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묘하네. 공연[1] 시작을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는 점을 빼면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었다. 중앙에는 빈백 형태의 소파 두어 개, 작은 테이블 한두 개, 의자 두 개가 딸린 4-5인용 식탁이 하나, 평상이 하나. 구석진 곳들에는 작은 가구 몇 가지. 특이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있을 법한 것이 있지 않아서 묘했다. 예를 들면 안전 손잡이나 전동 리프트 같은 것들. “물리적으로 편의시설이 완벽한 환경을 포함하여 ‘불안함이나 걱정이 없는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라는[2] 작가의 글을 읽으며 무대를 보고 있었다.
이곳은 “장애인만 예약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비롯’”. 미지의 방문객을 위해 온갖 장비를 설치해 두는 대신 “게스트가 원하는 대로 침대와 의자 등 가구의 크기와 높낮이를 정하고, 공간 구조까지 직접 선택해 자신의 몸에 맞는 방”을 제공하는 곳이다.[3] 이번 주의 투숙객들은 안전 손잡이나 전동 리프트를 요청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재간(백우람 분)과 선이(강보람 분)는 휠체어나 보행 보조기를 쓰지 않는다. 유랑(차윤슬 분)은 전동휠체어를 쓰지만 종종 걷기도 한다. 운영자 영원(김지수 분)은 별도의 공간에서 생활하고, 휠체어에서 바로 옮겨 앉기에 적당한 높이인 평상에 올라갈 때 외에는 휠체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비롯을 “물리적으로 […] 완벽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거창한 시설이 아니라 ― 소품 중 ‘장애인용’으로 생산됐음직한 것은 유랑이 쓰는 바퀴 달린 방석 뿐이다 ― 각자의 키에 맞는 의자, 휠체어 사용자가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자리 몇 개를 비워 둔 탁자, 힘이 약하거나 손이 닿지 않아도 밀고 들어올 수 있는 가볍고 턱 없는 문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묻고 그것을 갖추는 데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들이는, 이를테면, 태도. 이곳은 일주일 단위로 이용할 수 있고 예약은 격주로만 받는다. 사이의 일주일은 이용자가 요청한 대로 공간을 재배치하는 데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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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애인의 작품은 아마 두 편을 보았는데 둘 다 극단이나 연극이 주제였다.[4] 아마도 어느 정도는 그래서였을 텐데 ― 연극을 명시적인 주제로 삼지 않는 이 공연을[5] ― 저 묘함을 두고서 공연이 무엇을 하는지를 생각하며 보았다. 흔한 사물들로, 다만 각별한 시간과 마음으로 만들어진 이 “불안함이나 걱정이 없는 일상의 공간”에 미처 다 들어오지 못한 채 말로만 그려지는 것들을 많이 생각했다. 선이는 이번이 첫 방문이지만 예약은 전에도 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와상장애인인 명숙 언니가 쓸 호이스트를[6] 요청했다. 비롯 주위를 오가는 버스는 모두 저상버스라고 했다. 비롯에는 40cm 폭의 이랑 사이 사이에 2m짜리 도랑이 있는 텃밭이 있다. 마을 주민들이 호의적이다.
하나의 공간을 특정한 몇 명에 맞추어 꾸리는 일은 어쩌면 시간과 마음만으로도 가능할 수 있지만 그 경계를 조금만 벗어나도 너무나 많은 것이 ― 값비싼 기구가, 저상버스가 다닐 수 있을 만한 도로가, 생산성이 떨어져도 괜찮은 넓은 땅이, 종종 그야말로 운에 달린 관계들이 ― 필요함을, 그런 것들은 현실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무대에서조차 구현하기 쉽지 않음을, 정말로 그런 곳을 찾거나 만든다 해도 그곳이 마을 하나를 넘어서는 규모가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이) 공연은 다 보여주는 대신 그저 말하므로, 조금만 설명하므로, 부재하는 그곳을 상상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대 위의 비롯을 벗어나면, 말로만 존재하는 텃밭과 마을을 벗어나면, 얼마나 장애물이 많은지, 얼마나 불안과 걱정 투성이인지를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텃밭이 있다는 무대 밖의 공간에는 실은 계단이 있다. 전 노선에 저상버스가 운행된다는 도로는 실은 휠체어 사용자는 탈 수 없는 차로 가득하다. 극장을 ― 이런저런 시설을 갖춘 ‘장애인문화예술원’ 이음센터 건물을 ― 나서면 마로니에 공원과 혜화역이 있다. 장애인 권리 보장 촉구 집회가 열리는 곳들이다. 흐릿하고 연약한 상상만이, 극장 안과 밖을, 전혀 다른 두 곳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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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커튼 한 장일 뿐인 문과 관객들의 상상으로 두 곳을 나눈 덕에, 이곳은 무사히 휴식의 공간이 된다. 비롯은 물론 이런 식의 공간 자체를 처음 와 보지만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느긋하게 하루를 즐길 수 있다. 등장 인물들 간의 관계도 그렇다. 우연히 같은 곳에 묵게 되었고 셋 다 장애인이라는 것 외에는 면식도 공통점도 없는, 서로 다른 장애를 갖고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이다. 아무도 낯을 가리지 않고 금세 친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말을 걸어 볼 만한 공통의 경험 쯤은 있고 쌓인 앙금이나 싸움으로 이어질 무례는 없는, 그리고 곧 헤어질 수 있는 편리한 사이.
극단의 미래나 각자의 연기론을 두고 내내 옥신각신 했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갈등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탈시설 운동을 한다는 선이에게 다른 이가 ‘좋은 일’ 하신다고 말했다가 그런 게 아니라는 반박을 들은 것 외에는 충돌이랄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애초에 각자의 삶과 엎치락뒤치락 하는 데 지쳐 잠시나마 쉬려고 모이게 된 이들이다. 무대는 장애인이 갈 수 있는 곳이 없는 바깥 세상과도 이곳에 모인 서로와도 부대낄 일 없는, 모든 것이 단절되고 중지된 공간이다. 그러나 무언가의 중지는 언제나 다른 무언가의 시작이다. 아니, 시작을 위해서는 중지가 필요하다. 특히나 기존의 상황이 발목이나 휠체어 바퀴를 붙잡는 종류의 것이라면 더더욱.
싸움과 불안을 피할 수 있는 비롯에서의 일주일은 그래서 이들에게 시작의 계기가, 용기를 내어 볼 힘이 된다. 편의시설이 완비된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 자체로 삶이 아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되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무난한 생활 ― 혹은 일상 ― 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시작할 용기를 내는 출발지이자 지치거나 실패했을 때 돌아와 쉴 경유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들이 지금껏 가져본 적 없는 출발지다. 출발지를 찾은 덕에 세 사람은 비로소 결단을 내리고 용기를 내고 약속을 한다. 크게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작게는 ― 어쩌면 이게 오히려 큰 걸까? ― 지금껏 무서워 피하기만 했던 개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만날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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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으로 용기를 내는 일마저 별다른 걸림 없이 매끄럽다. 유일한 긴장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들에서 나왔다. 예를 들면 이들이 둘러 앉아 젠가 놀이를 할 때. 떨리거나 멈추곤 하는 손과 애초에 뜻대로 안 되는 일이기에 게임이 된 젠가 블럭의 만남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조심스레 블럭을 빼다 와르르 무너져도, 그래서 테이블 아래 곳곳에 흩어져도 실은 별일 아니지만 이 공연에는 자막이 있다. 뜻하지 않게 젠가탑이 무너지면 어긋나게 된다.[7] 자막은 때로는 한 단어씩 때로는 한 구절씩 넘어간다. 때로는 재간/백우람이 몇 초씩 말을 멈추는[8] 위치와 일치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다. 영원이 투숙객들에게 커피를 건넬 때, 김지수는 테이블에 앉아 실제로 커피를 내린다. 다시 들기 편하도록이었을까, 몇 번에 걸쳐 물을 부을 때마다 매번 전기 주전자를 받침 테두리에 걸쳐 살짝 기울여 두다가 마지막 잔을 내리고서야 바로 두었다. 삐딱하게 선 주전자 속에서 물이 찰랑이는 동안, 비롯의 방을 꾸린 일주일과 이 무대를 만든 몇 주를, 어딘가 조금씩 어그러지며 흘렀을 시간과 그 어긋남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는 출발들을 생각했다.
↥1 김지수 작, 강예슬 연출, 《비롯되다》, 극단 애인 제작, 서울: 이음센터 이음아트홀, 2026.05.05-10.
↥2 김지수, 「작가의 글」, 《비롯되다》 프로그램북. “19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강예슬 연출가와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극단 애인의 공연은 물리적으로 편의시설이 완벽한 환경을 포함하여 ‘불안함이나 걱정이 없는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였더는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비롯되다〉를 썼습니다.”
↥3 「작품소개」, 프로그램북. 공연이 끝난 후에 읽었는데, 이걸 먼저 읽었다면 무대를 묘하게 여길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4 ‘폐업’ 위기에 놓인 극단 애인의 사정을 무대화한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_선택》(2023)과 공연을 준비 중인 장애인 극단 내부의 갈등과 고민을 다룬 《없던 공연- 어느 장애연극인들의 욕망에 대한 기록》(2024)을 보았고, 후자를 보고는 「끝이자 시작인 어떤 시간」을 썼다.
↥5 의식하지 못했지만 공연이 주요한 소재이기는 했다. 재간의 직업은 클래식 지휘자, 유랑의 직업은 유튜버다. 선이까지 세 투숙객 모두 일주일의 체류를 마무리하며 인근 주민들 앞에서 작은 공연 ― 각각 지휘, 마술, 동화구연 ― 을 선보인다. 나와 동행한 하은빈은 이 장면과 (뒤에서 언급할) 젠가 게임을 하거나 커피를 내리는 장면을 이 공연 속의 공연으로 꼽았다. 역시 공연이 끝난 후에 읽은 연출의 글에는 “무대 위 장애배우의 신체적 떨림은 관객에게 불안으로 읽히지만, 배우는 불안하지도, 불안을 의도하지도 않습니다. 그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연극적으로 드러낼 것인지 고민하며, 함께 일상을 보내는 단원들을 오래 관찰했습니다. […] 젠가를 하고 타로를 다루는 손, 커피를 내리고 잔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 지휘하는 순간 등 모든 장면은 연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를 오래 바라보고 관찰한 시간이 쌓였기에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강예슬, 「연출의 글」, 프로그램북). (유랑의 카메라는 “젠가를 하고 타로를 다루는 손”을 비롯한 몇 가지를, 종종 클로즈업으로, 촬영해 무대 뒤 벽에 실시간으로 투사한다.)
↥6 hoist. 수직·수평 이동용 리프트의 일종. 천장에 레일을 설치하는 형태도, 이동식 스탠드형도 있다. 어떤 타입을 요청했는지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7 이 역시 어쩌면 큰일은 아니지만, 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관객이 있다면 곤란을 겪을 것이다. 어떤 대책을 세워두었을까를, 혹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대처할지를 궁금해 하며 보았다.
↥8 백우람은 말막힘이 있다. 그는 그것을 “침묵의 오륙초”라고 부른다. 예컨대 “이응이 초성으로 올 때 어렵다. 단어로 얘기할 때랑 문장으로 얘기할 때는 또 다르다. 근데 하려고 하면 더 안 된다.침묵이 10초가 되”기도 한다. (극단 애인, 『장애배우의 훈련법과 연기 방법론 구축을 위한 연구』, 2021, 60-1쪽.) 그는 “배우 하면서 갈등이 생기거나 해소가 안 되는 부분”이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침묵의 오륙 초’라는 고유성을 찾아서 [해소되었다]”고 말한다. (극단 애인, 『장애배우의 연기로부터 장애미학의 탐색으로』, 2024, 44쪽.) 내가 보지 못한 애인의 공연 중에는 《침묵의 오육초: 나를 쏟아내다》(2020)과 《침묵의 오육초: 시를 그리다》(2023) 등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