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여행하지 않으면서 여행객인 척 한다, 고 썼던 것 같다.1 이번 — 임유청, 『테크니컬러 드링킹』, 20192 — 에도 그런 종류의 가장이 있다면 그건, 영화 혹은 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척 한다는 점이다. 저번에 그랬듯 아마 이번에도 ‘척’, ‘가장’, 혹은 거짓말 같은 것은 아닐 테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변에 대해, 그러한 것들에 둘러싸인 자신에 대해 쓴다. 대개는 나는 모르는 것들이다. 목차에 제목이 언급된 일곱 편의 영화 중 세 편을 겨우 보았을 뿐이다. 본문에만 등장하는 것들까지로 넓혀도 그 수는 늘지 않는다. 술맛에는 관심이 없다. 이 글들을 읽는다 해도 영화들, 혹은 술들에 대해 이렇다 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B-side”로 넘어가도 마찬가지다. 피아노나 침대, 홋카이도나 털게에 대해 아는 바 없이 나아간다. 언급되는 사진 몇 장의 풍경을 상상해 보는 것조차 역부족이다.
다만 분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있다면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시고 신나 하는, 그러다 어느 순간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에이, 됐어, 라며 다시 잔을 드는 그 — 서문에는 임유청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했고 몇 편의 글에서는 스스로를 라고 칭한다 — 의 모습, 혹은 뒤에서 비치는 빛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유리창에 붙여둔) 사진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일부는 실제로 본 적이 있고 일부는 본 적은 없지만 왠지 확신을 갖고서 그릴 수 있는 모습. 이를테면 이런 정조다. “사장님이 퍽 피곤했겠다는 반성이 들기도 하지만…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14)
당연하게도 문자 그대로는 아니지만, 이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나를 좋아한다. 나를 바꿀 수도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 는 태도는 아니다. 곁에 있는 이에게 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피곤해지거나 피곤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줄 수 있는 것도 받을 수 있는 것도 없다. 곁에 있을 도리가 없다. 그런 태도를 좋아하는 것이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의 태도이자 안을 수 있는 사람의 마음,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여긴다.
“대부분의 문제는 어쨌든 혼자 해결해야 할 것들이지만 홀로 보내는 시간과 홀로 지내는 공간에 오래오래 잠겨 있다보면, 나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들을 해낼 사소한 용기부터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누군가와 식사 약속을 잡을 용기, 좋은 일에 축하 인사를 건네고 슬픈 일에 위로를 보낼 용기, 개봉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용기, 밤길을 산책할 용기 같은 것들 말이다.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나를 조금 더 용감하게 하고, 용감한 나는 오늘 혼자 있어도 된다.”(20)
어떤 영화는 친구와 함께 보았고 많은 술을 친구와 함께 마셨지만 혼자 앉은 방 안을 살피는 그가, 혹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그가 더 기억에 남는 건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보지 않은 영화, 즐기지 않는 술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혼자 됨이 목적지이고 함께 함은 경유지일 뿐이기 때문도 아니다. 혼자 있다고 해 봐야 여전히 영화와, 혹은 벽에 붙은 사진과, 그것도 아니라면 방과 가구와 몸에 들러 붙은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러므로 빙빙 돌고 멀리 돈다. 가야 할 곳을 빠짐없이 가고 머물러야 할 곳에 충분히 머무른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함께 할 이들이 있다.
“박의령은 세 명 이상만 모이면 어서 털게계를 결성하여 홋카이도에 가자고 끈질기게 선동했는데, 모두를 놀라게 한 건 의령의 강력한 의지가 아니라 그가 책정한 계비였다. 그는 1인당 한 달에 20만 원씩은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매달 모을 여윳돈 20만 원이 없다는 데에 분개하여 미처 생기지도 않은 털게계의 회장직에서 박의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회장을 추대하기 위해 정식으로 털게계를 발족했다. 여행 경험 많고 일 잘하며 포용력 있으며 공항에서 캐리어랑 정신을 잃어버리곤 하는 인조가 회장으로 선출됐다.”(114)
함께 빙빙 돌고 멀리 돌 이들 말이다.
지난번엔 모리를 만나고 배가 아파졌다, 고 썼다. 왜 그랬더라, 정확히 무엇을 부러워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무엇을 잊어서인지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라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이번에는 부럽지 않다. 굳이 이유를 붙여보자면, 불이 켜진 후의 영화관, 혹은 찰랑거리기에는 부족한 만큼의 술만 남은 잔의 바닥을 충분히 읽었다, 고 말해도 좋을까. (여기엔 쓰지 않았다.) 그간 바쁘고 피로했으므로, 책은 오랜만에 읽었다. 어제 읽은 책을 생각하며 오늘 점심엔 친구들에게 내가 생각보다는 책을 좋아하나보다고 말했는데,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읽는다는 행위는 아마도 연결에의 감각이다. 멀리는 나와 내 목숨의 연결, 가까이는 나와 오이와 레몬과 올리브의 연결이다. 가장 중요한 것 그것들이다. 가장 멀리에 있거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다. 특별한 건 두 끝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다.”(156)3
- 「모리를 만나고 배가 아파졌다」 ↩
- 혹은 여기. ↩
- 읽는다는 행위와 무관해 보일지도 모를 단어들이 이어지는 것은 첫 문장의 주어가 실은 “먹은다는 행위”인 까닭이다. “요리를 가장 못하는 사람의 가장 잘하는 요리”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져온 문장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