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결에 장을 보고는

불시에 시작되어서는 미처 다 볼 틈도 없이 지나갔다. 물론 시작 시각은 정해져 있었다. 장소는 신림중앙시장 입구의 어느 마트 앞. 몇 분을 남기고 도착해 근처를 둘러보며 서성이고 있으려는데 마트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이가 말을 걸었다. 관객 ― 그보다는 참여자라고 해야겠지만 ― 임을 확인하고는 옆의 벤치에 앉혔다. 얼마 후 다른 관객이 도착하자 작은 수제 수첩 같은 것을 건넸다. 위임장이라고 적혀 있었던가. “아시아가사돌봄노동협회”[1]“서울에서 급진 가사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여성들의 커뮤니티”다. 2024년에는 협회지를 발행하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워크숍, … 각주로 이동를 경유해 우즈베키스탄 ‘새댁’의 장보기를 위임 받는 데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A6쯤 되는 크기의 색지가 너댓 장쯤 되었던 것 같다. 그보다 길어서 한 번 접어 끼워 넣은 흰 종이에는 장볼 것 목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칸마다 작은 글씨로 식재료나 생필품을 적어 넣은 표였는데 적어도 10열에 20행은 되었을 것이다. 실은 훨씬 더 많았던 인상이지만 괜한 과장은 하지 않기 위해 이 정도로 적는다. 페이지를 후루룩 넘기며 훑어만 본 후에 서명부터 하고는 다시 자세히 보려는데 이내 수첩을 거두어 갔다. 그렇게 불시에, 형식적인 동의를 거쳤을 뿐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불시에 시작되었다.

시작을 알리는 것 ― 당황을 안기는 것 ― 은 장보기에 동행할 다음 안내자의 등장이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에 (그의 이름을 들었던가?) 그는 현금 오만 원을 건네며 같이 장을 보아야 한다고, 아까의 목록 중에 사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과 알 수 없는 것이 섞여 있었다는 것 말고는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다. 목록을 다시 받아 하나하나 훑기 시작하지만 금세 또 거두어 간다 ― 더 보겠다고 혹은 돌려주지 않겠다고 버텨도 되는지를 알 수 없다. 세 명의 관객 모두 그렇게 희미하고 못미더운 기억만을 품은 채, 애초에 무엇을 위한 장보기인지도 모른 채, 시장에 들어선다.

여러모로 묘한 장보기다. 낯선 동네에서 낯선 이에게 이끌려 이런 저런 상점을 드나든다. 오 만원은 셋이 공유하는 예산이다. 즉흥적인 토론을 거쳐 무엇을 살지를 정한다. 토론이라고 하기엔 영 중구난방이다. 목록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것이 있었던가요, 누가 말을 꺼내도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고 안내자 역시도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저 맞장구를 치거나 목록과는 큰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시장을 도는데, 상인들은 우리를 알아보고 반가이 맞는다. 이미 앞에 두어 팀이 장을 보았고 제작진은 그 전부터 상인들을 만나 두었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에 살았던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

나는 상대를 모르지만 상대는 나를 안다 (흔치 않게, 집성촌에 이사를 들어간 외지인이었다). 나는 그저 모르는 노인에게도 꾸벅 인사만 잘 하면 되는 별다른 의무 없는 어린 아이 시절을 보냈지만, 노인들의 절반 ― 수십 년을 출신지의 이름을 따 어디어디댁으로 불리는, 역시 외지에서 결혼으로 들어온 타성의 여성들 ― 은 나보다 훨씬 무서운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언제든 자신의 삶에 끼어들 수 있는 ‘시어른’들이 사방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그런 식의 두려움이나 불편함까지는 없었지만 장보기는 쉽지 않았다. 목록에 있는 것이 상추인지 아니면 배추인지, 마인지 아니면 아욱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고 자주 보이는 푸성귀는 전부 조금 전에 이름을 읽은 것만 같았다.

비교적 기억에 강하게 남은 것들은 큐민 같이 다른 언어로 된, 동네 재래시장에서 찾기는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사이 잊어버렸지만 더 강렬했던,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이름 중에는 한국에는 없는, 우즈베키스탄에만 있는 것들도 있었을 테다. 익숙한 먹거리를 찾을 수 없는 곳에 떨어져 버린 삶들을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에게 장보기를 위임한 이들은 한국에 온 이주민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현지인이었을 테지만 (위임장에 뭐라고 적혀 있었을까) 실은 같은 나라,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지역이 바뀌면 겪는 일이다. 고향인 경남을 떠나 서울에 살면서부터는 예컨대 콩잎장 같은 것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먹을 것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삶이 좀 더 낯설고 괴로웠을 것이다.

목록에 적혀 있던 “숨”이 대체 무엇이었을지 내내 궁금해 하면서, 청경채를, 고구마를, 포도를, 청소솔을, 청국장을, 카레 가루를, 마른 목이버섯을, 요거트를 샀다. 쌀을 사러 들어갔다가 눈에 띈 작두콩을 샀고 탈취제는 비싸서 포기했다. 가지도 샀던 건지, 그저 집 냉장고에 이미 있었던 건지 헷갈린다. 원래 집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넘긴 것이 실은 거기서 산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게 헷갈리는 것은 그렇게 채운 장바구니를 털어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용도도, 필요하기는 한 것인지도, 좋은 물건을 고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산 것들을 그렇게 얻어다 집에서 밥을 지어 먹었기 때문이다.

시간도 돈도 떨어져 갈 무렵 안내자는 우리를 시장에 속한 상가 건물로 이끌었다. 꽤 크지만 쓸모를 다해가는, 반쯤은 비었거나 그저 창고로 쓰이고 있는 건물의 옥상에 이르자 그는 사라지고 다른 이가 우리를 맞았다. 협회의 ‘임시사무소’다. 장을 제대로 봤는지 검사하거나 장본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 그곳에서, 그는 모종의 파업을 제안하고 안내한다. 짐 내려놓기. 아무것도 하지 않기. 그저 자신의 호흡과 맥박을 느끼기. 혹은 사무실 ― 그저 옥상, 그러니까 순 한데지만 ― 구경하기, 협회지 읽기. 켈린이[2]위임장에는 “새댁”과 함께 “kelin”이라는 우즈벡어가 적혀 있었다. 사전에 따르면 “신부, 새색시”나 “며느리, 새아기” 등을 … 각주로 이동 얼떨결에 맡았을 일을 역시나 얼떨결에 위임 받은 이들은 이렇게 켈린의 파업에 동참하게 된다.

이윽고 다함께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로 장바구니를 열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샀는지, 이걸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각자가 먹고 싶은 것을 혹은 서로에게 먹이고 싶은 것을 나누어 가졌다. 켈린이 매일 같이 질 무게를 나누어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 남의 집으로 가져갔다면 마구잡이로 샀다고 혼났을지도 모를 것들로 ― 눈치 볼 일 없이 먹고 싶은 것을 해 먹었다. 그러나 켈린과 나누지도, 켈린에게 돌려주지도 못했다. 그가 맡긴 돈으로 산 것들도,[3]역시나, 위임장에 예산과 관련한 항목이 있었는지 어땠는지 모른다. 적어도 기분 상으로는 그가 맡긴 돈이다. 그러고 보면, 위임 받은 일이 장보기가 … 각주로 이동 그에게 필요한 파업도 혹은 자기돌봄도. 그리고는 또 장을 본다. 가볍게 사다 먹은 무언가는 어느 켈린이 혹은 구산댁과 퇴촌댁과 마산댁이 기르고 내다 판 것일 터.

References
1 “서울에서 급진 가사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여성들의 커뮤니티”다. 2024년에는 협회지를 발행하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워크숍, 퍼포먼스 등을 진행했다. 이번에는 사마르칸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시사무소”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열었다. 제너럴쿤스트, 《임시 사무소 신림중앙시장》, 서울: 신림중앙시장 일대, 2025.10.31.
2 위임장에는 “새댁”과 함께 “kelin”이라는 우즈벡어가 적혀 있었다. 사전에 따르면 “신부, 새색시”나 “며느리, 새아기” 등을 뜻하는 단어다.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같거나 비슷한 단어가 쓰이는 모양인데, 갓 결혼해 남편네 가족의 집으로 들어가 가족 내 위계에서 낮은 위치에 놓이게 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Tommaso Aguzzi, “Kelin (Central Asia),” Global Informality Project Online Ecyclopedia, 2022; Asylai Akisheva, “‘Kelinism’ in Kyrgyzstan: Women’s Rights Versus Traditional Values,” Oxus Society for Central Asian Affairs, 2021.
3 역시나, 위임장에 예산과 관련한 항목이 있었는지 어땠는지 모른다. 적어도 기분 상으로는 그가 맡긴 돈이다. 그러고 보면, 위임 받은 일이 장보기가 다였는지 그것 말고 더 있었는지도, 이제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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