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투쟁; 예술가편》(이연주 작·연출, 서울: 두산아트센터, 24.05.28-06.15.)은 입장 전부터 풍부한 배리어 프리 장치를 제공한다. 작품 소개 글, 음성을 비치해 둔 것은 물론 촉감으로 무대 의상의 재질을 확인할 수 있도록 직물을 전시해 두었고 티케팅을 비롯해 여러 사항을 필담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장치 또한 마련되어 있다. 지하철 역에서 극장까지 안내보행도 제공한다. 시각장애인이 배우를 미리 구분해 숙지할 수 있도록 배우들의 자기 소개를 녹음한 카드도 있다.[1]왜인지 이것은 음질이 떨어지고 잠깐의 조작 실수로 삭제될 수도(점자로도 적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적어도 묵자로는 조심해 달라는 경고가 … 각주로 이동 그리고 이러한 꼼꼼함, 세심함, 혹은 정석적인 태도는 공연이 시작되면 사라진다.
물론 음성해설과 문자해설을 포함한 자막이 있었다.[2]일부 회차에는 수어통역과 터치투어도 있었지만 내가 본 회차는 아니었다. 그러나 음성해설은 “모든 움직임을 보여지는 그대로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단서와 함께 제공된다.[3]여기와 다음 단락의 인용구는 공연 소개 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모든’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도, ‘보여지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도 애초에 불가능한 기획이므로 그 자체로 아주 특별한 단서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저 한계를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인 취사선택이 있었음을 밝히는 말이었을 것이다. 할 수(는) 있는 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객석이 무대 사면에 배치되어 있고 배우들이 무대를 벗어나기도 하는 공연이어서 배우의 위치와 방향이 계속 변했음에도 그에 대한 해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예 ‘하면 안 될’ 일을 하기까지 했을 수도 있다. 자막에 대해서는 “공연 중 객석 위 스크린에 대사, 그림기호 등이 표시”된다는 안내가 전부였는데, 자막으로만 제시되는 문장도 음성해설로만 제시되는 문장도 간간이 있었다. 적어도 둘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다. 자막은 무대의 사면을 에워싸며 쳐졌다 걷히기를 반복하는 전동 반투명 커튼을 통과해 맞은편 벽에까지 닿았다.[4]별도로 일부 문장을 관객에게 혹은 배우들에게 보여주는 모니터가 따로 있었다. 두 장의 커튼과 벽, 총 세 면 중 자막이 적절한 크기로 선명하게 상을 맺을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이다.앞에 있건 뒤에 있건 셋 중 둘은 흐리고 너무 크거나 작은 채 시야에 장애물이 된다. 배우들이 움직이면 커튼이 일렁여 글자가 흔들리기까지 한다.
이 묘한 어긋남은 배우들의 몸을 통해 이해된다. ‘배리어 프리’라는 것이 자원 — 돈과 전문가 — 만 있으면 가능한 일인 것도, 가능한 만큼은 해 내면 항상 좋은 일인 것도 아님이. 어쩌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일도 아닐 수 있음이. 자신들의 말과 움직임을 여러 층위에서 혹은 여러 언어로 전달해 줄 온갖 장치를 갖춘 이 무대에 오른 배우들의 몸을 통해. 여섯 명의 배우 — 강보람, 김원영, 김지수, 백우람, 어선미, 하지성 — 중 상당수는 발음이 흐리거나 목소리가 작은 편이다. 사면 중 어느 한 면의 관객 가까이에서 나머지 세 면의 관객들 등지고 있을 때 그들의 말소리는 종종 알아듣기 어렵다. 여럿이 동시에 소리를 낼 때면 아예 묻혀서 사라지기도 한다. 시각장애인이 입장 전에 카드로 배우의 목소리를 익힌데도 누가 어디서 무어라 말하는지를 구별해 듣기가, 때로는 듣는 것 자체가, 그다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막에는 배역 이름과 대사가 함깨 뜨지만 이름이라는 것이 예술가 1, 2, 3 아니면 나 1, 2, 3 같은 식이므로 귀로 소리를 들으며 눈으로는 자막을 보는 나로서는 들리지 않았을 뿐더러 누가 했는지도 불분명한 대사를 글자로만 보게 되는 때가 종종 생겼다.
제거할 수도 있을 배리어의 일부를 남겨두거나 배리어 프리를 위한 자막을 구태여 새로운 배리어를 만드는 방식으로 무대에 삽입하는 저 묘한 어긋남은, 이렇게, 배우들의 몸을 통해 이해된다. 배리어 프리는 일직선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과제도, 어쩌면 애초에 능사도 아니다. 어떤 장치를 얼마나 꼼꼼하게 마련하든 이 배우들의 몸 자체가 끝끝내 배리어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배리어 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느 시점엔가 그런 몸들을 버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장애 배우만의 문제도 아니다. 장애 없이도 목소리 작은 사람이 있고 평소엔 크던 목소리도 유독 작게 나오는 날이 있으므로. 크니 작니 하는 것을 떠나서도 서로에게는 언제나 차이가 있고 자막으로든 수어로든 제3자의 음성으로든 변환할 때 그 차이는 삭제되거나 번역의 ‘배리어’가 될 것이므로. 무언가의 배리어를 말끔하게 없애는 장치를 만들고자 할 때 가장 쉬운 길은 그 무언가의 폭을 — 감각적인 다양성이든 내용의 복잡성이든 — 좁히고 애초에 말끔하고 매끈한 데서 출발하는 것일 터이므로.[5]2024년 서울변방연극제의 “오독하며 헤엄치기―희곡 「퇴장하는 등장 Ⅱ」 : [연루되며 읽기] 비평하기”(대전: 구석으로부터, 24.09.05.)에서 하은빈은 … 각주로 이동
↑1 | 왜인지 이것은 음질이 떨어지고 잠깐의 조작 실수로 삭제될 수도(점자로도 적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적어도 묵자로는 조심해 달라는 경고가 적혀 있다) 있는 카드, 그러니까 짧은 녹음 기능이 있는 편지용 카드로 제공된다. 이외에도 입구에는 감정적 조력이 필요한 이들이 붙잡거나 안을 수 있는 담요와 인형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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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일부 회차에는 수어통역과 터치투어도 있었지만 내가 본 회차는 아니었다. |
↑3 | 여기와 다음 단락의 인용구는 공연 소개 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
↑4 | 별도로 일부 문장을 관객에게 혹은 배우들에게 보여주는 모니터가 따로 있었다. |
↑5 | 2024년 서울변방연극제의 “오독하며 헤엄치기―희곡 「퇴장하는 등장 Ⅱ」 : [연루되며 읽기] 비평하기”(대전: 구석으로부터, 24.09.05.)에서 하은빈은 조금 다른 어휘를 써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자막, 음성해설, 수어통역 등이 추가될수록, 이를테면 지켜야 하는 “약속이 늘어날수록”, 배우든 오퍼레이터든의 실수가 용인되거나 티나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폭이 좁아지기에 관객의 장애(disablement)를 줄이기 위해 창작자는 장애가 없어야(“에이블able해져야”) 하는 역설적인 형국이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와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는, 적어도 충분히 긴 시간 동안 함께 작업해 온 배우들끼리 상대의 실수나 합의되지 않은 애드리브에 자연스레 대처할 수 있는 것처럼 창작진의 경험이 쌓일수록 — 그리고 예컨대 실시간 속기 방식 자막 같은 약간의 기술적 조치가 추가된다면 — 반드시 그런 방향으로 흐르지만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지만 나도 실은 그다지 낙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도 해소되지 않는 실수가 그대로 용인되거나 그 자체로 놀잇감이 될 수 있는 무대 쪽에 좀 더 기대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