되었으니 일단은 된 셈이다.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그다지 말을 걸지 않았으므로, 관객들을 무엇으로 여겼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성애자로 상정하고 말하는 일은 없었다.
으레 그렇듯, 공연은 “보지”라고 말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배우들은 보지라는 단어가 들어간 몇 문장을 말한 후 관객들에게 보지라고 말해 보라고 한다. 으레 그렇듯, 관객들은 배우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그럼 한 글자씩 끊어서 말해볼까요, 몇 명이 “보”라고, 그리고 “지”라고 말한다. 그럼 이제 이어서! 다시 관객들은 조용해진다. 너무 수가 적었던 탓일까, 결국 배우들은 “보지”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채 공연을 시작한다.
어제 상연된 것은 원작의 모든 모놀로그들은 아닌 것 같았다. 보지 털에 대한, 보지의 ‘홍수’에 대한, ‘위안부’에 대한, 임신출산에 대한, 보지 워크숍에 대한 모놀로그들이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실은 다소 지루하다. 다른 형태였다고는 해도 이미 이전에 본 모놀로그들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그다지 새롭지 않은 이야기기도 하다. 이 극이 나온지는 이십 년이 되었고, 한국에 들어온 지도 이미 십수 년이 되었으므로, 지루함은 당연한 반응이기도 할 것이다. 모놀로그가 이어지는 극의 특성상 암전이, 단절이 잦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퀴어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보였다. 극작가의, 혹은 연출가와 배우들의 뜻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모놀로그 속에서 보지는 여성, 여성의 근원, 여성의 핵으로 이야기되었다. 보지 없는 여성들의 자리는 여전히 없어 보였다. 허리가 아파 몸을 뒤틀던 사이에 놓친 것이 아니라면,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조차도 딱히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메갈리에서 워마드로의 흐름을 보며 느겼던, 해부학 중심의, 시스젠더 중심의, 헤테로섹슈얼 중심의 여성관이 재현되었다.
나는 여기에 ‘위안부’들의 이야기를 아주 중요한 코드로 ― 게다가 촛불을 들고 ― 들이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물론 한국 보지의 역사에서, 어쩌면 ‘보지로서의 여성’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 한국 여성의 다양한 이야기 없이 (물론 다른 모놀로그들은 현대 한국 여성의 삶과도 매우 가깝지만) ‘위안부’ 이야기를 한국 현실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보지의 신성성’을 강화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리라고, 나는 여기고 있다. 같이 본 친구는 ‘위안부’ 이야기가 없었다면 이 극을 이해하지 못할 뻔 했다고 말했지만, 나로서는 반대였다. (친구가 그랬던 것은 보지에 대한 억압을 그다지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남성 성기도 이야기되지 않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물었다. 남성들과 친교를 맺지 않은지 오래 되어 잘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내가 예전에 만났던 한에서, 남성들은 많이 이야기한다고 답해 주었다. 금기에 대해 깊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보지의 신성성’. 근원으로서의 보지. 핵으로서의 보지. 여성이라면 누구나 사랑해야 할 것으로서의 보지. 이런 것들은, 퀴어의 자리를 없앤다. 보지를 싫어하는, 여성으로 여겨지는, 스스로를 여성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의 자리를 없앤다. 보지를 갖고자 하는, 그러나 (아직) 갖지 못한, 남성으로 여겨지는, 스스로를 여성으로 여기는 이들의 자리를 없앤다. 보지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무관한, 혹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싫은 이들의 자리를 없앤다. 원작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조금은 다른, 더 다양한, 모놀로그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또 기회가 온다면 나는 이 독백들을 다시 들을 것이다. 여전히 알아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 가능하다면 친구 한 명쯤과 함께 가면 좋을 것이다. 자신의 몸에 있음에도 클리토리스의 존재를 모르는 친구와, 보지라고 한 번도 말해 본 적 없는 친구와, 자신의 섹스에 대해 말해 본 적 없는 친구와, 혹은 보지를 남의 것이라고만 여겨 온 친구와, 함께 가면 좋을 것이다. 어쨌든 보지는, 있으니까, 그러나 없는 취급 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페미니즘에서 내 자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 과한 욕심인가를 가끔 생각하게 된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보지들의 독백을, 내가 흥미로워 하며 들을 수 있는 날이 있을까, 내게도 흥미로운 독백들을 내어 보이라고, 요구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를 가끔 생각하게 된다. 역사에 순서가 있다면 아직은 지금과 같은 독백들이 상연되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그러나 역사에 순서가 있을까, 나의 차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나는 그저 기다려야 할까를 가끔 생각하게 된다. 답은 내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직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할 권리 정도야, 내게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적었다. 지루했던 보지들의 독백을 듣고서.
친구의 변:
내가 언제 그리고 왜 위안부 모놀로그가 아니였음 이 연극이 이해가 안 갔을 것이라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다가…괄호 안의 부연설명을 읽고 뭔가 가물가물 떠오르는 듯 하기도 하다. 여기에다 나는 괄호 안의 안팎씨의 압축적 부연설명을 부연설명하고자 한다.
아마도 나 역시 이 연극이 다시 공연될 때마다 보고 또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난 “자신의 몸에 있음에도 클리토리스의 존재를 모르는 친구와, 보지라고 한 번도 말해 본 적 없는 친구와, 자신의 섹스에 대해 말해 본 적 없는 친구와, 혹은 보지를 남의 것이라고만 여겨 온 친구” 중 하나이고(이번 공연에서 첫 번째 경우로부턴 벗어나게 되었도다), 이 문구마저 내가 타이핑하지 못하고 카피, 페이스트한 게 그 증거다.
여튼 나는 위안부모놀로그를 “‘보지의 신성성’을 강화하는 것”(이것도 카피, 페이스트)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 모놀로그는 이 연극 전체가 내가 그것이 금기어임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금기시되어 왔다는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이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입에 올리는 것을 강박적으로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모놀로그들은 말하기도 듣기도 싫은 그것의 이름을 일방적으로, 반복적으로 외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고, 대체 왜들 그러시는지 전혀 나를 이해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다시 한 번 달리 표현해 강조하자면, 위안부 모놀로그는 그 이름에 대한 나의 이해와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해가 있음을, 그리고 사실 그 세상의 이해가 나를 꽤나 잠식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건의 당사자들의 진술로 기억한다.
나에게 그것은 몸의 다른 기관들에 비해 지극히 사적 공간에서 행하는 사적 사건들과만 관련하는 기관이어 왔고, 또 사생활을 말하고 듣는 것은 아주 친밀한 관계에서만 하는 일인 데다가 친밀한 관계에서도 들어줄 것을, 그리고 말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이기에 그것 또한 별로 입에 올릴 일이 없다고 여겨졌었다. 연극을 본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나의 이러한 고집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나는 나를 ‘계몽하려는 태도’로 접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일단은 고집부리고 반항하고 싶어 한다. 조금 더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퀴어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그걸 가진 여성들만의 이야기에 대한 안팎씨의 아쉬움에 (아마도 다른 관점으로부터이겠지만) 동의한다. 난 그 기관이 나에게 있어 그냥 내꺼고 내가 내키는 대로 그 이름을 부르거나 말거나 할 것이지, 여성으로서의 나를 확정짓는 생물학적 지표이자 근원으로서 스스로 존중하고 또 존중받기 위해 굳이 당당하게 그 이름을 외치고 다녀야 할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서 이 연극의 모놀로그들이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그런데 당당하게 그 이름을 외쳐야 한다고(설마 외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길) 나를 가르치려드는 연극이 이해가 안 가던 중에 나에게 어떤 문제가 하나 감지되었다. 과연 나는 내가 내킬 때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가? 아니 그게 내킨 적이 있는가? 왜 안 내켰을까? 그저 내 사생활이기 때문에? 개별자는 이미 보편자를 품고 있다느니 뭐니 그런 얘기는 관두자. 나는 내가 그것을 가진 존재임을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나의 ‘생물학적’ 성을 공표하고 확증한다면 위험에 처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역사,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잘 학습된 결과! 그래서 내킨 적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위안부 모놀로그 보는 중에 문득 든 생각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것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의 이름을 금기어로 만들 수밖에 없는 그것에 대한 세상의 이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이건 내 꺼요, 당신가 보는 시선에서 나도 덩달아 쉬쉬해야 할 그런 것이 아니라오, 당신 때문에 나마저 내 것을 부끄러워하고 업신여겼던 시간을 이만 마치겠소, 당신이 날 이것 때문에 두려워하라고 가르쳤구먼, 난 이제 두려워하지 않겠소….(내가 읽어낸 할머니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내 기억의 왜곡으로 인할 걸지도 모른다…사실 연극 본지 넘 오래됐다.)
아…말이 너무 길어졌다…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난 여전히 그것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불편하다. 아마도 너무 오래된 습관이기 때문인 것도 있을 터다. 하지만 난 누가 자신이 화장실에서 큰일을 치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듣기 싫어하며 그 이름과 이 이름 모두 마찬가지로 입에 올리는 걸 싫어하는 소수(?)취향을 가졌다. 그리고 아직 그것의 이름에 대해 당당한 게 무슨 효과를 가지는 건지 아직 이해가 잘 안 간다. 그래서 다음에 다시 또 보러는 가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