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걸어야 열리는 문

몇 가지 흥미를 끄는 점 ― “Good Mourning”이라는 제목이나[1]고대영 개인전, 《Good Mourning》, 서울: 수치, 2023.12.08-2024.01.05.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지원” 프로그램 선정 전시라는 점, 어쩌면 “수치”라는 전시 공간의 이름도[2]아마도 고대영은 이곳의 운영진이다. ― 이 있기는 했으나 평소라면 아마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홍보물에 전시를 소개하는 문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문장의 인도 없이 이미지를 읽는 데는 별 소질이 없고 소질 없는 일을 감행하는 성실성도 없으므로, 보통은 보지 않는다. 주변에서 보았거나 볼 거라는 이야기들을 들은 것을 유일한 동기 삼아 관람했다.

전시장에는 짧은 서문이 놓여 있었다. “뇌전증을 그[작가]의 증상으로서 혹은 그의 리얼리티[로서]” 이해하기를 제안하거나 “AI 제너레이터와의 피드백 과정을 통해 직조해 낸 이미지들”, “폐차 직전의 상태가 되어버린 포르쉐는 사실 이유없음(그냥 그런 거다)”, “평소에도 녹취의 순간을 감지하여야만 하는 질환을 앓고 있는 고대영이 녹음한 친구의 목소리” 같은 몇 가지 단서를 제시하는 글이다. 하지만 쓰다 만 것이고[3]제목은 없고 마지막 줄은 “(작성 중)”이다. 문장의 꼴을 갖추지 않고 그저 몇 개의 단어나 구를 나열하고는 마침표를 찍은 곳이 종종 있다. 쓴 이는 … 각주로 이동 전시된 작품들 하나하나는 물론 그것들의 ― 혹은 “비행기로부터~ 포르쉐~ 말~ 마지막은 발로.” 이어지는 소재들의 ― 관계도 자세히 밝혀주지는 않는다.

역시 평소라면, 대강 훑어보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같은 날 관람한 지인이 마침 작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덕에 옆에 앉아서 한참 들었다. 작품에도 서문에도 명시하지 않은 여러 맥락들, 배경이 된 작은 경험들, 아직 닿지 않은 범위에 속하는 고민들. 역으로 말하자면 전시된 영상이나 이미지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그저 품은 채, 딱히 말하거나 전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밀어낸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겹겹의 장막을 치고 그 뒤에 숨어 있다.

11분짜리 영상 〈btw we wer weall headin headin din s ss som some somewhere a at at at t att d d ddiff didifferent s ssp spe speed pee peed speed ed ed speeedddoss〉(2023)는[4]김솔이의 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지(btw)”로 지칭된다. 제목을 읽기 힘든 만큼이나 보고 듣기도 쉽지 않다. 화면은 줄곧 번쩍거리고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의 볼륨으로 쿵쿵거리는 음악 사이를 잔뜩 뭉개진 음성이 오가는데 자막은 영어로 되어 있고 서사는 불분명하다. 같은 스크린에서 이어지는 영상 〈gris〉(00:06:00, 2023)는 〈btw〉의 자동차와 나머지 작업들 ― AI로 생성해 “good boy!”, “nice saddle!”, “nice leg!” 같은 식의 제목을 붙인 ― 의 말馬 이미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지만 (두 층에 걸쳐 걸린) 이미지들의 경로는 찌그러지고 망가진 자동차(〈super!〉, 가변설치, 2023)로 가로막혀 있다. 이런 많은 장벽들을 생각했다. 간판도 없이 포스터 한 장을 붙여 두었을 뿐인 건물 현관, 전시장에 당도하기 위해 걸어 올라야 하는 다섯 층의 계단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다.

작업들의 출발점이, 적어도 그 중 하나가 된 장애 ― 자신의 증상 혹은 리얼리티 ― 를 설명하지도 장애라는 화두를 구심점 삼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작업에서든 전시에서든, 모든 층위에서. 〈btw〉는 (서문과 함께 보면) 어떤 감각들을 희미하게 제시하기는 하지만 뇌전증이나 뇌전증을 품은 삶이 어떻게 경험되는지도 작가의 경험과 영상의 화제인 속도가 어떤 관계인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뇌전증에 대해 잘 아는 사람 혹은 뇌전증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뇌전증은 다양하므로 이 영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마 적을 것이다. 광과민성 발작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면 안 될 영상일 수도 있다. 비현실적인 보철 장치를 단 그림 속 말들은 손상을 보완한 것인지 애초에 개조된 것인지 (혹은 로봇인지) 알 수 없다. 자동차 역시 불의의 사고로 그렇게 된 것인지 위험을 감수하고 혹은 기대하고 내달리다 자연히 충돌에 이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옆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그 내용들보다는, 이 작업들이 누구에게 어떻게 말을 걸(지 않)고 있는지를 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 작품들을 만들어 전시장에 놓기까지 작가가 가장 많이 대화한 것은 AI일지도 모른다. 성실하거나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 전시장에서 무언가를 갖고 돌아갈 것이라고 혹은 작가 자신은 무엇가 얻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에는 (나로서는 대개 알 수 없으므로) 여전히 머뭇거리게 되지만 적어도 AI는 고대영이 입력한 문구들로부터 무언가 학습했을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학습된 내용이 다른 경로를 통해 다시 이 세계에 나오게 되리라고,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또 주저가 따른다. 적어도 좁은 의미에서의 대화는, 이 전시에 있어서, 배후의 닫힌 세계를 맴돈다.

그러니까, 특정한 장애/조건을 말하거나 사람들이 모일 장소로 만드는 대신, 여간해선 소통되지도 수렴되지도 않는 고유한 장애를, 혹은 장애를 둘러 입은 어떤 존재를 하나 만들어내는 일에 가깝다고 느꼈다. 배후의 세계를 닫아두고 그저 표면만을 드러낸 이곳은 관객이 나서서 말을 걸고 헤집지 않으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마찬가지로 닫혀 있는 세계다. “그냥 그런 거”라는 말은 망가진 채 옥상 문 앞에 놓여 있는 영문 모를 자동차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것에, 혹은 ― 장애 혹은 장애를 둘러 입은 존재로서의 ― 이 전시 자체에 적용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사회에서의 (수적인 의미만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인’ 존재 방식이다. 그냥 그런 것으로 인정되기, 해명을 요구 받지 않기, 어떤 표면만으로도 이면의 타당성을 전제 받기.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지원”을 받았다고 했을 뿐 ‘장애예술’을 표방한 적은 없지만) 장애예술로 읽는다면, 어쩌면 작은 역전이 일어나는 셈이다. 장애(가 있는 개)인의 현실을 알리는 비교적 소박한 시도든 새로운 장애관을 제시하는 비교적 거창한 시도든 무언가를 말하거나 보여주는 것이 기본이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대개는 작가나 작품이 말하기를 자처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말걸기/말하기는 관객의 몫이 된다. 묻고 물어 무언가를 알아내는 ― 스스로에게 이해의 과업을 부과하는 ― 것도 묻지 않고 ‘그냥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는 ― 상대에게 해명할 의무를 부과하기를 포기하는 ― 것도 관객의 몫이자 의무가 된다. 관객이 어느 길을 택하건, 이 전시가 만들어내는 장애/존재는 (배후의 닫힌 세계를 차단막 삼아) 전시장 밖의 맥락들과는 단절된 채, 온전하고 자율적인 위치에 남는다. 관객이 말을 건대도 그건 이제 피차 ‘그냥 그런’ 이들로서의 대화일 뿐이다. 나는 (늘 그렇듯)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가 말한 것은 물론 내가 본 것도 거의 기록하지 않기로 하였지만, 그는 줄곧 전시장에 머물며 누가 말을 걸든 기꺼이 응한다고 했다.

“Good Mourning”은 묘한 말이다. 하루를 여는 인사 ― 좋은 아침, good morning ― 와 같은 소리로 하나의 삶을 닫는 ‘좋은 애도’. 그러나 이것이 저문 것, 지나간 것, 사라진 것을 뒤에 두고서 옆에 있는 다른 조문객에게 건네는 말이라면 이 또한 무언가를 여는 인사일 테다. 그냥 그런 것이었던, 무수한 가능성이 있었지만 다른 가능성은 없는 어떤 삶의 표면을 딛고 다른 삶과 다른 대화를 시작하는 인사. 무언가를 닫는 일은 언제나 무언가를 또 여는 일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때로 어딘가가 열리곤 한다고, 그 문 너머에는 언제나 미로가 있다고는 말해도 좋을 것이다.

References
1 고대영 개인전, 《Good Mourning》, 서울: 수치, 2023.12.08-2024.01.05.
2 아마도 고대영은 이곳의 운영진이다.
3 제목은 없고 마지막 줄은 “(작성 중)”이다. 문장의 꼴을 갖추지 않고 그저 몇 개의 단어나 구를 나열하고는 마침표를 찍은 곳이 종종 있다. 쓴 이는 이 전시의 큐레이션을 맡은 김솔이. 모든 인용은 여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4 김솔이의 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지(btw)”로 지칭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