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럴 센스를 교육하기

《모럴 센스》(겨울 원작, 박현진 각본·연출, 넷플릭스 제작, 2022). 정말 이렇게까지 ‘교육적’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우선은 그야말로 사전식으로 설명하는 진행을 보며 한 생각이다. BDSM이 주류 문화가 아니라곤 해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인기를 끈 게 그리 오래전도 아닌데. 다음으로는 너무도 모범적인 인물상을 보며. 상사에게도 할 말은 다 하는 사람, ‘편견 없이’ BDSM을 (여러 의미에서) 받아들이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약속하는 사람. 온갖 핍박 속에서 당사자들이 수립하고 옹호하는 이를테면 BDSM의 정석쯤 될 만한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BDSM 교육 교재이자 그 정석이라는 것이 온전히, 온전한 합의에 기반한 행위라는 점에서 BDSM에 그치지 않은 훌륭한 성교육 교재라고 생각했다.

그다지 재미가 없었던 것의 절반쯤은 그 탓이다. 윤리적으로 바른 것은 재미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만 있을까. 그보다는 아무런 실패 없이 정석만을 따르는 점이 ― 합의도 채찍질도 아무 실수 없이 해낸다는 점이 ― 이야기를 재미없게 만들었다. 처음 해보는 플레이를 저렇게나 잘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그렇다면 실은, 저런 합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올발라서가 아니라 아무런 중간 과정이 없어서, 현실성도 재미도 없다고 느꼈다. 결국은 사방에 넘치는 재미 없는 교재로 끝나고 마는 길을 택한다. 실패를 전제하지 않는 교육은 아무것도 알리거나 권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모럴 센스》가 교육에 실패하느냐고 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다만 BDSM 교재로서 혹은 합의의 교재로서가 아니라, 180도 돌아서, 뻔한 것의 교재로서다. 사랑 없이 (아마도 섹스도 없이) 플레이만, 이라는 계약으로 시작한 이 관계에 점차로 연애 감정이 더해질 즈음 두 사람의 ‘비밀’이 회사에 알려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징계위원회에서는 비릿한 모욕적 언사가 난무한다. 지우(서현 분)는 굴하지 않고 바른 말을 하지만 평소 이상으로 무력하다. 마찬가지로 바른 말을 하지만 나름의 ‘유도리’를 부려 온 지후(이준영 분)가 할 말은 해야겠다며 나선다. 무례한 이들을 향한 일갈과 비로소 하는 사랑 고백이 뒤섞인다.

앞에서도 몇 번인가 지우의 문제 제기가 묵살당할 때 지후가 저 ‘유도리’와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통해 지우를 지원한다는 점에서 지후의 행동도 그것이 제시되는 구도도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여기는, 지후가 처음으로 ‘주인님’ 지우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전도轉倒의 순간이다. 사소하게 반복되던 지우의 지원이 구원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는 순간. 부하직원-주인님과 상사-섭이라는 역전된 구도가 남성 중심의 안정적인 이성애 연애 관계로 회복되는 순간. 물론 아무리 무력해도, 지우는 여전히 곧고 당당하다. 하지만 직전까지 내부자로서 문제를 제기하던 그는 이제는 회사를 나가겠다고 말한다. BDSM은 이렇게 다시금 바깥의 것으로 밀려난다. 《모럴 센스》는 BDSM을 실패시킴으로써 훌륭한 정상성의 교재가 된다.

둘은 연인이 되기로 한다. 이른바 연디. 앞에서는 어렵다고 말했던 연인이자 DS 파트너. 그러나 이미 뒤집힌 ― 그저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 이 관계의 미래에 나로서는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 사내의 불건전한 관계들을 폭로하는 이들의 복수는 일견 정상적이고 권장되는 이성애 관계라는 것의 허상을 함께 폭로하는 듯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또 하나의 커플이 탄생한다. 순애보적으로 끈질기게 구애해 온 직원과 그럼에도 늘 선을 그으며 다른 곳에서만 플레이 파트너를 찾던 S 사장. “또 데이트 가요?” “나 너랑 갈 건데? 가게 문 닫고.” (…) “혜미 누나!” “어쭈, ‘사장님’, 어?” 그리고 밝은 웃음.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우리가 아는 대로의 사랑으로 모든 걸 되돌리는 종지부다. “S든 M이든 우린 모두 찾고 있잖아요, 가면 속 우리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 줄 사람.[1]지후는 자신의 S 성향을 센 척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설명한다. 전 연인에게 성향을 밝혔다 혐오스럽다는 반응을 받는 상처로 사랑에 … 각주로 이동 […]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인생이 통째로 바뀔 정도로 많은 걸 감수할 가치가 있겠죠?”[2] 그렇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해도, 여기서 말하는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일에 BDSM의 해소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저를 사랑한다는 이를 두고 낯선 이들을 만나 플레이를 하던 저 사장은 얼마 전 ‘변태 바닐라’에게 걸려 성폭행을 당할 뻔한 참이다. 지우 덕에 위기를 모면했고 그럴싸한 복수와 바른 말을 하고 자리를 떴으며 관객을 향해 실은 이길 수 없는 공포와 위험을 호소했다. 극적인 사건과 무사하면서도 바른 결말. 작중에서 몇 번인가 호명되는 변바는 BDSM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가짜/악인을 비판하고 제대로 된 BDSM을 옹호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듯하지만 다음 수순이 저런 사랑이라면 ― 여자는 사랑받는 게 행복이다, 라는 말은 아직도 얼마나 익숙한지 ― 예의 폭로와 다를 바 없다. 조금은 과하게 말하자면, 《모럴 센스》 스스로야말로 거대한 변바라 해도 좋겠다. 제 갈 길을 수월하게 가고자 안전하게 BDSM을 경유하는.

References
1 지후는 자신의 S 성향을 센 척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설명한다. 전 연인에게 성향을 밝혔다 혐오스럽다는 반응을 받는 상처로 사랑에 단념했던 그에게 지우와의 플레이는 이중의 치유다. 명시적으로 치유가 끝나면 함께 사라져도 좋은 것, 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2 그렇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해도, 여기서 말하는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일에 BDSM의 해소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One thought on “모럴 센스를 교육하기

  1. 이연숙, 「’모럴센스’가 드러낸 건 고작 변태적 노동환경뿐」, 《한국일보》(젠더살롱), 2022.03.05.

    “모럴센스가 재현하는 BDSM보다 더 자극적인 것이 바로 그들의 노동 환경이 아닌가? ”

    “모럴센스는 여자가 남자를 ‘고쳐쓰는’ 전형적인 할리퀸 장르의 구조를 따르며, 내 남자의 사소한 흠 따위는 교정해버리고야 마는 진정한 사랑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준다. […] ‘4B(非)’ 실천이 페미니즘 운동의 강령으로 부상하고 있는 와중에, 무슨 ‘전통적인 이성연애’로의 회귀인가?”

    “일견 ‘자극적인’ 포장지를 벗겨내고 나면 그저 “안정적인 감정 결속을 이루고 싶다는 갈망”에 시달리는 여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페미니즘이라는 혁명적 성해방의 도구가 가져다 준 무제한의 자율성”을 “마냥 환영”하지는 않는 듯한] 이 여자들을 내버려두고 ‘4B’를 고집하는, ‘사랑 없는’ 페미니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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