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에서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커튼이 바람에 일렁인다. 그 외엔 정적. 한쪽 구석에서 사람 하나가 나온다. 천정은 높고 커튼은 색이 밝아서, 검은 옷을 입은 그는 자그마하다. 잠시 무대 여기저기를 둘러 본다. 나지막히 무언가 중얼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다른 배우들도 차례로 등장한다. 처음의 그는 실제로도 나머지보다 키가 작다. 늘 다른 이들보다 한두 발짝 뒤에 서 있다. 배우들의 옷은 제각각이지만 완전히 검은 것은 그 뿐이다. 배우들의 목소리는 제각각이지만 늘 소곤거리는 것은 그 뿐이다. 무대에 오른 다른 배우가 둘이면 둘 사이를, 셋이면 셋 사이를 그는 쉼없이 오간다. 관객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만을 내면서도 계속해서 시선을 끄는 그는 마치 소실점 같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관객의 고개나 눈동자가 움직인다. 시야가, 구도가 변한다.
소실점이라는 말을 어떤 기준이라는 뜻으로 쓴다면, 시각적으로만이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그는 소실점이다. 그를 제외한 모든 배우는 멋대로 말을 꺼내지도 멋대로 자리를 잡지도 않는다. 그가 손짓하는 곳으로 가서 그가 소곤대는 대사를 읊는다 (그의 말은 들리지 않으므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의 소곤거림을 신호로 해서야 비로소 말을 꺼낸다). 말하자면 그는 무대를 지휘하는 작가나 연출가, 그런 의미에서 소실점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 리플렛에 적혀 있으니, 그리고 극중에서 언급되니 자연히 알게 된다 ― 그는 연출가도 작가도 아니다. 그의 정체는 프롬프터 크리스티나 비달. 오래 된 극장에서 오랫동안 프롬프터로 일한 사람, 모든 공연에 함께 했지만 늘 그늘에 숨어 있었던 사람이다. 그저 프롬프터 역으로 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실제로 프롬프터로 일해 온 사람이다.
프롬프터의 존재는, 혹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공연이라는 일은 꽤 역설적이다. 프롬프터를 두는 것은 배우가 대사나 동선을 틀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프롬프터를 두는 것은 배우가 대사나 동선을 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연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식을 택하는 일, 혹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가면서 실패하지 않으려 부질없이 애쓰는 일, 결국은 실패를 사랑하는 일이다. 실패가 두려워 실패를 사랑하게 되고 만 사람들의 일이다. 그 사랑을 멈추지 않기 위해 두려움 또한 떨치지 않기로 한 사람의 일이다. 결국은 삶이 두렵기에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 죽음이 두렵기에 죽음을 마다 않는 사람들의 일이다.
실패와 죽음만이 예정된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이라는 뜻이다. 대사를 틀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프롬프터를 두는 것도 부단히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다. 무대에 오르지 않아야만 피할 수 있다. 죽지 않을 유일한 방법 또한 온갖 건강식과 운동과 의료기술로 삶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살지 않아야만 죽음을 피할 수 있다. 공연은 또 한 번 꼬인다. 배우의 과업이란 연출의 지시대로 각본을 연기하는 것. 자신을 지워야만, 자신을 죽여야만 성공할 수 있는 과업이다. 배우의 생명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실수로 틀릴 때 혹은 의식적으로 저항할 때 ― 연기에 실패하고 배우로서는 죽음을 맞을 때 ― 뿐이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존재.
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 그렇다. 애초에 불현듯 태어났으므로, 운명을 믿든 의지를 믿든 삶이란 난감할 뿐이지 않은가. 운명을 믿는 일은 우리가 매순간, 적어도 기분 상으로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기에 의미 있거나 필요한 일이 된다. 의지를 갖는 일은, 어떤 일이든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에, 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운명이 흘러가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의미 있거나 필요한 일이 된다.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운명 때문이 아니라 그저 무작위적인 일이래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요인들이 얽히는 가운데 그 흐름을 끝내 무작위 이상으로 말할 수 없대도, 반대로 그것이 실은 딱 떨어지는 법칙에 따르는 일임을 알아내어 버린대도, 사정은 변하지 않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이들은 결국 죽음으로써만 삶을 구가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될 때에야 비로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곤경을 벗어난다.
극중에서 예술감독은 큰 병을 앓는다. 의사는 일을 멈추고 얼른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치료를 미루고 공연을 강행하면 죽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을 취소하는 일 또한 죽음과 다를 바 없으므로 예술감독은 거부한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되었더라, 무대를 보며 행복하게 죽었는지 아니면 다행히 때늦은 수술로도 목숨을 건졌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무대를 미처 보기도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는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으로써만 삶을 구가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었든 그가 죽음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얼마만큼이건을 살아 냈다면.
크리스티나 비달은 어릴 적 우연히 프롬프터 박스에서 어떤 연극을 보게 된다. 한순간에 연극을 사랑하게 된다. 연극을 ― 공연이든 그 준비 과정이든 ― 가장 가까이서 보는 사람이 된다. 연극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는 항상 연극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한다. 관객에게 존재를 들켜서도, 배우의 시선을 끌어 주의를 흩뜨려서도 안 된다. 그의 존재가 드러나지도, 그의 존재가 필요한 일이 생기지도 않아야만 공연은 성공할 수 있다. 그가 호출되는 상황, 배우가 그의 말을 잘 듣지 못해 관객에게까지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대사를 말해주어야 하는 상황, 그로도 모자라 그의 모습이 관객에게 보이게 되고 마는 상황은 모두가 재난이다. 이 사랑을 위해 그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 뿐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 때 비로소 그는 행복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다 (물론 배역으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배우도, 보이지 않는 힘으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연출이나 다른 스태프도 모두 그렇다, 다만 프롬프터가 좀 더 전면적으로 그러할 뿐이다).
이 공연에 등장하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이 공연을 제안 받고서도 몇 번이고 거절했다. 이 공연을 수락한 후에도 프롬프터 역으로만 출연하기를 고집했다. 끝까지 프롬프터이고 싶어서, 그러니까 자신의 방식대로 연극을 사랑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그저 수줍음이나 겁이 많아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은 무대에 올라버렸으니까. 연극을, 그리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집을 버리면, 자신을 버리면, 자신이 사랑해 온 연극을, 그 역사를, 다른 관객들은 알지 못하는 무대 뒤의 일을 관객에게 보일 수 있다. 자신의 사랑을 꺾으면 다른 사랑을 자아낼 수 있다. 다른 관객의 사랑도, 지금껏은 해본 적 없는 방식이 될 자신의 새로운 사랑도.
그리하여 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은 원래는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 겨우겨우 숨겨온 것들이다.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나는 실수투성이였던 무대. 배우를 사랑하는 데도 연극을 사랑하는 데도 아마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배우들의 개인사 (예컨대 늘 제멋대로 굴어서 프롬프터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거나 아예 공연을 망쳐 버린 어느 배우는 실은 부잣집 도련님이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이야기). 무대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어쩌면 미적인 판단이 아니라 예산이라는 사실. 혹은 이제 와서 안대도 별 수 없는 과거의 것들이다. 말 그대로 다시 없을 멋진 무대, 이미 세상을 떠난 어느 배우의 연기 같은 것들. 죽음은 무용하고 사랑은 불가능하다. 죽음으로써만 삶을 구가할 수 있듯,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펼침으로써만 사랑할 수 있을까. 살아서 사랑하기 위해 크리스티나 비달은 ― 혹은 무대를 만드는 이들은, 혹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내어보이기로 하고 또 죽기로 한다.
크리스티나 비달은 무대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프롬프터다. 그는 프롬프터 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소근거린다. 그러면 프롬프터 역을 맡은 배우들이 그것을 큰 소리로 되새긴다. 마지막으로 다른 역을 맡은 배우들이 그 대사를 써서 연기한다. 그의 존재는 (아마도) 두 번 삐져 나온다. 한 번은 소근거리면서다. 그가 무어라 소근거리자 예술감독이 막아선다. 그가 대본에 없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월권이다. (그는 무대-권력의 소실점은 아니다.) 두 번째는 마지막 장면에서다. 그는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연출이 몇 번이고 청하자 끝내 못 이기고 받아들인다. 제 목소리를 내기로 한다. 쉽지는 않아서, 프롬프터가 필요하다. 그는 대본을 들고 있으므로 대사를 외우지 못해서는 아니다. 프롬프터라는 자리를 또 한 번 벗어날 용기를 내기 위한 장치랄까, 그런 것에 가깝다. 배우가 쓰러져 미처 끝내지 못한 어느 공연의 대사라고 했다. 프롬프터로서의 자신의 죽음을 감행하기 위한 용기, 실패한 공연을 다시 한 번 떠올릴 용기, 이렇게 한다 한들 그 공연이 완성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어 온 그 대사를, 나는 그새 잊었다. 아주 연극적이지는 않게, 그러나 오랜 시간 지켜보고 속으로 따라 하며 몸에 베어버린 배우의 호흡대로, 담담하게 말했던 것 같다.
운명이라는 소실점. 그림의 원근을 잡기 위한 ‘가상의 점’으로서의 소실점. 혹은 평행하는 두 선이 저 멀리서 만나는 듯 보이는 ― 하지만 평행이므로 실제로 만나지는 않는 ― 그 점. 운명이라는 관념은 삶을 옭아매지만 동시에 자유를 상상하고 행사할 지렛점이 되고 삶을 맞닥뜨릴 완충 지대가 된다. 극본을 쓰고 공연을 연출한 티아구 호드리게스는 “죽지 않기. 무엇보다도 죽지 않기. 계속 살아나가기. 모든 것이 결국 잘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라고 썼다. 죽기. 기꺼이 죽기. 모든 것이 어떻게 되든 잘 죽을 수는 있으리라는 희망을, 어떻게 되든 죽고 말 것이라는 절망과 함께 품고서.
《소프루Sopro》(티아구 호드리게스 연출, 2022.06.17-19,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는 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붙잡을 수 없는 것, 참을 수 없는 것, 그러나 잠시 담을 수 있는 것, 전할 수 있는 것, 맞출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