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의제행동센터에서 기획한 특강 〈영화로 얘기해보는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 정치〉의 제 4강에서 구두로 말한 것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PDF 파일은 여기에서 받을 수 있다. 1-3강의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조.
[1강] 이유림, 〈’아기와 나’ 그 이상의 이야기〉 예고 정리
[2강] 최예훈, 〈’낙태죄’와 ‘Prolife’〉 정리
[3강] 나영, 〈저출산, 대리모, 생식기술〉 예고 정리
‘선택’ 너머의 익숙한 고민들1
― 영화 〈24주〉와 〈가타카〉가 던지는 재/생산에 관한 질문들
안팎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성과재생산포럼
들어가며
가끔 쳇바퀴를 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에서 현행법상 낙태는 불법이므로, 낙태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공식적인 담론의 장에 진입하지 못한다. 낙태에 관한 공식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므로,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법을 개정하는 논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다. 낙태가 죄로 남아 있기에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므로 낙태는 죄로 남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낙태죄 폐지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요즘의 분위기는 고무적인 일이다. 지난해 폴란드의 시위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도 열린 “검은 시위” 등이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끎으로써 공식적인 담론이라 할 만한 것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시기를 우리는 맞고 있다.
검은 시위의 주요 구호 중 하나는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말이었다. 여성의 신체적, 성적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이 말은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일견 이론의 여지 없이 명백해 보이는 이 말은 어쩌면 위험을 안고 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해묵은, 그리고 허구적인 양자 대립 구도를 반복할 위험 ― 다시 말하자면 임신과 출산 혹은 낙태 (그리고 양육) 과정에 수반되는 수많은 요소들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 말이다.
물론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일시적인 전략일 뿐일 수도 있다. 임신 및 그 이후의 과정들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을 논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일 수도 있다. 아니, 그 이후에야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의 자기결정권만을 생각할 때에도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는 시작일 뿐 궁극적인 목표일 수 없다 ― 법 개정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드는 사회와 싸워야 할 것이므로 ― 는 점에서 그 고민들을 마냥 미루어 둘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을 쟁취할 수조차 없다.
특별히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목에 쓴 대로 그것은 “익숙한 고민들”이다. 다만, 최소한의 자기결정권마저 보장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고민의 뒤켠으로 밀려나 있는, 그래서 종종 잊혀지곤 하는, 그런 고민이다. 영영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간단히나마 기록해 두려는 것이 이 글의 작은 목표다. 추상적인 고민은 어려운 것이므로, 누군가가 상상한 어떤 ‘미래들’을 고민의 단초로 삼으려 한다. 영화 〈24주〉와 〈가타카〉가 그리는 미래들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들을, 조금이나마 ― 대개는 장애에 관해 ― 살펴 보려 한다.
낙태죄 폐지 이후를 상상하기: 〈24주〉의 경우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24주〉(원제 “24 Wochen”, 앤 조라 베라치드 감독, 2016)가 그리는 것은 ‘미래’가 아닌 동시대 독일의 모습이다. 하지만 독일이 스무 해 전에 낙태를 ‘사실상’ 비범죄화 하는 형법 개정을 이룬 점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미래의 모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스트리드라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그러니까 대중 앞에서 자신의 임신 사실을 공개한 상태다. 남자친구와 가정을 꾸리고 있고 계획된 임신이며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임신은 소위 ‘축복 받는 임신’이다.
이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병원에서 알려 준 산전 검사 결과다. 태아에게서 다운증후군이 발견된 것이다. 기대했던, 축복 받던 임신에서 하루아침에 이것은 예기치 못한 임신이 되고 만다. 뜻하지 않게 임신한 이들이 누구나 그렇게 하듯, 어떤 이유로든 아직 아이를 가질 준비가 안 된 이들이 누구나 그렇게 하듯, 아스트리드는 출산과 낙태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내가 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이 아이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아이와 함께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엄격히 말해 한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고민들이다.2
독일에서 이런 고민이 가능한 것은 앞서 말했듯 독일에서는 낙태가 사실상 비범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 형법은 제 218조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3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지만, 제 281조a라는 부칙을 두어 폭넓은 예외 사례를 인정하고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독일 형법 218조a 임신중단의 법적 책임에 대한 예외
(1) 다음의 경우는 218조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
1. 임신한 여성이 동법 219조 2항 2번째 문장에 따른 자격을 가진 의사에게 임신의 중단을 요청하고 자신이 시술 최소 3일 이전에 상담을 받았음을 증명하며
2. 임신의 중단이 의사에 의해 수행되고
3. 착상 이후 12주가 경과하지 않은 경우
(2) 임신한 여성의 동의 하에 의사에 의해 수행된 임신의 중단은 임신한 여성의 현재 및 미래의 생활 조건을 고려했을 때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있을 중대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의학적으로 임신의 중단이 필요하며 여성 자신의 관점에서 그 위험을 피할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불법이 아니다.
(3) 상기 (2)항의 조건은 동법 176조에서 179조에 해당하는 범법 행위가 임신한 여성에게 가해졌다는 의학적 소견이 있는 경우, 임신이 그 행위에 따라 행해졌다고 추정할 상당한 이유가 있으며 착상 12주가 경과하지 않은 경우에 임신한 여성의 동의가 있고 임신의 중단에 의사에 의해 수행된 경우에도 충족된 것으로 본다.
(4) 임신의 중단이 상담 이후에 의사에 의해 수행되었고(219조) 착상 22주가 경과하지 않은 경우에 임신한 여성은 218조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법원은 임신한 여성이 시술 당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던 경우 218조에 대한 방면을 선고할 수 있다.
여기서 확인되듯 독일 형법은 의사가 시술하는 한 착상 12주 경과 이전에는 상담 이외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 이후로도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한 “여성 자신의 관점”에서의 판단에 따른 낙태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4 사실상 여성 자신의 판단에 따른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5 아스트리드의 고민은 이런 조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런 조건들은 아스트리드에게 고민을, 그리고 결단을 요구한다. 의료인류학자 레이나 랩은 『여성을 시험하기, 배아를 시험하기(Testing Women, Testing the Fetus)』(1999)에서 산전 검사 ― 이 글에서는 양수천자 ― 가 “모든 여성을 생명윤리학자로 만든다”고 쓴 바 있다. 임신출산을 둘러싼 기술이 발달해 갈수록 경우의 수는 늘어날 것이며 이는 곧 고민이 무거워짐을 뜻한다. 그저 극단적인 사례처럼 보일지 몰라도, 아스트리드를 둘러싼 기술들은 모든 임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술이기도 하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낙태가 횡행할 것이라고 열을 올리며 폐지 반대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편에는 낙태죄가 폐지되면 여성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는, 현실은 그 어느 쪽도 아님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완전하지는 않은 ― 그러니까 어떤 병을 가진 아이는 살릴 수 없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 세계에서, 그리고 태아에 대해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서, 출산으로 이어지든 낙태로 이어지든 임신은 고민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아스트리드는 남자친구와의 상의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지만, 첫째 아이 엘레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동생을 갖고 싶지 않아 한다. 어머니 베이테는 양육 문제를 걱정한다. 게다가 영화는 또 하나의 장치를 마련한다. 의사는 더 무거운 소식을 가져온다. 태아가 선천성 심장 이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낳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아스트리드에게 의사는 분명히 경고한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기르는 것 이상으로 힘든 문제가 될 것이라고. 최소한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며 고통을 감내할/감내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로이 제기된다.
아이를 낳아도, 낳지 않아도 축복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내 배는 나의 것”이라고 외쳤던 70년대 독일의 운동가들도,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지금 한국의 운동가들도, 어쩌면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일 것이다. 나의 결정이 온전히 존중 받지 못하는 상황은 말이다. 아니, 결정이 이토록 어려울 수 있음을, 어쩌면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말처럼 딱 떨어지는 것도, 쉽게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감독은 “우연히 잡지를 통해 ‘독일에서는 태아에게 문제가 있을 경우 출산 직전까지 낙태가 합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창작 배경을 밝힌다.6 이런 그의 말을, 한국어판 포스터에 실린 “영원히 기억할게”, “너를 만나고 사랑한 시간 24주”와 같은 말들과 엮어 읽으면 〈24주〉는 영락없는 낙태 반대 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직접 보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영화는 낙태가 횡행하는 잿빛 미래를 그리지도, 여성이 해방된 장밋빛 미래를 그리지도 않는다.
의사, 상담사, 조산사 등 관련 인물 모두가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듯함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은 따뜻하지 않다. 여러 도구를 다루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하는 낙태 수술 장면은 낙태 반대 캠페인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싸늘하다. 영화적으로 다소 과장된 듯한 이어지는 장면들은 낙태의 공포를 배가시킨다. 동시에 아스트리드가 남자친구를 향해 “선택은 내가 하는 거야!”라고 외치는 장면은 낙태권 캠페인 영화에 전형적으로 나올 법한 모습이기도 하다. 아스트리드의 고민만큼이나 요동치는 영화의 온도 앞에서, 관객은 그 고민을 이어 받게 될 것이다.
낙태 일반을 범죄로 규정하는 형법을 가진 (그러면서도 우생학적 사유에 대한 예외를 두는 모자보건법을 가진)7 한국에서 곧장 이어받기에는 어쩌면 이른 고민이다. 그러나 마냥 미루어둘 일은 아니다. 낙태죄를 폐지함으로써 어떤 세계를, 어떤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낙태하는 삶이든 태어나는 삶이든을 사회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보장하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 영화 속 아스트리드의 고민을 우리는 이어 받아야 한다.
윤리적 고민을 피해가기: 〈가타카〉의 경우
오래 전이었다면, 그러니까 산전 검사도 낙태도 불가능한 시절이었다면 필요 없었을 고민이다. 아니, 이것은 어쩌면 거짓말이다. 소설 『대지』의 오란이 했듯, 출산 후에 (이 경우에는 딸로 태어난) 아이를 살해하는 선택지도 있으니 말이다. 산전 검사와 낙태 기술은 이런 고민을 덜 수 있게, 적어도 그 시점을 앞당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아예 착상 전에 검사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다면,8 낙태를 둘러싼 윤리적 고민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보다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영화 〈가타카〉(원제 “GATTACA”, 앤드루 니콜 감독, 1997)가 그리는 것이 바로 그런 미래다. 피 한 방울로도 예상되는 질환이나 기대 수명 등을 정확히 알 수 있을 유전자 기술을 가진 사회, 유전자 조작을 통해 질병이나 장애와 같은 요소들을 미리 제거한 배아를 임신할 수 있는 사회, 영화는 그런 사회가 가진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영화의 주인공은 자연 임신을 통해 태어난 존재다. 출산 직후 진행되는 혈액 검사는 이 아이가 99% 확률로 심장 질환을 갖게 될 것임을, 기대 수명은 30세에 불과함을 알려 준다. “열등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유전자가 계급을 결정하는 이 사회에서 하층에 놓인다. 그리고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 대다수의 임신은 인공수정을 통해 행해진다. 주인공 동생의 경우처럼 말이다.
이 장면은 흥미롭다. 의사는 부부 앞에 네 개의 수정란을 내어 놓는다. 탈모니 근시니, 혹은 중독 성향이니 폭력 성향이니 하는 “나쁜 조건”들은 이미 제거된 상태다. 부부는 이처럼 ‘완벽하게’ 진행되는 과정에 무언지 모를 의구심을 품지만 의사는 단호하다. “아이에게 최상의 출발점을 주세요”. 많은 고민을 요하는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건강한’ 신체, ‘건강한’ 정신, 긴 기대 수명 ― 이런 것들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최상의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전문직 종사자 역에는 유색인종을 배정하는 헐리우드 영화의 문법대로 이 장면의 의사는 흑인이다. 나쁜 유전자들은 제거했지만 여전히 당신의 분신이라며 인공 수정을 권하는 이 의사는 자신의 아이를 가질 때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스스로의 흑인 정체성을 부정해야 하는, 배아에서 흑인의 인종적 특성을 나타내는 유전자를 제거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지는 않을까?9
산전 검사의 문제는 정상성이라는 이슈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무엇을 “최상의 조건”으로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무언가를 최상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반대로 무언가를 최악이라고 지목하는 일이기도 하다. 김선혜는 이런 고민을 밝힌다.
착상 전 유전자 검사는 수정란 단계에서 검사가 진행되고 이식을 해야 하는 ‘정상’적인 배아와 ‘폐기’ 해야 하는 배아를 미리 구별하기 때문에 ‘선택적 낙태’를 방지하는 보다 더 윤리적인 기술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의 기준을 더욱 공고화하며, 장애와 질병이 있는 사람은 태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는 차별을 전제로 하여 시행되고 있는 기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생학적 재생산기술의 사용을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생명권’을 옹호한다고 볼 수 있을까? 반대로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이미 위계적으로 놓여있는 재생산의 구조를 변화시키는데 얼마나 유용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장려되어야 할 재생산’과 ‘지양되어야 할 재생산’이 이미 정해져 있고, 이를 국가가 우생학적 모자보건법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개인의 ‘선택’은 이러한 구조로부터 자유롭기 어렵기 때문이다.10
여기서 읽히듯 착상 전 유전자 검사 기술은 (낙태 반대론자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인간으로 취급하는) 태아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윤리적 문제를 피해갈 수 있게 해주는 기술, 숫제 “보다 더 윤리적인 기술”로 종종 이해되지만 이는 도리어 보다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를 전면에 드러낸다. 어떤 인간이 태어나도 좋고 어떤 인간이 태어나면 안 되는가. 인간의 어떤 요소가 세계에 존재해도 좋고 어떤 요소가 존재하면 안 되는가. 초음파 검사, 양수천자, 착상 전 유전자 검사와 같은 기술들은 태아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주어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케 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정상성 기준에 대한 고민이 함께 가지 않는다면 역으로 특정한 생명에 대한 재생산만을 강요하는, 다시 말해 ‘선택권’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드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이야기해 보자. 착상 전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는 배아의 청각 장애 유전자를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최상의 출발점”을 주라는 저 의사의 말을 생각하자면, 청각 장애 유전자를 가진 배아는 폐기되어야 할 ― 미래에는 편집되어야 할 ― 배아이다. 그러나 농문화 속에서 청각 장애에 대한 저항감 없이 살아가는, 청각 장애를 가진 아이와 농문화 속에서 소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한 청각 장애인에게는 어떨까? 사회가, 나아가 법이, 장애 유전자를 가진 배아의 선택을 강제하는 것은 결국 그 청각 장애인 자신의 삶을, 그 가치를 부정하는 일일 것이다.11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자연임신을 통해 “열등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주인공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직원을 채용하는 ― 그리고 자신의 필생의 꿈이었던 ― 우주항공회사 가타카에 취업하기 위해 타인의 유전자정보를 산다. 정확히는 타인의 머리칼, 혈액, 소변, 피부 각질 따위를 가서 유전자 검사 시에 허위로 제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유전자 정보를 파는 건 어떤 사람일까? 다름 아닌 장애인이다. 사고로 후천적인 하지 마비 장애인이 된, 그래서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없게 된 사람이 주인공에게 자신의 ‘신분’을 파는 것이다.
“더 이상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이 전부가 아닌” 묵시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가타카〉는 정상성이 강조될 때 ‘비정상’으로 내몰린 삶이 어떤 것인지를 역설한다.12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주인공의 삶 ― ‘안 좋은’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 이나 그에게 유전자 정보를 파는 한 장애인의 삶 ― 집 밖에서 생활하지 못하게 된 ― 이 이 묵시론을 이룬다. 무엇이 어떤 이유로 “최상의 조건”으로 불리는지를 고민하지 않은 채 주어진 그것만을 고민하는 사회는 결국, 누군가의 삶의 가치를, 그 삶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실패하는 재생산에 관하여
〈가타카〉의 사회에서 주인공은 이를테면 실패한 재생산의 결과물이다. 〈24주〉의 태아 역시 태어났다면 그런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재생산이 무엇이길래 실패와 성공이 나뉠까? 무엇이 성공적인 재생산일까? 재생산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말 그대로 이것은 생산의 반복을 가리킨다. 기존의 생산 체제 혹은 과정이 있고,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 재생산이다. 이런 점에서 경제학은 이어진 생산의 규모에 따라 재생산을 확대 재생산, 단순 재생산, 축소 재생산으로 나눈다. 기존의 생산력을 뛰어넘는 수준의 성과를 이루어 내는 확대 재생산, 그것이 성공적인 재생산이다.
인간의 재생산 역시 다르지 않은 대접을 받는다. 부모 세대보다 키가 큰, 학력이 좋은, 돈을 잘 버는, 그런 아이를 낳는 것이 성공적인 재생산이다. 부모 세대에 없던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것은 실패한 재생산이 되고, 부모가 갖고 있는 장애를 그대로 물려 받은 아이 역시 실패한 재생산의 산물이 된다. 사회의 기준 자체를 의문시하는 전면적인 고민 없이 발달하는 (유전자 편집 기술은 물론이고) 산전 검사 및 낙태 기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의 낙태 합법화는 어쩌면 이러한 ‘실패한 재생산’을 막는 장치, ‘성공적인 재생산’을 강요하는 장치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 글의 부제에서 ‘재-’와 ‘–생산’ 사이에 빗금을 그은 것을 의아하게 여긴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빗금을 통해 나는 기존의 규범에서 자유로운 생산을 상상해 보고자 했다. 임신출산과 관련되는 과정을 ‘재생산’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기존의 사회 체계를, 기존의 규범적 존재들을 반복생산해야 한다는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주어진 현실에 비교 당하지 않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의 시작으로서의 ‘생산’으로서 고민할 때 임신출산, 그리고 낙태에 관한 논의는 좀 더 다변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재/생산이 그 자체 독립적인 생산일 때에야, 생산되는 존재들은 그 자체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장애인이 태어나는 것은 재생산으로서는 실패이지만 생산으로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재’라는 한 글자를 떼어냄으로써 이루어질 일은 물론 아니다. ‘재’라는 말을 사용하게 하는 경제적인 논리, 정상성 중심적인 논리가 타파될 때에야 아마도 인종이나 장애, 질병, 섹슈얼리티 같은 것과 관계 없이 각자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이주민의 섹슈얼리티, 장애인의 섹슈얼리티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자. 재/생산이 재생산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그러니까 사회의 정상성을 반복 생산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이들의 섹슈얼리티는 통제 당하고 있다. 청소년 부모, 이민족 아동, 장애 아동 등은 ‘비정상’으로 간주되기에, 재생산의 영역에 등장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재/생산 담론을 새로이 사유하는 것은 이 통제되는 섹슈얼리티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방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
우생학. 독일에서는 아예 인종위생학으로 불렸던 그것은 윤리적 고민을 포기한 ‘재생산’ 논리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우수한 유전자만을 남기고자 했던 그 시도는 단순히 미래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특정 인종의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강제 단종으로 이어졌던 우생학이라는 개념이 모자보건법에 남아 있는 것은 단순한 흔적으로서만은 아니다.13 개개 인간을 독자적인 존재로 보는 대신 어떤 자원, 개량되어야 할 어떤 자원으로 여기는 관점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사회적 조건이 아닌 개인의 유전적 자질만을 따지려 드는 한, 윤리적 고민을 회피하는 길을 계속해서 찾고자 하는 한, 앞에서 언급한 기술들은 우생학의 보다 진보한 수단 이상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실패‘하는’ 재/생산, 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인종적이거나 성별적인, 장애나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있어서의 약자성을 가진 존재를 낳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생산성을, 기존의 규범을 기준으로 삼기를 ― 그것을 반복하기를 거부할 때 재/생산은 언제나 실패가 된다. 기존의 규범에 부합하는 존재를 생산하기를 거부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재생산’이 아니게 된다. 기존의 규범 자체를 바꾸려 들 때, 재생산은 비로소 생산이 된다. 장애를 환대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자. 그것은 재생산으로 유지되는 사회가 아닐 것이다. 재생산에 부러 실패하는, 유지가 아니라 생산–창조를 시도하는, 그런 사회일 것이다.
나아가며
(장애라는 하나의 요소만을 생각하더라도) 낙태를 둘러싼 윤리적 고민은 태아를 생명으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중 어느 것을 우위에 둘 것인가 하는 단순한 구도로 정리되지 않음이 드러난다. 어떤 삶을 어떻게 낳(지 않)을 것인가, 어떤 삶을 살 만한 삶, 가치 있는 삶으로 인정하고 어떤 삶을 부정할 것인가, 그런 기준들을 가진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런 고민들을 포섭하지 않고서 진정한 윤리적 고민은 불가능하다.
그레타 가드의 말을 빌자면, 지금의 재생산권 논의는 “생략이라는 수사학적 틀”을 통해 작동하고 있다.14 언론이 보여주는 중산층 정상 가정의 행복한 재생산 (그리고 그것을 돕는 의료기술들) 이라는 구도는 무엇을 생략하고 있는가? 이 구도에서는 축복 속에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기를 수 없는 모든 삶들 ― (경제적으로는 신체적으로든) ‘결함’을 가진 채 재생산을 시도하는 삶, 재생산을 희망하지 않는 삶, ‘결함’을 가진 존재를 재생산하는 삶들이 온전히 생략된다. ‘낳으라’고 명령하는 지금 한국 사회는 재생산에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요구되는 것인지, 그 과정에 어떤 권력들이 개입하는지, 누가 무엇을 책임지게 되는지와 같은15 수많은 요소들을 생략한 채 자신의 맨얼굴을 숨김으로써 더 이상의 논의를 차단하고 있다.
필요한 일은 주어진 것 가운데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라는 명령 자체에 반문하며 숨겨진 조건들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페미니즘 실천이라고, 더 구체적으로는 교차성 페미니즘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생략에 의존하는 선택의 담론과는 달리 에코페미니즘적, 환경적, 재생산적 정의16에 대한 교차적 분석은 이 다양한 관점들 사이의 교차들을 탐구함으로써 포괄에 의존한다”.17 출산과 낙태 사이의 선택이라는 장면에서 (다분히 고의적으로) 누락되어 있는 여러 요소들 ― 이 글이 주로 다룬 장애를 비롯해서 계급, 인종, 나이 등에 이르기까지를 드러내는 접근이 페미니스트의 할 일이다.
출발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에서 언급한 많은 기술들, 그리고 아직 다루지 않은 또 다른 많은 기술들 ― 예컨대 대리모의 임신과 관련된 기술들, 혹은 트랜스젠더의 임신과 관련된 기술들 ― 속에서 이루어지는 재/생산 과정에 대한 고민의 출발이 말이다.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재생산 현장의 사회적 관습들은 역설적으로 여성을 윤리적 고민의 담지자로 만들어 왔다. 그 고민의 끝에 있는 것은 아직까지는 (고민을 무시하는) 어떤 강제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 고민들을 이어 받는 것, 그리고 그것에 현실적인 힘을 부여하는 일일 것이다.
뒤에서 숨겨진 채 수없이 교차하는 많은 요소들을 잊지 않을 때, 낙태죄 폐지 운동은 나쁘지 않은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어떤 삶이 가치 있고 어떤 삶이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될 수많은 질문들을 전면으로 끄집어 낼 수 있을 좋은 기회로서 말이다.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를 마뜩지 않게 여겼던18, 그래서 집회에 가서도 함께 외치지 않았던 나지만, 그 구호 곁에서 다양한 구호들이 펼쳐질 운동의 장에 함께 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익숙한 고민들을 함께 곱씹으며, 보다 전복적인 구호를, 보다 도발적인 질문을,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19
1이 글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주최로 2017년 9월 2일 서울 인권중심사람 한터에서 열린 특강 〈영화로 얘기해 보는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 정치〉의 제 4강에서 나눈 이야기를 사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문장이나 생각 중 일부는 앞서 썼던 다음 글들에서 가져왔다.
「낙태죄 폐지 이후를 상상하기: 〈24주(24 Wochen)〉」(2017, 개인 홈페이지)
「재/생산에 관한 중언부언 두서 없는 메모」(2017, 페미니즘 정치의제와 적녹보라 패러다임 워크숍 발제문)
「적대자들의 연대 : 시스젠더,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그리고 재/생산」 (2017, 성소수자인권포럼 발제문)
「장애인이 낳는다는 것, 장애인을 낳는다는 것 – 장애인이 산다는 것」(2016, 《비마이너》)
2정확히 어떤 고민을 그는 하고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소개하는 두 개의 시놉시는 그 고민을 다르게 요약한다. 제 17회 전주 국제 영화제는 이 영화를 “성공한 코미디언 아스트리드는 매니저인 남편과 둘째 아이를 가진다. 기쁨도 잠시, 부부는 아이에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출산일과 함께 다가오는 무거운 결정의 순간은 아스트리드를 짓누른다.”는 말로 소개했다. 반면 영어권 영화 소개 사이트 IMDB는 “딸 하나를 둔 한 행복한 기혼 여성. 자신이 아이를 더 갖고 싶어하는지, 이것이 자신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고민하게 된 것은 이미 임신 육 개월 차가 된 시점이다. 그녀는 임신 후기 낙태를 해야할지를 고민한다.”는 말로 소개한다. 한편 조금 더 자세한 영화 공식 사이트(http://www.24wochen.de/)의 소개는 이 태아가 “심각하게 아픈(schwer krank)” 것으로 묘사한다.
3“한국과 마찬가지로”라고 적었지만 양국 형법 낙태죄 조항의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임신을 중단시키는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한다”라는 해당 조항의 첫 문장이 보여주듯 독일 형법이 낙태의 주체를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면(여성 스스로의 낙태에 관해서는 3항에서 언급한다) 반면 한국 형법 269조는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를 우선 규정하며 270조에 가서야 의사 등의 시술 주체에 대한 규정을 내어 놓는다.
이하에서 인용하는 독일 형법은 내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법적 엄격성보다는 가독성에 초점을 두고 옮긴 것이다. https://www.gesetze-im-internet.de/stgb/__218.html에 독일어 원문이 공개되어 있으며, 같은 사이트에서 영어 번역본(https://www.gesetze-im-internet.de/englisch_stgb/englisch_stgb.html) 또한 확인할 수 있다.
43항 및 4항 역시 한국의 상황과 비교해 논할 지점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5물론 이러한 형태로 법이 개정되기까지 독일에서도 치열한 논쟁과 운동이 있었다. 크게 70년대 서독의 낙태 합법화 운동과 90년대 독일 통일 과정에서의 형법 정비 논의로 나눌 수 있는 이 과정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조국, 「낙태 비범죄화론」, pp. 709-710, 『서울대 법학』 제54권 제3호,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13, pp. 695-728을, 자세한 소개로 베른트 슈네만, 한영수 역, 「임신중절」, 『형사법연구』 제 17호, 한국형사법학회, 2002, pp. 279-299을 참고하라.
7한때 독일의 형법 역시 낙태에 대한 처벌 예외 사유로 “우생학”을 두고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각주 5번에 언급한 자료들을 참고하라. 한국은 모자보건법 제 14조에서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를 처벌 예외 사유로 두고 있으며, 현행 대통령령은 “연골무형성증, 낭성섬유증 및 그 밖의 유전성 질환”을 그 예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의 법령에 우생학적 사유가 낙태 허용례로 언급되는 것은 장애에 대한 사회적 혐오와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낙태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기본적으로는 반대인데,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며 “아이가 세상에 불구로 태어난다든지, 이런 불가피한 낙태는 용납이 될 수밖에 없는 거 같다”고 답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8착상 전 유전자 검사는 이미 임상에서 실행되고 있다. 한편 유전자 편집은 60-70년대 ‘제한 효소’의 발견과 함께 연구가 시작되어 현재 3세대라 불리는 크리스퍼–캐스9(CRISPR-Cas9) 유전자 가위 및 그 뒤를 잇는 3.5세대 기술에 대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크리스퍼–캐스9 기술을 통한 어류, 설치류 등 소동물 및 식물에 대한 유전자 조작 가능성은 이미 확인되었으며, 인간 배아에 대한 적용 또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2015년 중국의 순 얏센(Sun Yat-sen) 대학에서 생존불가능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진행한 크리스퍼–캐스9 실험은 윤리적 논란을 불러 왔지만, 2017년에도 한국과 미국의 연구진으로 구성된 다국적 연구팀이 생존가능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진행해 성공률을 제고하는 성과를 얻었다. 유전자 가위로 편집된 배아의 착상은 시도된 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물론 이 영화의 설정대로라면 더 이상 인종이 계급을 결정하지 않으므로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주인공도, 주인공의 동료나 상사도, 주인공의 회사를 방문하는 형사도 모두 백인인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 설정엔 의문이 생긴다.
11이것은 영국에서 실제로 논란이 되었던 일이다. 2008년 제정된 “인간 수정과 배아에 관한 법률”은 “비정상성(abnormality)”을 가진 배아를 선택하는 것을 금지했고, 농인 단체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황지성, 〈‘장애가 있는 생명의 자격’? 누가 판단하는가〉, 《비마이너》 2016.12.21.을 참고하라.
12아쉽게도 영화가 직접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는 정도에 그치지만.
13최근 한국에서는 90년대까지도 한센인들에게 강제로 행해졌던 불임수술, 소위 ‘단종수술’이 재조명된 바 있다. 현재를 기준으로 청년으로 분류되는 나이에 속한 장애인들 역시 가족을 비롯한 ‘보호자’로부터 종종 불임수술을 강요당하곤 한다. 한국에서 우생학은 낙태 허용 사유를 넘어 적극적인 ‘단종’ 사유로서 여전히 살아 있다.
14Greta Gaard, “Reproductive Technology, or Reproductive Justice?: An Ecofeminist, Environmental Justice Perspective on the Rhetoric of Choice,” p. 110, Ethics & the Environment, Volume 15, Number 2, Fall 2010, pp. 103-129.
15예컨대 한국 사회는 중산층 이성 부부에게 자녀를 낳을 것을 요구한다. 난임 치료, 산전 검사와 같은 과정들에 의료–자본 권력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책임’은 ‘선택’이라는 미명 아래 대개 여성 개인에게 전가된다.
16“그러나 재생산 권리가 포괄하는 중요한 요건들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애초에 자기 삶의 조건상 권리에 대한 접근권이나 선택권 자체를 가지기가 어려운 여성들의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때문에 1980년대 후반 미국의 선주민 여성들과 비백인 여성 단체들을 중심으로 ‘재생산 정의‘라는 개념이 제안되었다. 이 개념은 재생산 건강과 재생산 권리에 더해 이를 확보하기 위한 여성들의 역량 강화, 그리고 이를 위한 사회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를 드러내고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삶에서 다양한 맥락과 조건 하에 몸과 건강, 성교육, 성관계, 피임, 임신, 출산, 섹슈얼리티의 표현과 실천 등을 제한받거나 통제당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교차적으로 분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요구들을 구체화한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존재‘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점을 전환하여 재생산 권리를 누구나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책임과 역할을 사회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요구를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요구와도 교차하여 더욱 구체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여성의 재생산 정의를 위한 요구는 단지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조건이나 출산 여부로서만 다루어지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조건과 섹슈얼리티 전반을 고려하게 하며, 장애나 질병을 가진 이들의 사회적 존재와 조건, 이를 둘러싼 가치 자체를 새롭게 전환하여 볼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영,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결정권’ 차원을 넘어 ‘재생산 정의’로〉, 《비마이너》, 2016.01.13.
17Greta Gaard, Ibid., p. 124.
18거칠게 요약하자면, 이 구호가 자궁 가진 이들(만)을 여성으로 호명하는 사회적 구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19플로어 토론 시간에 나왔던 여러가지 논점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한 채 글을 맺었다. 고민을 좀 더 익힌 후에, 어떤 자리에서든 함께 나누어 보고 싶은 논점들이다.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따옴표를 쳤다고는 해도, 그 정도로 해 두어도 될 만한 시점이라 판단했었다고는 해도, “‘사실상’ 비범죄화” 같은 말을 쓴 것은 꽤 오래 걸려 남아 있다. 지금 change.org에서는 218조와의 작별: 더 이상 형법으로 임신중지를 규제하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임신중지를 범죄화한 형법 218조가 150년이 지난 지금도 효력이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아직까지도 임신중지는 상담을 거치고 12주 이내인 경우에 처벌이 면제될 뿐 “합법”이 아닙니다. 이제는 임신중지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처벌이 완전히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형법 218조, 범죄화·법적 규제를 대체 없이 삭제할 것을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