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간 집회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들었다. 페미니스트로서 집회에 참여한 이들 몇몇이 둘러 앉아 노래를 불렀다. 생경한 광경이다. 집회에서 대중가요를 접하기 시작한지 이미 몇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생경한 광경이다. 〈처음처럼〉이나 〈바위처럼〉에 맞춘 귀여운 율동들을 처음 본 선배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십 년 전에 한 선배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선배는 소위 칼마임 혹은 전투문선으로 불리는, 결기를 드러냈는 절도 있는 무용이 줄어가는 것을 개탄했다. 대중가요와 크게 다를 바 없어보이는, 두리뭉술한 가사의 밝은 노래에 맞춘 귀여운 율동들을 그는 탐탁지 않아 했다. 나로서는 딱히 공감이 가지 않았다.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로써 공동의 문화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귀여운’ 춤들이 시류를 탄 한 때의 유행인 것만큼이나, ‘절도 있는’ 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놓고서 〈다시 만난 세계〉를 낯설어 한다는 것은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집회에서 대중 가요를 들었을 때 이상했던 것은, 저 노래가 이 투쟁의 노래로 선택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저 ‘바깥 세상’에서 유행하고 있을 뿐인 노래였다. 그 노래를 축으로 한 공동의 기억도 없었고, 그 노래의 가사와 우리 지향 사이에 겹치는 바도 없었다. 그런 노래가 집회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 내게는 낯설었다. 〈다시 만난 세계〉가 낯선 것 역시, 내게 그 노래에 관한 아무런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점거 투쟁에서 그 노래를 함께 불렀던 이들에게는 있을 그런 기억이 말이다. 이화여자대학교 투쟁에 스스로를 이입하며 그 사태를 지켜본 이들에게는 있을, 그런 기억이 말이다.
‘민중가요’라는 이름은 어쩌면 그 이름으로 분류되는 노래들의 실상과는 맞지 않는다. 수 년째, 혹은 수십 년째 지적되어 오듯 남성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삼은 노래들이 너무 많고, 그것이 아니라면 함께 부를 수 있기보다는 가수가 부르기에 적합한 노래들이 너무 많다. 투쟁의 지향을 담은 가사로만 따지자면 민중가요라는 이름이 적합할 수도 있겠지만, 그 노래들 대부분은 민중이 만드는 것도, 민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시 만난 세계〉가 오히려 더 민중가요라는 이름에 알맞다. 적어도 삶의 특정 시기에 그 노래를 들으며 공동의 문화를 향유했던 한 세대에게 있어, 그 노래는 자신들의 노래다. 앞서 썼던 글들의 논조를 따르자면 그 노래는 그저 상품일 뿐이므로, 한 사람을 소비자에 제한되는 가짜 주인공으로 만들 뿐이므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역시 이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선택이라는, 전유라는 한 집단의 행위이다. 기존의 민중가요를 배우는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는 한 노래를 ‘선택’했다. 이로써 그 노래는 투쟁가요로 전유되었다. 작가가 만드는 사람이기보다는 선택하는 사람이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민중가수’가 만들고 부른 노래가 저절로 ‘민중가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선택한 노래가 ‘민중가요’가 되는 현상이, 이제서야 일어난 것일 뿐이다. 어떤 고명하신 선생님이 아니라, 어떤 절창의 가수가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모인 익명의 존재들이 함께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를 테면 ‘민중가요로서의 〈다시 만난 세계〉’에는 어떤 집단적 저자성이 결합된다.
이 집단적 저자성이야 말로, 옛 시대의 민요가 그러하듯, 한 노래를 한 집단의 노래로 만들어주는 진정한 요소일 것이다. 〈다시 만난 세계〉를 민중가요로서 부르는 행위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하나의 재창작이다. 대상에 새로운 지위와 새로운 의미,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마르셸 뒤샹에게서 단순한 변기가 미술계를 비판하는 의미를 안게 되었듯,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에게서 〈다시 만난 세계〉는 단합을, 저항을, 창조를 상징하는 의미를 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만난 세계〉가 선택된 것은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고많은 대중가요 중에서 그나마 집단의 지향에 맞는 가사를 갖고 있었던 것이 이 곡일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모호성은 오히려 재창조의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모호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근년에 리메이크된 이 곡을 아는 사람들은 그 이전 세대에서부터 있어 왔다. 어쩌면 이로써 〈다시 만난 세계〉는 세대를 넘나들 가능성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만난 세계〉가 한 세대의 노래로 그치는 것이 아까운 명곡이라서가 아니라, 이 선택이라는 제 2의 창작 행위를 집단적으로 경험해 볼 기회가 한 세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까운 심정에서, 이 점은 작은 희망이다.
나는 박준의, 연영석의, 지민주의 노래들을 좋아한다. 〈다시 만난 세계〉가 집회에서 불리는 것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낯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끊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박준이, 연영석이, 지민주가 아니라, 누구나가 자신이 좋아하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노래를 들고 나와 이것을 우리의 노래로 삼자고 말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만난 세계〉가 말이다.
민중가요와 〈다시 만난 세계〉
안팎 / 2016.11.14.
문득 혹시나 싶어 찾아 보았는데 리메이크 곡이 아니었다. 희망은 없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