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다. 어릴 적에 보았던 《아마겟돈》 정도를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종말을 이야기한 영화를 본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쩌면 역시 오래 전에 본 영화 《터미네이터》나, 몇 년 전에 본 영화 《설국열차》, 혹은 드라마 《워킹데드》 정도를 계보에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멜랑콜리아》나 《에일리언》을 밀어넣어도 좋을까?) 혹여 빠뜨린 것이 있을까 싶어 검색하다가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 “세계종말 이후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는 분류를 발견했다. 내가 본 것만 추려도 《28주 후》, 《나는 전설이다》, 《레지던트 이블》 등의 좀비물 몇 편과 사막이 되어 버린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매드 맥스》, 괴생명체의 출현 이후 방벽 안에서만 살게 된 인간 세계를 그린 《진격의 거인》 등 여러 편이 이 목록에 실려 있다. 역시 이 목록에 있는 《버드 박스Bird Box》(조쉬 말러만Josh Malerman 원작, 에릭 하이저러Eric Heisserer 각본, 수산 비어Susanne Bier 감독, 2018)1를 며칠 전에 보았다. 지금 내가 종말에 대해, 혹은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영화 탓이다.
절대적인 힘이 세계를 공격하는 경우, 종말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구에 운석이 떨어져 땅이 물에 잠기고 하늘이 연기에 덮인다면, 갑작스레 빙하기가 도래하거나 대홍수가 일어난다면, 혹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계들이 일제히 인간을 공격한다면, 그래서 이 지구라는 공간이 인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 ― 종종 다른 생명체 또한 살 수 없는 곳이 ― 된다면 이론의 여지 없이 종말을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이라는 말은 늘 어렵다. 뭍이 사라진 시점에도 배 한 척이 남아 있다면, 이미 만들어져 있는 방한용구로도 빙하기의 추위를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다면, 전세계의 기계들을 통제하는 메인 컴퓨터의 전원을 차단할 방법이 하나쯤 있다면, 그러니까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것은 종말일까 아닐까.
좀비가 떼로 등장할 때 인간은 종종 너무도 무력하지만, 각각의 개체들과는 싸워 볼 만한 힘을 여전히 갖고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처럼 좀비의 발생이 전염병 같은 것이라면 ― 그리고 그 전염이 잠복기 없이 발현하는 것이라면 ― 치료제의 개발 혹은 바다를 건널 줄 모르는 그들로부터 안전한 어떤 땅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본 몇 안 되는 좀비물 종말 서사에서 주인공들이 실제로 해 내었듯이, 싸울 수 있고, 도망칠 수 있고, 때로 무찌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전설이다》나 《매드 맥스》 같은 것이 ‘(일단은 어떻게든 넘긴 )종말의 위기’가 아닌 ‘종말 이후’에 관한 이야기로 분류된다면, 이때의 종말이란 완전한 절멸과는 다른 무엇일 테다.
(때로 신의 벌이라 불리기도 하는) 어떤 재앙이 인류라는 종의 역사를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과는 다른, 이를테면 ‘인간적 삶’이라는 질적 기준이 붕괴하는 형태의 종말. 인간의 수가 급감하고, 활동 반경이 극적인 제약 아래 놓이고, 전기나 물과 같은 물자들을 양껏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상태. 물론 이런 상황은 인간이 끝내는 절멸에 이르리라는 공포를 주겠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위의 이야기들이 종말 이후에 관한 것이라면, 종말은 절멸 이전에 선언되는 셈이다. 인류의 역사를 끊임 없는 발전, 양적인 확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 오직 그럴 경우에만 ― 발전이 중단되고 양적 축소가 시작된 시점은 정당하게 종말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종말’
《버드 박스》가 상상하는 종말 역시 아마도 그런 종류에 속할 듯하다. 그것을 본 자는 대개 죽어버리므로 ― 보고도 살아 남은 자는 비밀을 밝히는 대신 타인들을 죽이는 데에 골몰하게 되므로 ― 끝내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무언가가 등장한 세계, 그러므로 모두가 눈을 가리고 살아야 하는 세계, 하지만 잘만 한다면 (구체적인 과정들은 묘사되지 않지만) 수 년간을 살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이 영화의 배경이다.2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질서는 붕괴된다. 정보가 제한되므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지도 타인을 믿지도 못한다. ‘스스로의 생명이나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마저도 무너졌으므로, 삶은 언제나 직접적인 공포나 불안과 맞닿아 있다. ‘인간적 삶’이라는 질적 기준은, 멀고 먼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영화는 이러한 질서의 붕괴 이후 먹고 사는 것,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주목하는 대신 어떤 관계들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듯하다. 밖을 나다닐 수 없으므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공간에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전의 세계에서와 같은 종류의 관계들이 형성되지만, 이제 희망은 헛된 것이므로,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으며 타인과의 만남에 대한 희망적인 상상 또한 권장하지 못할 만한 것이 되고 만다. 사랑이니 뭐니 하는 인간적 관계의 근거들은 여전히 유지되지만, 생존의 장면에 주목하지만 않지만, 어쨌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온전히 생존 그 자체다.
이렇게 정리한다면 특별할 것은 없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눈을 가리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을 가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상황은, 직접적으로는 정보의 차단을, 이차적으로는 그것에서 비롯된 질서의 붕괴를 낳음으로써 인간적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직접 보건 혹은 영상 기록을 통해 보건 어쨋든 시각 정보를 통해 그 기현상을 접하는 순간 인간은 죽게 된다. 이 기현상은 환청을 통해서도 사람을 유혹하는데, 시각의 경우와는 달리 여기에는 저항이 가능하지만3 그다지 강력한 장치는 되지 못할 것이다. 기억나는 장면들에서 이 기현상은 죽은 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었지만, 만약 살아 있(으리라 여겨지)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면, 속지 않을 길이 있었을까. (실내에서는 눈을 가리지 않아도 좋은 세계이므로, 동거인들과의 대화는 대개 시청각을 동시에 활용해 행해진다. 청각만으로 수용한 세계를 판단해야 하는 삶은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시각의 포기가 인간적 삶의 포기와 상당 부분 동치되는 셈이다. 기현상이 처음 거리를 휩쓴 후 5년이 지나도록 시각 없이 치안을 유지할 방법은 개발되지 않은 듯하고(물론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자체가 드러나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생활이 가능한 사적 공간에서는 여전히 시각이 충실히 활용된다. 시각 없이 인간적 삶을 유지할 방법이 상상되지 않는 이 세계에서는 결국 시각을 가진 자만이 인간으로 남는 것이다. 시각의 부재와 그로 인한 정보량의 감소 이후 세계는 시각에 크게 의존해 온 기존의 인류 문명에 언제까지나 못미칠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실용적인 정보의 감소만이 아니라 그것에 기대어 온 질서의 붕괴까지로도 이어지므로 이쯤에서는 선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 역사의 종말을,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종말을.
보고서도 살아 남은 자들과 보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
인간적 삶의 기준, 같은 말을 하기는 쉽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인류는 현재에도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물론 지역 대 지역 혹은 문화권 대 문화권으로서 비교할 때 모두가 서로 다른 수준의 물질 문명을 누리고 있으며 서로 다른 종류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러 서사가 그리는 종말의 상황은 그 중의 어떤 한 가지 기준, 이를테면 특권을 누리고 있는 어떤 사회의 기준의 붕괴만을 지시한다. 좀비의 창궐로 전기와 수도의 공급이 끊기고 야외 활동이 불가능해진 어느 도시의 상태를 종말로 표현하는 일은 전기와 수도가 애초에 공급된 적이 없고 독충과 맹수가 가까이 있는 어느 밀림에서의 삶을 인간적 삶으로 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각에 기대어 만들어진 문명이 붕괴한 순간을 종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문명 속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살아 온 이들의 삶이 어떤 위치인지를 드러낸다.
결국 나는 (이제는 반쯤 습관적으로) 이 많은 종말의 이야기들 앞에서 정상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만다. 《버드 박스》에는 눈을 가리지 않아도, 그러니까 저 기현상을 직접 보아도 생명을 잃지 않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악인이며 ― 사실 여부는 다소간 불투명한 것으로 남지만 ― 그런 이들이 최초로 집단으로서 등장하는 것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범죄자’들이 탈출하면서이다. 멀쩡히 기능하는 눈을 스스로 가려야 하는 상황에서, 정상성의 기준은 유지되지도 붕괴하지도 않는다. 시각 정보를 포기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비정상의 지위로 떨어지는 일이 아니며 또한 정상성을 가르는 기준에서 시각을 제외하는 일도 아니다. 순식간에, 눈을 가리는 이들이 정상이 되고 가리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비정상이 된다.
한편, 저 집단을 제외하면, 눈을 가리고 시각 정보를 포기하는 일은 기존의 인간적 질서가 붕괴함을 알리는 일인 동시에 변화한 세계에서의 인간적 삶, 아니 삶 그 자체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므로, 인간적 삶을 실현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그러나 뒤늦게, 애초부터 보지 않고 살아 왔던 이들, 그러니까 시각장애인들이 호명된다. 구태여 눈을 가리지 않아도 저 기현상을 목격할 일이 없는 이들. 그들만이 이 세계에서 기존의 삶을 온전히 유지한다. 불능, 무능과 같은 말과 함께 그들의 이름표가 되어 왔을 그것이, 이제 그들을 ― 나아가 그들에게 의탁하는 비장애인들을 ― 살리는 구원의 표지가 된다.
세계가 변하면 세계를 영위할 수월함의 기준도, 따라서 정상성의 기준도 변한다는 말로 읽히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그들은 너무나 늦게, 오로지 비장애인인 주인공들의 구원을 위해서만, 화면에 등장하며 아마도 여전히 무력할 것이다. 맹학교라는 공간 밖에는 여전히 공격자들이 있고, 이 학교의 구성원들이 지난 5년 간에라도, 시각 또한 활용하는 그들에게 맞설 어떤 방법을 배웠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맹학교에 누군가를 들이기 위해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도, 그 과정의 안전을 위해 방문자에게 총을 겨누는 것도 여전히 비장애인이다. 이 공간에서, 그러니까 시각장애인들을 비장애인의 사회로부터 격리해 왔던 (마침 숲속에 위치한) 맹학교에서, 이곳에서 살아 온 시각장애인들과 그곳에 몸을 맡긴 비장애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히 ‘서로를 도우며’ 살게 될 것이다.4
그나저나, 온전한 절멸은 아닌 이런 식의 종말 이후에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 종말 서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어린 존재들에 대해, 어린 인간들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누군가가 살아 남아 번식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미래일까. 그렇다면 인간의 유전자란 어디까지일까. 조금씩 변이하는 이 유전자의 어디쯤에, 인간이라는 선을 그어도 좋을까. 이런 생각들을 한다.
- 제목의 “버드 박스”는 아마 말 그대로 새가 든 상자를 가리키는 말일 테다. 영화에서 새들은 저 기현상의 접근을 인간보다 먼저 알아채는 존재로 그려진다.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감각적 한계를 보완하는 장치인 셈이다. 몇몇 동물들이 영화 밖에서도 종종 지진이나 해일을 미리 감지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생각하면 특별할 것 없는 설정이다. 다만 나는 이런 것들을 보며,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 그저 자원으로서 소비되는 지배 대상으로서의 동물종들이 특정 영역에서만 인간을 뛰어 넘는 존재로서 그려지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무능력한 자리에 배치되는 장애인을 순수한 존재로 그리거나 희생을 강요당하는 인간 여성에게 성녀의 이미지를 덧씌우거나 하는 일들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
- 금세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떠오르게 하는 설정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집단적인 실명이 질서의 붕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면 《버드 박스》에서 눈을 가리는 것은 최소한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 죽음을 피하기 위한 ― 수단으로서 도입된다. ↩
- 눈을 감아 시각 정보를 차단하거나 고개를 돌려 시각 정보를 선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귀는 막을 때조차도 여전히 소리를 거르지 못하고 듣는다는 이유로 시각에 능동성을 부여하는 일반적인 논의 방식과는 다른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
- 맹학교의 성원이 모두 전맹全盲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맹학교 밖에서 살아 온 시각장애인이 찾아오기는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버드 박스》가 얼마나 고려했을까. ↩